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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下)

정광고무 2008. 8. 9. 07:04

히브리서 강의(下)

본 강의는 신약학의 대가로 잘 알려진 김세윤 교수님의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사당동)에서 3학년 2학기(1994년 10월 18-11월 22일 까지)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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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8.화요일

히브리서 7,8장

 

지난번에 우리가 히브리서의 저자가 독자에게 당면한 심각한 고민하는 문제, 세례후 그리스도가 자기들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가에 대해서 불분명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자기들의 죄를 그때 그때 제사를 드림으로 해결하려는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복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초보의 지식밖에 없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좀더 성숙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교로 돌아 갈 수 밖에 없고, 다시는 제2의 회개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성숙한 지식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것. 그것을 잘 이해하면 그들이 당면한 문제가 잘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제 7장부터 히브리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들어간다. 이 히브리서 기자가 원래의 케리그마를 예수그리스도가 부활되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어 만인의 주로 군림하게되었다는 시편110편에 근거한 기독론을, 히브리서 독자들이 당면한 문제와 비추어서 해결하도록 했다. 원래 케리그마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에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게 하였다. 그러니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비유로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 자신들이 예수를 믿기 전이나 후에도 여전히 죄문제에 시달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자는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110편을 다시 묵상해 보니 4절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다시 앉힘을 받은 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러고, 지금도 현재적으로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신다.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속죄를 얻게 하시는 분이다. 그럼으로써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때도 제사장이 되셨었다.

 

본문 7장은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부분: 예수가 메시야로서의 제사장이심-즉 레위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한시적인 속죄 효과를 갖는 레위계열의 제사와는 달리 예수가 드린 제사는 항구적으로 효과가 있다.

둘째, 예수의 대제사장으로써의 속죄로 말미암아 새언약이 출범했다. 그래서 구원의 새 시대가 출범했고 그렇기 때문에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셋째, 구약의 대 구속의 날에 모형론적 완성으로 그리는 것이다. 구약의 대속죄의 날이 그림자로 반영하려 했던 것들이 예수가 죽으심으로 완성했다는 것을 밝힌다.

 

7장을 열자마자 예수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라는 원래 근거는 시110:4절에서 왔다. 이는 시편110편의 묵상에서 익숙한 것이다. 이 저자는 시편을 묵상한 뒤 곧 창세기로 간다. 창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이다. 그곳의 내용이 본문에 요약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이방왕들을 쳐서 살육한 후에 멜기세덱을 만나서 멜기세덱이 그에게 먹을 것으로 대접하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다’는 이상한 이야기로 끝마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상한 이야기이다. 구약 학자들은 어떻게 이해 했는가? 린다스는 ‘당시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 왕이 아닌가?“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되었든지 중간사시대에 멜기세덱의 이야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상력들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쿰란 11번째 문서에서 멜기세덱에 대해서 언급되었다. 이 문서의 이름을 멜기세덱 문서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종말에 하나님의 대표자로 나타나서 대심판을 하는 자로 그려졌다. 자세히 보면 시81:1절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과 동일시 되어서 나타난다. 또 자세히 보면 사61장1,2절에 해석으로 주어진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문서는 정작 창14장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창14:18-20) 전승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문서와 히브리서의 제사장론은 내용적인 유사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쿰란문서에서 히브리서가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필로의 leg, all III권에 멜기세덱을 알리고리화 해서 장황하게 표현한다. 즉 열정을(감정을) 다스리는 이성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창세기와도 관련이 없고, 히브리서와도 관련이 없다. 다만 히브리서 1장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이름이 분석되어 있다. ‘나의 왕‘이라는 분석이다. 이 처럼 또 그 예루살렘의 왕(평강의 왕)이라는 언어분석을 하고 있다. 필로도 이런 분석을 하고 있다. 필로는 히브리어를 모르고 있다. 이름과 칭호에 대해서는 ’의의 왕, 살렘의 왕,평강의 왕‘이라는 분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당시에 멜기세덱에 대한 분석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는 말이 필로의 책에도 나온다. 이런 인식이 당시에 널리 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시110:4절과 연관을 시켜서 영원하나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히7:3). 히브리서 1장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기독론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이에 연유한 것이다

 

