히브리서 강의(上)
본 강의는 신약학의 대가로 잘알려진 김세윤 교수님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사당동)에서 3학년 2학기(1994년 10월 18-11월 22일 까지)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994.10.18. 김세윤교수
린다스의 저서에 나타난 순서에 따라 히브리서의 성경의 사용,
히브리서1-4장까지 살펴보면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의 구약 해석이 알레고리적 해석인가? 일부 그러한 인상을 준다. 7-10장까지를 보면 구약의 내용들을 자세히 적용하는 것을 보면 그런 인상들을 받는다. 더구나 10장1절(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에는 율법은 다가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였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모조품이다’라는 말을 한다. 일부 헬라적, 플라톤적 본질적 이원론, 공간적 이원론을 사용하는 듯하다. ‘본래의 것은 하늘에 있고, 땅의 것은 그림자’라는 사고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 사고방식을 쓰기에 구약 성경의 법들, 가르침들은 땅위에 관한 것들로써 저 하늘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그림자, 비유로, 모조품으로 해석한 것 같지 않는가/? 그러므로 성전에서의 짐승제사를 하는 레위기 법들은 하늘에서의 제사의 그림자로서 사용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는가? 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Philo나, 또 다른 유대 학자들은, 기독교 문서에서 발견되는 진정한 알레고리적 구약 해석 방법을 비교하면 히브리서의 해석 방법은 전혀 다르다. 필로의 경우 구약의 모세오경에 나타나는 법들이나, 구약의 역사적 이야기들의 서술, 사건들에 대한 기술도 완전히 시간,공간적 터를 추상화시켰다. 그러므로 영혼의 덕목과 올바른 태도를 위해서 주어진 가치로 우리 영혼에 관한 상징적 기술로 그렇게 해석을 한다. ‘가령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났다’는 벧엘의 이야기는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라는 것을 역사적 시간과 공간의 틀에서 추출해서 사용한다. 그런 경우와 비교해보면 히브리서의 구약성경은 알레고리라 할 수 없다. 히브리서의 구약성서는 종말론적 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세상과 오는 세상, 1: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절에 암시해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준비하는 세대와 완성하는 세대, 즉 시간적인 이원론이다 이는 구약의 가르침이 앞으로 종말론적인 실재에 대한 예언적 성경을 띤다. 그러므로 필로나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의 유대교, 헬라의 유대교적 기독교의 해석 방법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10장1절을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앞으로 올 것의 참 된 것의 그림자라” 여기서 앞으로 올 것의 새로운 것의 그림자라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diploma의 유대교인들에게 일부 플라톤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으나 그러나 시간론적 종말론적 해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비와 성취의 구도로 보는 것이다. 본질적인 위의 구도와 아래의 모조품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3장,4장에서 본 출애굽세대의 광야 생활도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로의 해석대로 ‘그 세대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함으로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함이 아니라 일상적인 영혼에 대한 경고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영혼에 대한 경고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로 그 세대가 안식(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 마찬가지로 우리도 불순종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대구속의 날에 예배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인 것과 상관없이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대 구속의 날에 제사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완성했다는데 대한 의미가 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필로의 해석대로 구약의 대 구속의 날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늘 적용된다고 하는 해석과는 다르다.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저서들과 같이 구약을 예배적 사건으로 보고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둘째로, 초대교회의 다른 신약성경의 다른 짝들(바울에 있어서 ,사도행전에 모아진 설교에 있어서, 또는 베드로전서,요한복음)에 공통적으로 묵상되고 인용되고 해석된 구약성경을 히브리서도 함께 인용하고 묵상하고 있다. 히브리서가 이런 의미에서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사도적 전승에 서 있는 것이다.
