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믿음 창세기 17 : 1 -8 "아브람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一境)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로마서 4 : 18-25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람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란 뜻으로 믿음의 조상이란 미명(美名)을 가진 자로서 갈대아 우르 우상 숭배의 땅에서 하나님의 불러내심을 받은 축복이 사람으로, 이 시간 축복 받은 믿음이란 제목으로 그의 신앙을 배워 전 감함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의 계승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이 받은 일곱 가지 축복
두 번째,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어떻게 받았을까요? 1 . 아브라함의 신앙은 혁명적이요. 개혁적이요, 모험적인 신앙이었습니다(창 12 :4). 공산당은 증오와 보복의 혁명으로 파괴와 살인적이지만 기독교회는 성령과 말씀으로 일어나는 조용한 내적 혁명인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생활의 기반이 잡히고 울고 웃던 정든 고향을 떠나는 것부터가 하나의 개혁이요, 혁명이요, 모험입니다. "본토를 떠나라; 인간의 근성에서 떠나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 인정을 초월하여 습관을 떠나라,""지시할 땅으로 가라; 갈대아 우르에서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 (2) 신앙의 위인은 모두 이 혁명적인 모험의 믿음의 전환기가 있었으며, 이 역사는 오직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바울도, 루터도, 어거스틴도, 요한웨슬레도, 칼빈도, 성문어귀의 네 문둥이도(왕하 7 : 7 -10) 그러했습니다. (3) 신앙은 일대 개혁이요, 혁명이요, 모험이니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결단을 내려 우상 숭배의 땅과 같은 갈대아 우르의 옛 생활에서 떠나 신령한 가나안, 축복의 땅을 향하여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독도(基督徒)가 생명을 위하여 다 버리고 장막성을 떠났듯이 우리도 정든 우상, 정든 풍습, 정든 사람. 정든 악행, 정든 악업 등을 버리고 저 높은 나라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하겠습니다. (4) 끊을 것은 아기 탯줄을 끊듯이 끊어 버리세요. 그리고 떠날 곳에서 떠나세요. 버릴 것은 버리세요. 지킬 것은 지키십시오 거기에 새로운 변화와 축복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5) 어떻게 혁명을 일으킬까요? 복음을 통한 사랑과 성령으로 예수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갈 2 : 20, 고후 5 : 17). 레닌은 자기 아버지를 희생시켜 혁명을 일으켰지만 우리 성도님들은 자기를 희생시켜 일으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 :24). (6) 성도여 ! 우리는 모험을 무릅쓰고 아브라함처럼 혁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믿음의 혁신; 성신충만, 중생의 사랑으로, 열매 있는 신앙으로." "가정의 혁신; 축복 받은 가정으로"(행 16: 31). "교회의 혁신; 초대교회처럼 갖가지 충만하게." (7) 우리 위해 독생자를 버리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못 버릴까요? 옛 생활을, 구습을 버립시다. 가난. 질병, 불신앙을 벗어 버립시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행위를 벗어 버립시다. 자. 이제 손을 들고 저를 따라 해보세요. "믿음의 결단을 내려 옛 생활에서 떠나자." 못된 습관은 단호히 끊어버립시다. (8) 아브라함에게 3대 결단이 있었습니다. ① 고향을 떠나는 결단입니다 이 놀라운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축복을 가져왔듯이 우리의 새로운 믿음의 결단 위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오류동에 있는 상이군인들을 위한 원호병원에서 집회를 인도하는데 많은 환자들 중에서 두 다리가 없는 환자가 휠체어를 타고 앉아 열심히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예배를 필한 후에 그의 병실에 위문차 들렸습니다. 그는 반가워서 두 다리를 잃게 된 동기를 들려주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신앙은 성별의 신앙입니다. 성별이란 글자 그대로 거룩하게 구별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다 거룩하게 구별 받은 무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고전 6 : 19). (1) 아브라함을 아비 집과 본향에서 떠나게 함으로 성별 시키었습니다(창 12:1-2) . 이것은 옛 생활과 우상의 집에서의 구별을 뜻합니다. (2) 롯과 분리시킴으로 성별하였습니다(창 13 : 9). 롯은 고향에서 떠나올 때 너무 외로워서 조카 롯을 데리고 온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므로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3) 하갈과 이스마엘과도 성별하였습니다. 나이 많아 비록 종의 몸을 통해 얻은 자식이지만 후사를 삼으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거기서도 성별 시키었습니다(창 21 : 4). (4) 아내와도 성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래를 사라라고 이름을 갈아서 성별하셨습니다(창 17 : 15). (5) 자신과도 성별 시키시사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 하여 성별하였습니다(창 17 : 5). 마치 약혼하는 표시로 반지나 목걸이를 줌으로 기념하고 구별하듯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별시키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보혈로 하나님께 성별 함을 받은 이 시대의 나실인, 하나님께 받은 성령의 전입니다(요일 15 : 16). 3. 아브라함의 신앙은 순종과 복종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떠나라면 떠나고, 장막을 치라 하면 치고, 이름을 갈라 하면 갈고, 보내라고 하시면 보내고. 드리라면 드리고 그저 순종일관주의였습니다. (1) 순종은 기적을 가져오고 기적은 순종에서 비롯되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2)순종은 성령님이 내 속에 들어와 일하시도록 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일본 군대 말에 "몽꾸이 와즈니 하이 또 이에"라는 말 있습니다. 잔소리 말고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은혜와 축복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잔소리나 이유를 붙이지 말고 순종으로 일관해야 더욱 큰 축복과 유익이 됩니다(히 13 : 17). 바울은 그래서 자기 몸을 쳐가면서 순종했다고 했습니다(행 9 : 27) . (3) 오늘의 교회가 무력해지고 비난의 대상이 되어가고 분열과 혼란이 오는 것은 모두가 이 순종의 미덕을 배우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순종 없는 만나는 지금 썩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엡 5 : 6)고하셨습니다. 