영지주의 Nig haman이라는 문서(멜기세덱)를 분석해보면 히브리서에게 영향을 준 문서가 아니라 히브리서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11 Q Melichizedek와 Philo의 문서는 당시에 멜기세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나타낸 것과는 본질적으로 내용이 다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창14장과 시편 110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저자는 멜기세덱의 대제사장과 예수의 대제사장과 되심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첫째,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음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술과 똑 같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

둘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은 6절이하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큰 자가 아랫사람을 축복한 것이다. 멜기세덱의 아브라함보다 제사장의 계열 레위족속보다 더 우월하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레위계열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셋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이는 레위계열의 조상인 레위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은 부족적 인종적인 것을 나타낸다.-즉 레위의 제사장들이 레위의 허리에 있었고,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이는 그 후손의 씨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멜기세덱의 레위계열의 제사장들보다 월등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racial/national solidarity)

 

맬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것을 후에 교부는 중시해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써 성찬을 베푼 것‘으로서 해석을 했다. 그러므로 성찬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상응하며, 제사로 상응한다 성찬에서 받는 떡과 포도주를 제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카톨릭의 제사신학을 발전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이를 반영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려고 한다.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베품으로써 제사장이 백성들에게 제사에 참석하게 했다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교부의 신학과는 다른 것이다. 종교개혁이래로 카톨릭이 미사(제사)로 표현하는 예배에서 성찬을 중시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논쟁이 벌어졌다. 성찬이 제사라고 볼 수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유용하게 표현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이를 인용했다면 카톨릭의 신학을 뒷받침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인용하지 않았다.

레위계열의 제사장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뒤에

11절부터 28절까지 종말론적인 제사장직을 말해준다.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 즉 종말이 이름으로 인하여 그 이전의 것은 임시성의 시효를 잃어버렸다. 즉 심판에 당도했다. 예수가 종말론적인 제사장임을 밝힌다. 예수가 레위계열의 후손이 아니고 다윗 계열의 후손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레위계열의 제사장이 될 수 없다.다윗계열의 자손으로서 종말론적인 제사장이다. 이 예수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다. 그 제사를 (예수의 죽음) 인하여 예수는 구원자이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을 베풀수 있는 분이 되었다(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힙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예수의 대제사장으로써 그 십자가의 제사가 한시적인 레위계열의 제사에 대한 종말론적인 완성의 제사라는 것과, 그리고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레위계열의 제사로 복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옳지 않는 일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음, 예수의 멜기세덱적 제사장직과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이 다른 것을 보여줌으로써

16절(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후계자에 의한 (상속개념) 제사장직 승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예수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멸망 할 수 없는 생명의 힘으로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레위 계열에 속하고 그래서 대제사장직을 상속받는 그런 개념이 적용이 안된다. 예수는 메시야적 대제사장이다.

둘째로,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은 그것을 제정한(출28,29)것은 맹세함이 없다. 그러나 시110:4절은 멜기세덱적 제사장직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맹세를 하셨다(영원한 대제사장이다라고). 이 점에 있어서도 멜기세덱적 제사장직이 우월하다(20,21‘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셋째,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고, 부활하고, 영원히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는 상속할 필요도 없고, 후계자도 필요가 없다(23,24’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 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제사장직을 아버지로 물려 받아서 아들이 이어받는 이러한 레위계열의 제사장직의 승계를 예수는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넷째, 레위계열의 제사는 되풀이 되는 것이었으나, 예수 계열의 제사는 한번에 완성되는 것이어서 항구적인 것이 된다(25절,‘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영원히 사신다) 27절(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에서는 매일 드리는 제사는 이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레위계열의 제사의 부족함을 설명하고 멜기세덱의 제사가 우월함을 보여준 뒤에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가 훨씬 더 월하고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독자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현재형).라고 한 말은 예수의 제사에 대한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시110:4절에 멜기세덱에 대한 맹세는 구약의 언약에 대한 확신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을 8장6-3절까지 말해준다.

 

25절. 예수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기 위해서 영원히 사신다(현재), 영적 언명, 무시간적 언명) 그래서 그 제사장직이 현재 효과가 있다.