시2:7(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110편, 사53장, 이런 것들은 신약의 다른 저자들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을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도 신약의 공통맥락에 서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시2:7, 시110편,사53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비교를 해 보면, 자기 나름대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성경이 시110편1절(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이다. 이는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와 히브리서가 동일하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저자들에 비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많은 부분 즉,4절(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까지를 사용한다. ‘여호와가 나의 주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원수를 굴복하기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는 말’과 더불어 4절에서 ’여호와가 메시야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음. 즉 멜기새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는 대제사장의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시8편의 인용도 마찬가지이다. 고전15:25-28절(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이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에서 바울은 시8: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절을 인용하여 기독론적으로 사용한다. 그리스도가 만인 위에 군림하는 것은 . ...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인간론적으로도 사용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으나 조금 후에 천사보다 좀 더 높은 곳에 도달하도록 지으셨다. 예수는 바로 메시야로서 먼저 가서 그 길을 뚫고 온전함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성에 이르도록 하신다.
히브리서의 구약 사용
1)알레고리가 아니라 예비적 계시, 약속에 대한 성취로 이해한다. 이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의 경향이 있는 구절이 있으나 히브리서의 기자가 종말론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2)신약의 공통적 전승과 비교해서 같은 구약 본문을 사용한다. 그러나 같은 구약을 좀더 깊이 묵상하여 깊이를 더한다
3)해석의 기교적인 면(기술적인 면)-랍비식 기교와 유사하다.
Chain citahan(줄줄이 이어져 풀이하는 방법,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풀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성경구절들을 인용해서 점 점 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두 구절에 같은 말이 있으면 서로 비교하는 것이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바울도 이런 경향이 있다. 또 다른 것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예를 들면 바울이 ‘율법에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을 인용한다. 이것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사도가 복음으로 생계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적은 것인 소의 비유를 삼아서 더 큰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즉 하나님이 일하는 소에게도 먹을 것을 주었는데, 하물며 인간에게 ,하물며 사도에게 ...라고 하는 것이 랍비적 해석 방법이다. 이런 방법은 바울에게서도 자주 인용되지만 히브리서에서도 자주 나온다
4)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메시야됨과 그의 죽음으로 구원이 완성됨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변증을 하여야 했다.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구약이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을 인용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신약 다른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성경은 사53:10-12절이다(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히브리서 기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다른 기자들과 좀 다른 것은 이 구절(사53:10-12)을 좀 더 묵상해서 폭 넓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53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의 속죄의 제물이 됨을 증명함과 동시에(베드로,바울,요한) 그리스도가 하늘에 앉아계심(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9:24-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이는 사53:12절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도 롬8: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에서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도 사53:12절을 인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나타난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5)히브리서의 구약 사용을 모형론이라고 할 수 있는가? (Typology)
3장과 4장을 시편95편을 인용한 것을 보면 모형론의 인상을 준다 출애굽의 첫맛을 보고, 가나안의 안식의 땅을 향해 가는 것을 묘사는 구원받고 천성을 향해 가는 우리의 모형이 된다. 이는 고전 10장에 나타난 것과 비교를 했다. 바울은 이를 모형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기자도 시95편을 통해서 나타난 민수기를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바울이 고전10장에 의하면 모형이 틀림없다. 그러나 린다스는 모형이라는 단어를 반대한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되풀이되는 것이 있어야 모형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출애굽에 보아야 한다. 즉 예수를 제2의 모세라고 했다면 모형론이 된다. 가령 바울이 그리스도를 제2의 아담이라고 한 것은 모형론이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에게는 그런 경향이 없다. 이는 모형이라는 말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는 가에 따라서 다르다. 바울이 인용한대로 모형론이라고 한다면 히브리서의 구약 성경 인용은 모형론적이다. 그러나 린다스의 경우처럼 엄격하게 적용을 하면 모형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은 신약에 있어서 종말에 완성될 것이 구약에 임시적(예비적)으로 비춰졌다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감(온전해짐)과 출애굽 세대의 가나안에 들어감을 예고해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들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에 예비되고 약속한 것을 성취해가는 단계라고 보았다.
6)성령에 대한 가르침
히브리서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7번이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공통된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령론 자체의 강조는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주요 논점에 성령의 중요한 역할이 되어지지는 않는다. 바울이나 요한에 비하면 성령론이 발전하지 않았다. 히브리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언급들은 두 종류로 구분 할 수 있다.
