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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그리스도인의 참예

정광고무 2008. 8. 9. 08:04

그리스도인의 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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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 20 : 20-23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때는 1961년 여름, 강원도 춘천 지방 모 교회에서 나는 땀과 눈물과 정성을 다 기울이며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양적 성장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40명이었던 교인이 불과 몇 달만에 80명의 교인으로 증가하여 교인들은 믿음의 생기를 되찾은 듯했고 교회는 활력 있게 성장하였습니다. 나는 땀 흘린 보람을 느끼며 더욱 분골쇄신하였으며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80명의 교인에서 점 점 교인이 줄어들더니 급기야 내가 처음 올 때보다도 더 줄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설교 준비나 심방이나 기도생활에 등한하지도 않았는데 교회는 이상한 공기가 떠돌아 마침내 여 선교회 회장님을 찾아가 물어 보니 "목사님 죄송합니다. 벌써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염려하 실것 같아서‥‥ 그러나 이제 목사님에게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고 교회 밖에서 우리 교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 속장님 한 분이 여러 모양으로 봉사를 잘 하시는데 그 속장님과 이 동네 어떤 남자와의 불륜의 관계가 소문이 나서 농촌 교회라 새로 나오는 교인은 물론 기성 교인까지도 신앙에 타격을 받았습니다"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너무나 크게 실망되어 그 즉시 제단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의 나의 기도 제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이런 때 제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또 하나는 '저 문제의 속장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는 제목으로 3일째 그 엎드린 데서 일어날 줄 몰랐습니다. 물론 먹는 것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입니다. 그런데 4일째 되는 날이 주일이라 밝으면 그래도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이라도 예배드리러 올 것인데 나는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여 더욱 안타까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3시경 나는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분명히 세 마디 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닥쳐온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열쇠가 되었고, 이 말씀이 그 날 낮 설교의 세 가지 대 요지가 되어 전 교인들이 감격에 벅찬 눈물로 은혜를 받았으며, 그 후에 이 세 마디 말씀이 내 평생 목회자의 자세로 기도제목이 되었고, 이 말씀이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드릴 은혜의 말씀입니다. 다 함께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정의감에 참예하자.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예하자.

    본문은 세베대의 두 아들에 대한 경고로, 그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님께 와서 절하며 자기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부질없는 간청을 하므로 예수님이 답답하시다는 뜻으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 : 20-23) 고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난을 겪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곳이며, 내가 받은 십자가의 고난을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하였는데 후에 그 형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 복음을 전하다가 요한은 기름가마를 거쳐 밧모섬에 유배되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세상 끝 날까지 남게 하였고, 야고보는 헤롯왕의 칼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행12 :2).

첫 번째,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의감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1 . 이 말씀은 절대 믿음 제일주의로 살라는 교훈인줄 압니다.

    즉 내가 지금 금식하며 기도하는 내용 중에 그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속장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는 데에 대한 하나님의 첫째 방법을 계시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정의를 들고 나타난 아모스처럼 처세하라는 음성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정의가 메말랐으며 교회도 그러함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외침이 그립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 7-8).

    니버는 정의와 공의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어두움의 자식이요, 악한 자의 아들이라고 책망하며 분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에서 좇아 나느니라"(마5 : 37)고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렘 5 : 37)고 외치면서 예루살렘 거리를 울며 울며 헤맸습니다.

2. 과연 세상은 정의가 메말랐습니다.

    한국 교회는 주의 말씀을 다시 배워야 하겠습니다 정의감에 살면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톱에 켜 죽었다는 이사야를 통해서 배우고, 정의감에 불타 왕의 죄악을 책망하다가 소반에 오른 세례 요한을 통하여 배우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30대 청춘으로 정의감으로 사시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어 아첨 종교에 넘어지고 있습니다. 도비야를 성전에서 추방하듯 오늘의 교회가 사는 길은 없앨 것은 없애고, 추방할 것은 추방하고, 바칠 것은 바치고, 지킬 것은 지키고, 받을 것은 받아야 다시 삽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채찍을 들고 물건을 파는 부정한 무리를 추방하셨듯이 새로운 개혁과 변화와 혁명의 역사가 일어나 새롭게, 정의롭게 살아야겠습니다.

    인도의 회교도와 힌두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서 서로 피를 홀리게 될 때에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는 평화를 위한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서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오다가 힌드라르라는 청년이 쓴 흉탄에 맞았습니다. 1948년 1월 30일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최후로 남긴 말은 "오 ! 하나님이시여, 오 ! 하나님이시여···"라는 두 마디뿐이었습니다 간디는 진실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이기 전에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따르던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더욱이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면서 정의감에 불타던 위인이었습니다.