 

26절. 거룩하심과 흠없으심, 하늘에 높이 올림 받으심. 이런 것이 예수의 대제사장직으로써 온전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늘의 성전에서 현재 우리의 제사장직을 수행하기에 합당하심

 

이상의 것을 요약하면

메시야적 종말론적 영원한 대제사장

레위계열의 제사장보다 더 월등함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과거 현재까지 해결됨

반면에 레위계열의 제사는 효력을 상실했음

이 모든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대제사장이 있다’ 이 말은 시110:1절에 있는 말이다. 기자는 110:1절과 110:4절을 겸하여 쓰고 있다. 이 말은 그가 우리를 현재까지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우리의 현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제사장직을 감당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기자는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케리그마에 함축된 내용을 해석해 내고 있다. 그러므로 8장1절의 하나님 우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의 강조가 예수의 현재적 효과에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대제사장직을 이야기 하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제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제사를 논한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자기의 목숨을 드린 제사는 새언약을(렘31:31-34)의미한다. 이것을 8장7절이하에서 인용한다 예레미야서에서 예언된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또 10:16절에 다시한번,17절에 다시한번 짤막하게 인용된다. 8장8절과 10장16절 사이에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예수의 죽음을 새언약의 제사로 해석하는 것도 당시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고후3: 이후에 언급된 바대로이다. 롬11:26,롬3:25,26 등에도 같은 내용으로 쓰여진다.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 대한 이해는 쿰란 공동체에서도 중요하게 이해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새언약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다마스커스 문서를 보면 쿰란 공동체의 문서와 유사하게 취급한다.

여기에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히브리서 기자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새언약의 제사로 보는 것은 초대교회의 공통 케리그마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처음 선포되었던 내용속에 이 사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독자들은 지금과 같은 문제에 빠져서 옛 언약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가? 히브리서 독자는 옛언약과 새언약의 차이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서 독자는 옛 언약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예는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유대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할례(옛언약의 상징)를 강조한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2)반면에 쿰란 공동체는 새언약의 공동체라고 자칭함으로써 옛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다(CD문서:다마스커스 문서-쿨만공동체 문서의 일부 또는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됨) 바울도 옛 언약이 파기되었고 새언약이 성취되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논쟁의 구조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조와 유사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언약에 의한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는데 , 레위계열의 제사장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예수의 제사에 의해서 드려진 제사에 의해 완전히 무효화된 것을 보여준다. 예전에 드려졌던 제사는 예수의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종말에 실체가 왔으므로 그림자는 소용없음을 앞으로 보여줄 것이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자체에 대해서 예전에 드려졌던 제사의 장소인 성전은 하늘의 성전의 모조품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다(히8:7절과 출25:40절을 비교-시내산에서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모본에 따라 성전을 만들라. 그럼으로 옛 언약의 법에 의한 성전은 하늘의 성전에 모사품이다. 모형에 불과한 것이다. 이 언어가 플라톤적인 냄새를 풍긴다. 위에의 실체와 여기에서의 모조품. 아닌게 아니라 필로도 출25:40절을 애용했다.

 

이는 플라톤 철학에 잘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 구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를 잘 애용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히브리서에 있는 이원론은 철저히 위 아래의 수직적, 공간적 이원론이 아니라 이세대와 오는 세대 일시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시간적 평면론적인 유대적 이원론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시간적 평면적 유대교적 이원론과 위 아래의 수직적 공간적인 이원론이 아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히브리서에서는 빈도에서 보면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요한복음보다 훨씬 작고,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언어의 유사성은 있다. 그러므로 히8:5절의 해석은 이는 구약자체에 있는 사상이 아니라, 근동에 있는 일반적인 사상이다. 모든 땅의 것들은 하늘의 원형의 모형이다라는 것이다. 에스겔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특별히 헬라적 이원론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계시록 4:5. 또 중요한 것은 헬라적 이원론은 하늘의 원형과 땅의 모형이 항상 공존한다. 그러나 히브리 구약과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하늘의 원형과 땅의 모형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종말에 실현되어서 땅의 것이 무효화되어 버린다. 하늘의 것이 땅의 것에 대해서 대체됨. 하늘에서의 성전의 실체, 하늘에서의 제사, 멜기세덱적 메시야적 제사장직에 의한 제사가 땅에 세워진 성전, 레위계열의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졌던 제사들을 완전히 대체 할 것이다. supersession,replacemant))

 

 

 

 

 

1994.11.15.화요일

히브리서9장과 10장

 

9:1-10:18=예수의 제사

7장8장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 대제사장이 자신을 제사로 드렸다. 그 제사가 두가지로 해석되어 있다. 하나는 속죄의 제사로 해석이 되어 있다. 또 하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

 

9장전반부에 예수의 제사를(죽음을) 레위기 16장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고, 그 다음에 9장15절부터 예수의 제사를 출24장의 언약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16장의 대 구속의 날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구약의 모든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임을 보여준다. 완전한 속죄의 제사임을 보여준다.