하나는 선교와 관계된 성령의 역사,히2:4절에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된 것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 그리고 성령 자신의 뜻에 따라 나누어 주신 성령의 은사들에 동반되어서 복음이 선포되었음, 여기에서 바울의 언어와 비교되었다. 바울도 자신의 복음이 표적과 기적에 의한 것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의 힘과 동반됨.
2:4절(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성령의=πνευματος’에 ‘성령’ 앞에 관사가 없다는 점을 주지 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2장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때에 성령의 역사(표적, 사도들의 설교를 동반한)에서도 누가는 관사를 약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도 가끔 다른 곳에서는 성령 앞에 관사를 넣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때에 넣기도 하고 넣지 않기도 하는가? 라는 논란이 있다. 이것을 문법적으로 확인하려는 자들과, 내용적인 차이로 분별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린다스는 누가와 사도행전에서 관사 용례와 비교하면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선교의 場에서 말씀선포를 동반하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날 때는 관사가 없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때. 그러나 반면에 10장29절(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처럼 ‘성령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적용해 주시는 중보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자 할 때는 관사를 쓴다. 즉 성령의 인격성을 나타날 때는 관사를 쓰고, 다만 성령이 구원의 힘 자체에 관심이 집중 될 때는 관사를 쓰지 않는다.
둘째는 성경 인용과 관계 있다. 예를 들면 3: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등에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하는 것으로 한다. 3:7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그러나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한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저자가 다윗임을 알고 있으나 ‘성령이 말하기를’ 라고 인용을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시95편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령이 다윗에게 영감을 주어서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지자의 영(영감의 영)이다.
예수의 제사장직
이는 히브리서의 중심 논지이다.
2:17(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에 처음 언급된다. 이는 2:1-4절에서의 경고(히브리인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떠나서 유대교로 돌아가면 안된다는 투), 다음에는 4:13-16절에 나타난다. 이는 또 3,4장의 경고(구원의 완성에로 ,안식에로 순례가는 도중에 출애굽 세대와 같이 우리가 성실하지 못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받는다라는 경고). 또 5:1절부터 제사장직에 대한 조직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형에 대해서 린다스는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다.
2:1-4 가볍게 지적하는 정도의 경고 (이러한 위대한 복음을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고 성령이 엄청난 능력으로 나타내고,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것을 저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3:12+4:1으로 가면서 점 점 강도 높게 진전한다
4:11-13절에는 좀 더 높은 강도의 경고가 있다
이러한 틈틈히 2:17,4:14-16에 대제사장을 소개한다. 우리를 잘 아시고 자비로운 대 제사장으로써의 예수. 여기에서 예수의 대 제사장에 대한 해석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신앙에 지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따뜻이 잘 달래려고 하는 것이다)
5:1절부터 예수의 대제사장에 대한 조직적인 해설
5:1-10-programmatic statemant
11-14-성숙한 이해에 대한 권면의 말
6: 호소와 강력한 경고를 한다(제2의 회개는 있을 수 없다. 한번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떠나가면 용서가 없음.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비로운 대 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을 한다)
7:-10:18 예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해설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 독자들은 1:3절(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음 받았다’는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세례 후 자신들이 계속 죄를 짓는 다는 것,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양심의 많은 부담을 느낀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의 속죄에 대한 확신이 점점 약해지고, 지금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과거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몸을 씻고, 음식을 가리고 짐승 제사를 드리던 그 관습을 기억하면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두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제사가 한번 영원히 효력 있게 일어난 제사로써 우리의 (독자들) 죄문제를 해결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둘째는, 독자들이 실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실재로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에 기자는 처해 있었다.
그런데 첫번째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번,영원히 효과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 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 해 줄 수 있는 제사라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독자가 알고 있는 말로 해서는 (되풀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저자가 좀 새로운 논제로 전개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린다스는 예수의 대제사장 되어짐의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 독자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교리를 저자가 개발하였다고 본다.
히브리서의 독특한 기독론과 구원론이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이를 설명하여야 한다.린다스는 히브리서의 구절 구절들을 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경고 사이에 끼어있다. 즉 두가지 강조되고 있다. 첫째,그는 지금도 우리의 대제사장이다.그러므로 우리를 지금도 도울 수 있다.