    36세에 나치정권에 의해서 교수형을 당한 독일의 신학자 디이트리히 본 훼퍼 (Dietrich Bon hoeffer)는 복음의 진리를 들고 정의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체계적인 저서도 없고 옥중에서 쓴 편지밖에 없어서 그 편지를 모아서 책으로 펴냈는데 결국 20년 뒤에 그의 신학이 전세계의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 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독일 교회를 사랑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오늘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믿음 제일주의로 산 자의 열매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정의감에 참예하여 믿음 제일주의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고난에 주님이 동참해 주시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너는 목회하는 데 부흥과 안정과 평탄만 기대하지 말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데 내가 지고 간 십자가 즉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셔 보라."시는 산 교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 : 8)고했으며, 로마 교인들에게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롬 8 : 17)고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 : 12-13)고 권고하였습니다.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바라보고요,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 홍포 입으시고 빌라도 법정에 서 계시던 주님을 바라보고요, 찬송을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기 전에 배척을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축복과 영생의 종교이기 전에 고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붙이고, 목에 걸고, 달고 다니면서 영광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소망의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노래하다가도 그 십자가가 목사님이나 장로님에게 가면 모를까 자기에게 오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습니다. 그래서 현대는 십자가 피난민이 6.25 피난민보다 더 많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자기 동족들의 고난과 슬픔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바벨론에 내려가서 '그들이 앉았던 고난의 자리에 나도 앉아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말로만 애국하는 위정자가 아니라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위정자와 지도자와 목사님들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갖가지 고난에 동참해 주실 것을 믿고,

1 .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우리 교회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골 1 : 24).

    우리 교회는 각 분야마다 여러분이 참예해야 할 고난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변화 산에서 십자가 향해 하산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인 괴테는"십자가 없이 면류관은 없다."고하였으며, 시인 하이네는"의인들 앞에는 항상 골고다가 있다"고했습니다.

    토레이 (R. A.To,ley)박사는 크리스찬이란 무엇이냐에 대해서

      (1) 잃어버린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온 자
      (2)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영접한 자
      (3) 주님께 모든 것을 항복하고 맡긴 자
      (4) 세상에서 그 신앙을 고백한 자
      (5) 매일매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주의 몸된 교회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같이 사랑할 수 없는 성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교회와 주의 종의 고난에 동참하십시다.

2.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하여 주신 사명에 충실하여야 하겠습니다 (롬 8 . 17-18, 빌 3 :10- 11,히1 11 : 35-40).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내일의 부활을 신앙함으로 오늘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순교의 잔까지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사장의 호령과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가 들리는 날,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하고 죽은 자는 부활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는다면 주어진 사명의 고난을 즐거움으로 감당할 것입니다.
    78년 9월 어느 날, 은평 감리교회에서 목회 하시다 70세가 되어서 은퇴하신 한 기모 원로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은퇴 목사님으로 계시면서 형무소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결핵환자의 각혈을 치우시면서 봉사하시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손들을 모아 놓고 유언을 하는데 첫째는 후손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수첩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이시면서 이대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낡은 종이쪽지는 20년 전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장 김 병선 박사에게 약속한 각서였는데 "내가 숨이 넘어지면 내 시체를 연세대학 부속병원에 옮겨서 의대생의 해부학 표본으로 사용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이 효도하는 마음으로 혹시 매장을 할까 봐서 그 유언대로 해 줄 것을 다짐받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직후 부패되기 전에 그 시체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목사님의 유해는 기독교 박물관에 안치되었다고 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하여 민족적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종족이 너무나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늘진 인생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만도 아직도 8만 명의 나환자와 14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과 5만의 고아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60만의 군인, 경찰, 예비군, 그밖에도 너무나도 많은 고난받는 민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히11 : 25).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롬 8 :8)고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알베르 까뮈는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 학위만도 네다섯 개가되는 사람인데 아프리카 람바레나에 가서 흑인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흑인들을 치료해 주는 데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 20세기의 태양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까뮈는 노벨상 상금을 가지고 한적한 교외에다가 멋있는 별장을 짓고 신나게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즉사해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 이화대학교에서는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대학의 발전을 위해서 진지하게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20년 후인 오늘날 그 두 분이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한국의 여성교육과 복음사업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김 활란 박사님이신 데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에 모든 국민들이 슬퍼했고 모든 일간신문은 그의 생애를 높이 치하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희생의 씨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인에게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또 한 분은 희생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자기의 명예와 권력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날 때에 별로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마음으로 그늘진 자는 고난에 동참함은 곧 자기의 이름이 영원히 남는 축복을 받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믿어야 하는 십자가와 또 하나는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기만 하는 자가되지 말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생활이 있어야겠습니다.

세 번째, 우리의 사랑에 주님이 동참해 주시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 4 : 7-8).
    지금 문제의 속장님을 놓고 기도하는 나에게는, 속장에게는 정의로 치료하고 나는 고난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위로 받고 그러면서도 목회는 사랑으로 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 . 세상에는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잊는 자가 있으며, 하나님 사랑으로 자기를 잊는 자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 (John Wesley)가 꿈을 꾼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꿈속에 지옥에 내려가 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여기 우리감리교인도 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꽉 찼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장로인 교이나 침례교인이나 루터교인이나 천주교인 없습니까?" 하니 더 많이 있다고 하더랍니다.
    거기서 천국에 가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어 천사에게 묻기를 "여기 장로교인이 몇 명이 나와서 있습니까 ?"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침례교인이나 천주교인이나 루터교인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 우리 감리교인은 몇 명이나 와서 있습니까?"하고 물으니 감리교인도 한 사람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화가 난 웨슬레는 "그렇다면 도대체 천국에는 어떤 사람들이 왔습니까? " 하고 물으니, 그 천사는 더욱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여 기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랑에 동참한 자만이 와서 있다고 하더랍니다. 할렐루야 !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2) 그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3) 그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4) 그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은사 중에 제일 큰 은사는 사랑이며, 성령의 열매 중에 제일 큰 열매도 사랑입니다.