반면에 예수의 죽음을 출24장의 언약의 제사에 비추어서 다시 설명하는 것은 그것이 영원토록 효과있게 드려진 제사이다. 그 제사는 지금도 효력을 발휘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에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는 것은 혹 신약의 다른 곳에 그런 흔적이 있는가?라고 학자들이 논쟁을 한다. 가령 롬3:24-26절까지에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의 제사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고 있음을 인용하고 있는가? 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롬3:24-26까지가 예루살렘 교회의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인용하고 있는가? 그것이 원래 신앙적인 고백이었다면 대구속의 날의 제사의 카테고리로 이해하는가 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약간의 한 두곳에 흔적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죽음을 대구속의 날에 제사로 설명하는 것은 히브리서 외에는 없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논지이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라는 것이 신약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속죄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이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로 설명 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둘째로 적절한 이유는 히브리서 독자들의 문제와 결부해서 적절하다.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어 자신들의 죄사함의 체험을 가졌으나, 세례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계속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에 대한 문제를 느끼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장벽을 느끼고 유대인의 율례대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다. 이들에게서 가장 매력있는 것은 유대교에서 계속 드려지는 제사이다 그것은 대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대구속의 날은 1년에 한번 드려지는 제사였고, 그 제사로 매일 회개와 매일 매일 드리는 제사와, 또 자기들이 특별히 지은 죄를 인한 율법의 규정에 따른 제사, 이런 것(1년 내내 진행되는 제사)에도 해결되지 않는 죄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대 구속의 날에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죄에 대해서 한꺼번에 속죄를 받는 대구속의 날에 강력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더구나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제사가 있을 때 전 유대인 세계에서도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 기간동안 전세계 모든 유대공동체에서 대구속의 날에 제사를 아주 엄숙하게 지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가령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유대교와는 분리되어서 살지만 유대인 공동체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속의 날을 옆에서 지켜 볼 때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부딪힐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대구속의 날에 입각해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해 줌으로써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고,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함으로써 유대교적 대 구속의 날에 동경심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정공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유효 적절한 것이다.

 

9장에서 10장까지 걸쳐서 진행된다.