둘째,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다.
여기에서 독자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 그런데 지금 자기들이 계속 죄를 지어간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들은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죄를 풀어 버리는 행위를 했다(제사를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제사가 유대인들에게 효력이 있다고 보고 회당에 가서 그 영향력을 받을까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러므로 저자는 구약의 제사는 예비적인 것이며, 예수의 제사가 참된 것이다. 그러므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설득할 필요도 있지만 이미 그러한 것은 전해졌었기 때문에 효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현재 대세장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를 가르쳐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 해서는 소용이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가 지금도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써 그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속죄를 드렸을 뿐 아니라, 시110편,시95편,사53:10-12에 나타난대로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시110: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잠깐 동안 땅에서 있는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이다)’. 또 53:12- 메시야가 죄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을 연결하면 주후30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메시야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제사장이요,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은 현재의 우리의 죄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고 우리를 도운다.
이러한 착안들은 독자들의 독특한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994.11.1.김세윤, 히브리서
히브리서 5장,6장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저자가 세례 이후 주위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는 독자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대제사장 기독론이 시작되었다.
4장14절-16절(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는 과거에 십자가에서만 대제사장 노릇을 한 것이 아니고 현재도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의 문제를 돌보아 주시고 있다. 그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돌보아 주는 자비의 대제사장이다.
5장-6장. 메시야로서의 대제사장이다.
5:1-10. 대 제사장 기독론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분인가?를 원칙적으로 규명하는 구절이다.
a 1,2(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은 4장14-16절을 이어받아서 제사장은 원래 죄인들을 잘 돕도록 임명받는 자이다.
b 3절(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은 그의 사역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사역이다
c 4절(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은 그는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서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c' 5-6절(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예수가 하나님의 임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b' 7-8절(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가 우리와 같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께 순종을 배웠다.
a' 9-10절(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은 예수가 제사장 노릇해서 구원을 이루었다.
위와 같은 chiasmus구조로 되어 있다.
6절에 다시한번 인용된 시110:4절에 의해서 본문은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영원한 제사장이라 했다. 시110:4절에서는 제사장으로 되어 있으나 히브리서에서는 거의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에 있어서 대제사장의 제사지냄을 모형으로 일부러 예수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원칙적 선언에서 강조되는 것은) 목회적 역할이 죄인을 돌보고, 동정하고 대표하는 역할은 그것은 이미 4장14-16절에 이미 강조되었다.
그러나 물론 구약의 율법에서의 제사장의 역할도 목회적이었다. 죄인들의 죄문제해결을 위해서 제사를 드려주는일, 즉 어려움을 돌보는 제사장의 역할, 그러나 구약의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제사장의 역할은 제사를 드려주는 역할이 주로 강조되고 목회적 역할은 그것을 통한 간접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히브리서에서는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충분히 동정하고 우리의 문제를 중보 기도하고, 우리를 위해서 목회적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이다. 직접적으로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예수가 목회적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2장, 4장, 5장7-9절에서 강조되는 바와 같이 그가 우리와 똑같은 시험과 고난을 받고 우리와 똑같이 믿음으로 고난을 참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을 배워서 시험에서 흔들림이 없이 잘 견디어 내었고 우리의 처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7절에서는 놀라운 말이 나온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를 죽음에서 건져줄 수 있는 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눈물로 기도했다. 이 말은 예수의 이야기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예수의 전생애를 두 이야기 관점에서 요약한 것 같다. 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 시험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헌신에 충실했음.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널리 알려짐. 순종을 배웠다는 것.