우리도 내 의견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겠습니다. (4)우리는 일본의 내촌(內村) 선생님의 말씀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계산의 죄를 짓지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이 나를 통해 주시려는 축복과 역사를 막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 아브라함의 신앙은 제일 귀한 것을 바치는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무 반항도 없이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그러나 하나님은 독자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하여 당신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에 가서 성지순례 중에 모리아 산에 올라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는 큰 바위가 지금도 회교도들에 의하여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다가 엄청나게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이 바위가 세계의 중심부라 하여 회교의 교주 마호멧이 얼굴을 대고 기도한 자리가 깊이 패어 있으며 또 회교도들은 그가 흑마를 타고 이곳에서 승천하였다고 주장합니다. (2) 우리도 독생자를 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아브라함처럼, 누가복음 7장에 나타난 여인처럼 내게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드려 더욱 귀중한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경험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3) 사실. 우리는 십일조 하나를 제대로 못 드리고, 주일하나를 못 지키고. 담배꽁초 하나 못 버리고, 악업이나 악행을 못 버리면서 헌신하고 봉사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위선 같습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송 용권 집사님이 교회 지하실에 12개 개인기도 실이 있는 곳으로 와서 내게 금반지를 뽑아 주며 기도해 달라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곳에서 실패하고 이 제단에 왔는데 이 제단에서 재기할 것을 믿고 감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해 주고 돌려보냈습니다. 얼마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의 부인이, 허리가 아파서 고통 당하는 남편에게 "당신의 소유 중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죠"라고 물었더니 "소유 중에 소중한 것이라고는 이 작은 반지밖에 더 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때 부인이 "그러면 그것을 목사님께 가져다 드리고 기도 받고 오세요." 하고 보냈는데 교회에 다녀간 후로 그 집사님은 강건함과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 (4) 훌륭하게 되기 전에 훌륭하게 바치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훌륭하게 드리고 훌륭하게 된 사람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영국의 한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 시간은 사람을 잡아먹는 아프리카의 식인종들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겠으니 있는 정성을 다하여 헌금하라고 한 후 헌금을 하기 시작했는데 헌금이 진행되는 중 한 작은 소년이 쟁반 같은 헌금통 안에 들어가서 있으므로 목사님이 "왜 너는 그 헌금통 위에 앉아 있느냐"고 물으니 "목사님, 남들은 아프리카를 위하여 돈과 금을 바치나 나는 드릴 것이 없어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때 목사님은 헌금과 함께 그 어린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5. 아브라함의 신앙은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저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을 생각하신지라"(히 11: 19).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내게 가장 영광된 시간은 사망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1) 철저한 내세관을 확보한 신앙은 이 땅 위에서도 축복 받을 믿음입니다(요 11 : 25, 고전 15 : 19). 부활과 영생과 재림을 믿지 못하는 성도는 헌금이나 봉사 하나 제대로 못 해보고 말썽만 일으키고 있습니다. 6.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믿어 주시는 신앙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 하나님을 독자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아노라" (창 22 : 12). (1)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4년 동안을 기회만 있으면 한탄강 깊은 굴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곳에서 여러 시간 기도하다가 두 손을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의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부른 찬송은 합동 439장입니다. 7. 아브라함의 신앙은 사람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비와 사랑을 겸유한 원만한 인격자로서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말하기를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했습니다. (1) 아브라함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넓고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았으니 옹졸하거나 째째하지 말고 롯에게 나타난 아브라함처럼 네가 우 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 하면 내가 우 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 한번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①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받는 사랑) 세 번째,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 믿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이상의 7가지의 좋은 믿음의 미행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은 데서 왔습니다. 1. 세겜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12 : 7). 나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본분으로 알고 행했을 때 축복이 왔습니다. 나를 위한 신앙은 유아기의 신앙이요. 여호와를 위한 신앙은 성숙된 신앙입니다. 2. 벧엘 동편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12 : 8). 우리의 신앙은 너무도 자기 유익만을 위한 것이라 기도를 해도 자기의 부귀영화만 빌다가 돌아가는 게 고작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거나 교회의 성도를 위한다거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우선으로 쌓았습니다. 3. 헤브론에서 또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13 : 18). 4. 모리아 산에서도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위하다 보니 백 살에 얻은 아들도 번제물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안전한 나그네 생활에서도 이르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지금도 축복 받는 믿음의 사람, 신앙에 성공한 사람들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이르는 곳마다 제단 쌓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 "너희가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했으니 우리는 찾고 또 찾고 찾으십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축복 받은 믿음, 축복 받은 가정. 축복 받은 사업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