9:1-14까지 집중되어 있다

9:1-10까지는 레위기 16장에 규정되어 있는 대 구속의 날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장막의 구성(두 곳으로 되어 있음, 거룩한 곳과 지성소-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데 장막이 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속죄소가 있음. 지성소 내에 있는 기구들에 대한 기술이다. 이는 출30:1-5,16:32절이하 등에 나타나 있다) 신약 시대에는 지성소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요세푸스가 증거하고 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소가 파괴됨으로 지성소의 도구들도 약탈, 파괴되기도 함으로 제2성전에는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지성소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시은소는 있지 않는가 라고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왜 지성소의 도구를 그리는가? 히브리서 기자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에서의 실제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규정에 의해서 토론하기 때문에 지성소의 도구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지성소의 장막의 구성을 그리면서 대구속의 날을 설명하면서 특히 두 가지 점에 유의하면서 강조를 한다. 하나는 장막이 두 방으로 되어 있다는 것, 성소와 지성소, 둘째는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것도 1년에 한번, 대 구속의 날에 들어가서 시은좌 위에 향을 피우고, 그 위에 속죄제물의 피를 뿌렸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이 두가지 사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첫째로, 과거 율법 체제 아래서는 유대교 체제 아래서는 하나님께 나아감이 극도로 제한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대 구속의 날에 복잡한 제사를 거쳐서도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대 제사장만 나갈 뿐이었다. 또한 항상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1년에 한번만 나갔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감’과 대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는 진정한 속죄, 하나님과의 화해, 친교(fellowship)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방이 두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8-9절(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에 의하면 성령에 의한 예라는 것으로 본다. 즉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이 레위기, 또는 모세오경의 다른 곳(민수기, 출애굽기)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하도록 명한 것은 구원의 두 시대에 대한 예언을 한 셈이다. 그 성소는 지금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에서 드려지는 상징하는 것이고, 지성소는 하늘의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새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우선 장막 성소와 지성소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그 자체가 벌써 율법 아래에서의 성전 안에서의 제한된 효과(부족함, 불완전함)를 나타낸 것으로 히브리서기자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9-10절에 중심 논지가 전개된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따른 제사로서는 그것이 심지어 대구속의 날에 제사라 할찌라도 예배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고, 기껏해야 외형적인(외적인) 정결이나 좀 이루는 그 정도에 그친다.(몸에 속하는 정결)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양심이라는 말은 (9:9,13:18등등) 히브리서 기자가 자주 쓴다. 이는 우리의 내면에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간하는 것 보다는 지금 자신의 윤리적 위치(위상)에 대해서 알려주는(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가?)것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양심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율법에 의한 제사는 그것이 심지어 대구속의 제사라 할지라도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하다. 독자들은 야심에 부담을느낀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도 죄를 짓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혹 유대교로 돌아가서, 대구속의 날에 제사를 드리면 양심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정면으로 공격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막의 구성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대제사장 한 사람만 1년에 한번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그 하늘의 성전은 땅의 모조품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완벽한 것일 뿐만 아니라 손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고(11절, 이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다. 새 창조에 속한 것이다. 새 세대에 속한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14절‘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년 대제사장이 대구속의 날에 드려졌던 그림자에 반영되었던 실제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늘의 성전(새시대의 성전)에 들어간 것인데 그것은 구약의 율법에 대제사장들이 매년 대구속의 날에 드리어진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이다.

이것을 10:1절에 요약하고 있다“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 아래서의 제사는 그것의 반영에 불과했기 때문에 해마다 되풀이 했다. 즉 항구적인 효과가 없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가지로 대구속의 날 뿐 아니라 구약의 율법 자체를 여러가지 분석해서, 외적인 우리의 모습을 정결케 하는데 에는 도움이 되나, 내적인 정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과 대조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우월성, 종말의 성취를 이해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유대교의 껍데기를 벗어버릴 것을 말하고 있다.

 

속죄의 날에 대 구속의 날에 제사의 부족에 비추어서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으심이 종말의 효과를 강조한 후에 ....

예수의 속죄의 제사가 종말론적인 제사로서 항구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 이전에 저자는 몇가지를 지적한다.

9장에서 구약의 레16장에 드리는 제사에 비추어서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꼭 필요한 것만 인용해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12절에 ‘예수께서 하늘의 성전에 들어갔다. -εις τα αγια라고 쓴 것에 유의하라.

9장3절에 땅에 있는 것은 성전과 지성소로 되어 있다. 대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갔다라고 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하늘의 지성소에 들어갔다고 해야 옳은데 , 왜 성소에 들어갔다고 했는가? 어떤 사람들은 필사자들이 잘못 베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기 보다는 묵시록 (4,5장)저자나, 히브리서 저자는 두 방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되어 있다. 하늘의 성전의 모조품인 땅에 있는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 있으나, 하늘의 성전은 한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암시는 우리 모두가 하늘의 성소에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레16장에 대구속의 날에 중요한 의식 중 하나는 속죄양을 광야로 내 모는 의식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레16장의 법대로 하면 두 양을 택하여서 한 양은 도살해서 그 피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로 가서 제사를 하는 것이고, 한 양은 그 후에 백성의 모든 죄를 덮어 씌워서 광야로 내 몬다. 그러므로 대구속의 날에 이중 의미(하나는 우리의 죄를 양의 피로 죄를 덮음, 둘째로, 죄의 본거지로 내 모는 것을 통하여 극적인 효과를 노린다.)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데는 제사드리는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8: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으로 이루려 하심이더라),벧전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요1:29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이하 등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진 양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몰아진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사53:4-7절에 나타난 주의 종의 노래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속죄양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이러한 것은 무시된다. 오직 제사드리는데에만 집중되어 있다.