8절은 아들이면서 고난 가운데서 순종을 배웠다. 이 말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야기와 시험 때의 이야기가 겹쳐 있는 것 같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자기가 아들임을 확인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될 자격을 얻었다. 그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임명하신다. 시2:7절과 시110편 4절을 인용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어받은 대제사장임을 확인한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기자가 개발한 독특한 기독론이다. 그러므로 다윗적 메시야이면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대제사장임을 나타낸다
11-14절에서는 1-10절에서 예수가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종말론적인 제사를 드렸다. 그는 자비로운 분이다.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요 논지이다. 이는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이를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다음 6장에서는 이들은 기본적인 복음을 전수받았고,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것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것이 위험함을 알고, 그러므로 가장 강한 언어로 경고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펼치고자 하는 새 교리,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수용하여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라고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5장11절에서 6장20절까지 나타난다.4장에서 5장10절까지 새 교리를 소개한다. 그리고 7장에서는 더 세밀하게 설명한다.
5장11-14절에서 기독교의 초보적인 진리와 더 성숙한 이해를 우유와 단단한 음식으로 비유하고, 우유를 먹는 어린아이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숙한 사람들로 비유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에서 하는 고전2장에 하는 언어와 아주 비슷하다. 특히 고전3장1절부터 3절(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까지의 언어. 거기에서도 우유와 단단한 음식, 어린아이(초신자)와 어른등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면의 공통적 언어이었던 것 같다.
독자들이 초보는 가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초보까지도 버리려고 하는데에 있다. 그러므로 6장2-3절(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의 한 것이 아니니라 대 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에 이미 신앙의 기초를 놓았다. 죽음으로부터의 회개,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례들, 안수함, 죽은 자들의 부활, 영원한 심판 항목들을 신앙적인 초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시작을 버리고 성숙한데에 나가지 못한다. 그런데 6가지는 특별히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유대교에서도 똑같이 말하는 것 아닌가? 유대교에서도 종말의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수에 대한 가르침, 세례들(몸씻음)이 있었다. 여기에 기독교적인 것이 있는가? 특별히 세례들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교회에서의 한번 있는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에 있었던 몸씻음, 죄씻음의 상징으로서의 몸씻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슨 까닭인가?
세례들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반복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독자들의 무리들에게 임하는 세례를 뜻한다. 안수도 세례 때에 행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바울적인 언어이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들은 죽음의 일들이라고 한다. 그런 것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세례 때에 있었던 설교와 관련이 있다. 즉 세례 때에 바울의 언어를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덧 입는다. 그리스도를 덧 입느다’라고 했다. 이러한 상징적 행위가 마치 예 아담을 벗어버리고 새아담인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는 세례 때의 철저한 회개, 철저한 새 사람이 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산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죽은 자들에 대한 부활이 약속되고 영원한 심판 때에 건짐을 받게되는 약속.
1-2절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때의 설교의 강조점-죄에 대한 회개,믿음 확인
그런데 이보다 더 진전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믿음의 첫 걸음을 돌이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다.
4-12절은 이미 놓여진 신앙의 첫 기초를 허물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하고 있다.
우선 4-6절을 본다. 한번 빛을 본 자가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자가 그래서 앞으로 장차 올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맛본 자가 (세례받은 자의 축복을 다 받은 자가)돌아서면(실족하면, 신앙에서 떨어지면) 다시 회개하기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자신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더 확증하기 위해서 7-8절에서 농사일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셋을 든다.
그러면서도 9-12절에서는 히브리인들이 4-8절에서 경고하는 믿음에서 떨어져서 불가능한데에 까지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고 말해주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그들을 돌이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본다.
6장 6절-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신약에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간데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고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었다. 즉 제2회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죄를 짓고 늘 회개를 새롭게 한다. 그러나 본문은 제2회개는 없다. 그러므로 양심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본문이 무겁게 작용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고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학계에서는 제한적인 적용을 한다.
첫째, 즉 타락한다라는 말은 큰 죄가 아니라, 일상에서 짓는 작은 죄를 말한다고 한다. 즉 큰 죄라고하는 것은 막3:29절‘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에 말하는 성령에 대한 범죄이다. 그러나 모든 죄가 성령을 거스리는 것이므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둘째, 또 터툴리안 이후로 많은 사람들은 요일5: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을 통해서 말을 한다. .