2.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골 1 : 4).

    우리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받아 독생자의 선물까지 받았으니 그 사랑에 감격하여 구속의 감격에 살아야 할 것은 물론이요, 성도간에도 사랑의 참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1) 성도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예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교제하며 떡을 떼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 10).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 13)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롬 12: 15-16).

    (2) 주의 종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의 참예가 있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갈 6 : 6)
      어떤 잡화상의 점원이 한 손님에게 자기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는 아주 훌륭하고 설교도 잘 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님은 그 점원이 교회에 별로 잘나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면 그 새로 온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점원은 아직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손님은 그 점원을 의아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면서 "그 목사의 설교를 들어 본 일도 없다면서 그가 훌륭한 목사라는 것을 어떻게 아오?"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그 점원이 말하기를 그 교회의 교인들이 전에는 그렇지 않더니 그 목사가 부임한 후로는 우리 상점에 외상 값이 있는 교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전부터 밀렸던 외상 값을 갚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무나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맺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의 세상에서의 자그마한 행실 하나도 목사를 위하고 교회를 위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3) 가정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의 참예가 있어야 합니다.

      비가 축축이 내리는 날, 어느 시골집에서 아들이 "출출한데 시루떡이나 해 먹읍시다."라고 하자마자 며느리가 떡방아를 찧어다가 떡 시루를 앉혀 놓고 불을 때는데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사랑해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솥이 꽝하고 터졌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아이구 이 늙은이가 떡을 빨리 먹으려고 불을 너무 지폈더니 솥이 터졌구나" 하고, 며느리는 또 며느리대로 "어쩌면 좋아요. 제가 솥의 물을 맞추지 못해서 솥이 터졌어요." 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데,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얘야, 젊은 사람이 뭘 알겠니? 내가 물을 맞추어 부어 주어야 했을 것을" 하고 며느리를 위로했습니다.
      또 물지게를 지고 들어서던 하인은 "아이구 마님, 이건 제 책임입니다. 게을러서 물을 많이 길어놓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데, 방에 앓아 있던 아들이 나오면서 "이것은 모두 제 탓입니다. 왜 오늘따라 떡을 해 먹자고 했는지 이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라고 서로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며 위로했답니다. 솥은 깨졌어도 그 가정의 평화는 째지지 않고 오히려 단단하게 뭉쳤다는 것입니다.
      서로 섬기는 생활을 할 때만이 참 평화가 있습니다.

    (4)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의 참예가 있어야 합니다. 그늘진 이웃을 찾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행으로 표현하는 것도 교회 사명의 하나입니다.

      1979년 6월 15일 오전에 영면한 윤 형중 신부는 생전에 자신의 두 눈을 서울 명동 성모병원 안구은행에 기증, 30대 실명자와 한 눈이 실명위기에 처한 교수에게 광명을 되찾게 했습니다.
      육신은 갔지만 남을 위하는 성직자의 고귀한 빛은 그의 뜻과 같이 남게 된 것입니다. 윤 신부의 눈을 받은 사람은 69년 식중독을 치료하다 약을 잘못 써 두 눈이 실명된 윤 석원씨와 5년전 각막 헬페스라는 난치병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 전북대 대학원장 장 현규교수 였습니다. 성모병원 안과과장 이 상욱 박사와 김 재호 박사팀은 15일 오후 6시와 16일 오후 1시 두 차례 각 1시간 동안 윤 씨의 왼쪽 눈과 장 교수의 오른쪽 눈에 윤 신부의 눈으로 각막 이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눈의 기증자를 모르고 있다가 담당 의사로부터 윤 신부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윤 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장 교수는 "그 동안 한 눈으로 강단에 서다 보니 학생들에게 소홀한 점이 많았다."며 "윤 신부의 고귀한 뜻을 계승하기 위해 신명을 다해 후세교육에 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윤 신부는 67년 4월 12일 성모병원 부설로 안구은행이 개설되자 "눈의 기증은 사자(死者)의 손상이 아니라 세상에 이롭고 고귀한 빛을 주는 길"이라며 제 1호로 헌안 등록을 했었습니다. 현재 성모병원 안구은행에 눈을 기증한 사람은 7백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참예는

1 .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정의감에 참여하십시다.

2. 우리의 고난에 주님이 동참해 주시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3. 우리의 사랑에 주님이 동참해 주시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다 감당해 주시고 우리는 그의 문제 해결을 통하여 더욱 축복되게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룩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