대구속의 날에 양과 소의 제사로는 진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대제사장은 스스로 흠이 있어서 소로 제사를 드렸어야 했다. 이것에 비해서 예수의 속죄의 제사는 죄 없는 ,흠없는 예수가 (14절’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대 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속죄로 드렸다. 이것도 두 가지의 강조점을 두고 있다. 죄인 일 수밖에 없는 대제사장이 짐승 제사를 먼저 드릴 수밖에 없음에 반해서,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인 자신이 제물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기자는 이러한 것 두 가지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유대교의 대구속의 날의 한계성에 반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의 절대성을 확실히 부각시키는 논증을 했다.

그리고 15절부터 28절까지는 더 나아가서 대 구속의 날에 종말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항구적인 효과가 있다. 이러한 논증은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일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의 제사이다라는 카테고리로 논증하고 있다. 이미 9:11절(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에 그 주제가 예고 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도래한 좋은 것들의 대 제사장이라. 대 제사장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벌써 두 시대로 나누고 있음을 율법에 의한 제사 시대에 비추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구원의 시대로 나누어짐을 암시하고 예수를 새 언약의 중보자로 지칭하고 그의 죽음이 새 언약의 제사이기 때문에 그 새언약의 덕을 입는 자에게는 (믿음과 구원에로 부름을 입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구원이 약속되어 있다.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는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제사이다. 그러나 언약의 제사는 새 구원의 시대를 여는 제사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의 죽음이 속죄제사로서 우리의 과거의 죄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제사로서 항구적으로 효과 있게 한다(9:15-28)

 

이러한 논증의 일부에 언약 이란 말(διαθηκη )의 이중 의미(구약의 고전적인 의미, 유언이라는 헬라적인 의미)를 적절히 이용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출14:8절의 언약의 죽음으로 이해하니까 이 죽음은 언약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하는데 왜 헬라적인 의미로 이해하는가? 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히브리서 저자의 관점에서 ’유언‘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 얻어 내려는 것은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효과를 발생한다‘는 원칙을 얻어내려고 한다. 예수는 언약을 세우려는 분으로 스스로 자기의 죽음으로 그 언약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쉽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특별히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의 언약에 담겨져 있지 않는 새로운 뜻을 가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가 새언약의 중보자로서 그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 언약이 유효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언약을 효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막14: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히브리서 기자가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임박한 자신의 죽음을 렘31:31절(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에 예언된 새 언약의 제사로 설명해 주었다. 교회, 성도,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의(벧전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를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양도하고 있다.

고전11:25절(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에 바울이 전승한 바에 의하면 유언의 성격이 강하다. ’이것을 나를 기념하여 행하라‘그래서 고전11:25절의 바울의 덧붙인 말이 원래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전통적인 전승이라면, 유언의 성격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새언약과 유언의 성격을 동시에 적용하여 예수의 죽으심을 설명하려고 한다.

9:23-28. 지금 까지의 자기의 논증을 요약한다.

구약의 제사는 일시적인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새언약으로서, 새 시대를 여는 항구적이고 효과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사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는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10:1-18,지금까지 논증한 것의 실제적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였고, 우리가 새언약의 구원을 덧입는 자가 되었는데,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양자의 관계)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하는 일이 있고, 우리는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일을 할 것이 있다. 이것은 거룩함, 온전해짐이다. 이것을 지금 설명을 하고 있다. (10:1-18)

 

9:23-28,앞의 논증을 요약한다. 이것이 10:4절까지 지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대구속의 날이 해마다 되풀이 되었다는 것은 ’그런 제사로 항구적인 속죄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즉 소나 양의 피로는 원천적으로 죄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죄일의 제사의 원천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피 흘림의 제사로 죄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의 피흘림은 어떻게 항구적인 효과를 얻겠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히10:5-10절에 나타난다. 시40:6-8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지 않고 순종을 요구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고 서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40:6-8절의 대조(제사와 순종)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의 제사와 예수의 순종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구약은 모두 예언의 책이기 때문이다.