여기에는 두가지 죄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죄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이다. 본문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죄는 간음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6장6절의 것도 간음 같은 것을 말하는가, 혹은 고전 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 처럼 심하게 간음한 자들을 사단에게 넘겨주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위의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말하지를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는 의미로 타락한다라고 한다. 실제 히브리서 독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한다.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는 1장1-4절까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는 죄에 대한 제사를 드리는(죄를 씻는 죄를 드림) 분으로 묘사되었는데 그것이 부인됨으로 그리스도는 다시 못박혀야 되는 것을 연출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즉 복음의 가장 기초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장26,29절이 본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10:26-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이는 5:3-5절을 뜻한다.
10:29-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이는 6:6절의 완전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6장6절에서 믿음이 떨어진다는 것은 신앙을 완전히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에만 적용이 된다. 그러한 자에게는 제2의 회개가 없다. 그러므로 6장6절을 아무곳에나 적용하면 안된다. 오직 신앙을 완전히 버리는 것에만 적용을 해야 한다. 세례에 받았던 경험, 축복, 고백을 부인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사람은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 완전히 신앙을 부인하고 , 예수를 저주하고, 교회 사역을 방해한다. 이러한 자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제2회개가 없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가끔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일시적인 낙심을 했었다.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본문은 믿은 척 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였다.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받았다.
또 타락했다라는 말도 타락한 것 같지만 타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단어가 아니다. 완전히 타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설명은 본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해석에 불과하다.
본문 뿐만 아니라 신약의 다른 기자들도 많이 경고한다.
예를 들면 바울도 경고를 한다.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구원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다. 이를 고전에서 광야세대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경고는 파멸의 경고를 뜻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한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 지키심의 확신있는 말을 해준다. 이는 바울이 예정론과 견인론을 펼치는 것이다. 롬8:29절이 대표적인 구절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두가지는 항상 있다. 요한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어떠한가?
경고는 있다. 그리고 후에 예수는 자비로우시고,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알고 계신다.
6:1-8절까지의 경고에 비해서 9절부터는 확언(assurance)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6장6절의 말을 마지막 말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경고가 동일하게 등장하나 그 의도(Aussageafricht:용도)가 다르다.
바울의 경고는 책임있는 제자도에 목적을 두고 있다. 믿음에 깨어 있어서 두렵고 떨림으로 제자의 길을 책임있게 감당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바울의 확언은 시험과 고난을 이기고 용기와 인내를 가지라는 것이다. 건전한 믿음은 양자를 동시에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 하지 않고 문제를 재구성함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심으로 우리는 결코 파멸 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을 갖게 된다. 개혁신학측에 있는 자들은 확언 쪽만 강조하고(예정-견인론), 알미니안은 인간의지를 강조한다. 양측은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하지 않고, 성경에서 형식적으로만 추출하고 역사철학의 문제로 둔갑시켜 문제를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논리적인 모순에 빠져 해결하지 못한다.
건전한 믿음은 안도(Gelassenheit:우리가 신실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신다는 안도함,여유,기쁨,평화-이러한 것이 없으면 하나님을 염라대왕으로 인식한다. 조금만 잘못해도 추상같은 호령을 하는 분.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뒤틀리고, 이웃과의 관계도 뒤틀린다)와 경고(경고가 없으면 방종하게 된다)가 겸비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이를 적절하게 설교를 해야 한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경고의 대목이 나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결단하게 하고, 확언의 대목이 나오면 자신의 죄책감, 실패감으로 인하여 어려운 상태에 있으면 사랑의 아버지로써 나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안도함을 되찾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는 건강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즉 양자의 적절한 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완전히 버리려는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가장 큰 언어를 택했다.
린다스는 이 본문을 두고 질문을 제기한다.
‘믿음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갔다가 5년만에 기독교로 다시 돌아온 성도가 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잘 돌아왔다고 환영 할 것이다’
9-12절까지에서는 엄중한 경고 이후에 다시 그들을 달래는 말을 한다. ‘너희들이 완전히 믿음이 떨어진 자는 아니다 ’
13-20절까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심’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 주신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취소 할 수 없다. 바울이 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예정의 언어로 지키심에 대한 확언을 준다.
그리고 7장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 히브리서 上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