7절에 시인이 ’내가 그렇게 순종을 제사보다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겠다‘라는 시인의 말을 그리스도께서 한 말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미리 할 말을 성령의 영감에 의해서 시인에게 미리 말하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이 진정으로 효과 있는 것은 그것이 제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제사는 사실 근본적으로 죄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어떻게 짐승의 피가 우리와 하나님의 완전한 화해를 가져다 주겠는가? 제사는 단순한 순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의 제사요, 완전한 제사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예수의 제사는 순종 때문이다.

시40:8-내가 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려고 왔다 -고 하는데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읽어낸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거스림이다. 그러므로 거스림에 반대되는 순종을 통해서 죄를 해결 할 수 있다. 예수는 (히2장) 우리와 같이 되셨는데, 우리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사상들을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한번 이러한 사상들을 모은다.

히10:10-12에서는 시110편이 다시 한번 인용(암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신 예수를 다시 살리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신다. 즉 원수가 발아래 있기 까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 재림하시기 까지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전12:25)

히10:13-18는 렘31:31-33,34을 인용한다.

히10:16-17는,렘31:33,34만 인용되었다-율법을 우리 심장에 넣고, 우리 마음에 쓴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로 순종을 규정하는 것이다.

3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새언약의 관계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도록한다. 그래서 성화에 이르도록 한다( 34절은 ’내가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고, 허물을 기억하지 않겠노라‘)

10:19절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언약에 대한 요구를 하신다. 믿음 ....

*히9장과 10장은 속죄의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에 대한 내용이다.

 

 

 

 

 

1994.11.22.화요일

10장19절부터 13장까지의 내용

 

독자들이 지금까지 저자가 다시 한번 독자들의 상황과 다시 한번 연결시켜서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언약의 제사에 어떻게 믿음으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하는가? 부름,초청, 실제적인 요청의 부분이다.

이는 결론 부분에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받았으니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역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웅들의 예를 나열함으로써 설명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같은 믿음으로 종말의 부름에 가도록 하는 것이다

12장은 더 실제적인 것이다.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가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받게 되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들로 교육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라

13장도 실제적인 것을 다루면서 히브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복음을 전했던 선생들, 지도자들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의 모범을 잘 따라서 뒤쳐짐 없이 신실하게 나가도록 한다.

 

7-10:18까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설명을 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대 구속의 날에 제사)를 종말론적으로 완성함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폐기했다. 다른 한편 한번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종말에 새언약(구원)의 시대를 열어서 지금도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일을 예수가 하셨다라고 예수의 제사를 소개한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말씀하신 그 약속이다. 그 약속이 계속 유용함을 상기시켰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의 비밀을 옳게 깨달음으로써 믿음으로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10:19절에서 말하려고 한다.

10:19-10:39-앞에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한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해준다(10:19절). 이는 예수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의 길을 텄다. 이것은 앞에서 효과적으로 그림으로 사용했듯이 대구속의 날에 대제사장이 휘장을 뚫고 지성소에 나가서 제사드린 것과 유비시켜서 설명한다. 즉 예수님이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새롭고 생명을 주는 길을 열었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길은 유대체제에서는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진정한 제사를 드릴 수 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휘장이었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영지주의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곳 외에는 다른 곳에는 없다.

히브리서 2장에는 예수가 우리와 똑 같은 입장이 되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다. 이러한 사상이 110장에도 나타난다(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길을 터놓았다는 사실)그러므로 그는 유리를 대표 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그는 종말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마음에 피뿌림을 받아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세례의식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겔31:25절에 영향으르 받고 있다. 세례 요한은 세례시에 이를 적용했고, 예수도 적용했다)

2)서로 권면해야 한다

3)성도의 교제 모임속에 열심히 참석해야 한다.

 

*믿음을 완전히 부인한 자는 믿음을 회복 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은 모든 증인들의 증언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고 욕되게 하는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다.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27-31절까지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러나 32절부터는 달래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그 상태에 이르지 않고, 그렇게 이르지 않도록 주의해라’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2:2-3절을 인용한다. 하박국도 자기들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의 개입이 지체됨으로써 신앙이 흔들렸다. 그럴 때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인들이 유대인들로 돌아가려는 원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지체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체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은 핍박이 오지만(유대 공동체에서의 압력) 이러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면 해결 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함을 뜻한다. 즉 언약하신 하나님이 언약을 꼭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뒤로 물러서거나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합2:4에서는 롬1:17절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인이 됨을 논증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바울식으로 쓰지 않고 달리 쓴다. 쿰란 문서 중에 하박국서에 대한 주석이 있다. 즉 쿰란 공동체에서도 하박국 2장4절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합2:4의 전승사적인 발전의 경로를 추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이와 함께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바울과 쿰란 공동체에서 공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여간 믿음은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 하는 것은 바울,요한,신약 공동체,히브리서 저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기독교에서는 중심이다. 구원을 얻는 수단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는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다른 종교들의 해석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할려고 들기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는 듯 하나, 힌두교 같은 곳에서는 앎이 중요하다. 즉 헬라적이다. 힌두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이 구원의 수단이다.

구약에 있어서도 믿음이라는 말이 빈번하지는 않다. 그런데 나올 때에는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합2:4, 아브라함의 믿음(창12,15장),롬4장-시편의 한 두곳, ...등이다

그러나 빈도에서는 흔하지 않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해서 신약시대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믿음이 중심부분을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 설명하는데 중심적인 카테고리로 등장하는가? 이것이 중요한 신학적인 잇슈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쳤는가? 공관복음서에서 자신의 구원의 힘을 덧입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의 뜻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인다. ‘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선포에 대한 사건,-죽음’ 이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그 구원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신뢰함이라는 개념이다. Trust와 관계가 있다.

히브리서,바울,요한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다 일치한다(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 그런데 바울은 기본 뜻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가? 아니면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가?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옳지 않는 교리와 싸워야 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본 개념에 집중되어 잇다.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 신뢰에 근거해서 ..

즉 우리의 신앙고백을 철저히 지킴이다.

 

히11:1-믿음의 정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실상 υποστασις-밑에 가라앉는다(substance,foundation,assurance). 그러므로 단단하게 된다. 기초, 확신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믿음이 무엇인가? 손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실체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증거 ελεγχος-실험하다 라는 뜻이다.

이 정의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다.

3절: 믿음의 영웅들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3절은 1절의 정의와 4절에 부터의 믿음의 영웅들의 예와 다리를 놓는 다시 한번 믿음의 원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믿음으로 안다.

믿음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4절부터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약속은 미래적인 것이다. 그 약속은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성취는 새언약의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멀리 바라보면서 살다가 간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그네 같이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와 함께(부활의 시대를 의미함)...

즉 이들이 당대에 믿음으로 삶으로써 , 당대에 축복을 받아 누렸으나 ,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재림, 부활에 선취할 것이다.

 

12장은 예수의 궁극적인 믿음의 예-예수께서 어떻게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2절)‘하나님과 함께함’을 향해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의 길을 가신 분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분은 믿음의 완성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죄의 문제(독자들의 죄)를 다 제거하고

3절. 피곤하여 낙심치 말고 열심히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 길 중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그 고난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교육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직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고난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고난을 너무 연연해 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12절. 피곤한 성도는 무릎을 세우고 달려가야 한다.

14절. 고난 가운데 믿음의 길을 가는 길은 무엇인가? ‘화평을 도모, 거룩함을 좇고, 하나님으르 보는것(하나님께 나아감)’으로 구원의 완성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15절. 우상숭배하는 것, 음행, 간음, 쓴뿌리(신29:18절-쓴뿌리가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의 대표자는 에서이다(하나님의 약속을 경외하지 않는 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은 장자권을 버렸다-그러므로 유대 문서에서도 에서는 가장 악한 자의 예로써 나타난다)

18절- 시내산에 모세의 세대가 행하였던 것을 무섭게 표현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만남에 대한 약속(구원의 약속)과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에 대한 엄청난 심판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당도하는 산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22절)’이다. 하늘의 도성은 하나님의 도성, 하늘의 도성,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계시록)등을 의미한다.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만남이 우리가 앞으로 하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만날 것을 나타내는 유비이다.

에서가 등장하는 것은 에서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이 독자들이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면 장차 하나님으로 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을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이 심판 하실 때에는 시내산이 온통 흔들렸던 것처럼 온 세상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 때에 찬송하고 예배 할 것이다.

 

13장.형제 사랑을 계속하고.......=구체적인 선을 제시한다.

즉 복음을 전한자와 가르치는 자들의 말을 잘 듣고 행하라고 한다.

 

- 히브리서 下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