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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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눅 23 : 34)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 : 34) 주후 33년 4월 초순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는데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는데, 그중 중앙에 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십자가상의 칠언이란 제목으로 몇 차례에 걸쳐 생각하며 피차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는 며칠 전까지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고,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영생의 말씀이다라고 하시며 눌린 자에게 자유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길 잃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을 주시며, 주린 자에게는 빵을 주시며, 어떤 성자 영웅도 가지 못하는 거룩한 길을 걸어오신 이 나사렛 예수님은 33년 밖에 안된 아직도 혈기 왕성한 젊은이이지만 죄인 아닌 사형수가 되어, 상처에는 모진 매를 맞고, 채찍을 맞고 쓰러지면 또 일어나 구레네 시몬의 도움을 받아 14번의 흔적을 남기고 가시어 그 흔적은 지금도 성지순례자에게 깊은 감명을 주며,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기 때문에 주님이 쉬신 자리가 제일 길게 남아 있음을 나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골고다에 도착해서 로마 병정에 의하여 십자가에 누이시고 양손 양팔에 못을 꽝꽝 박아 중앙에 세우니 그때에 시간이 우리 나라 시간으로 9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의 모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안드레가 지고 간 십자가는 "X"이고, 안토니가 지고 간 십자가는 "+"이고. 베드로가 지고 간 십자가는 "†(뒤집혀진 십자가로 수정)"이고, 예수님이 지고 간 십자가는 "†"입니다. 이 당시 십자가로 죽는 이의 가족들은 고통 없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죽게 하기 위하여 돈을 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어떤 이는 한 주일씩 끌며 마치 뱀을 나무에 달아 놓으면 죽지 않고 꿈틀거리듯이 헛소리를 치고 가죽으로 치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는 저 십자가는 우리 주님이 지고 가신 후에는 승리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요, 사랑과 구원의 십자가요, 축복의 십자가가 되어 모든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노래를 어디서나 부르고 있습니다.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주 앞에 찬양할 때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12장 1∼2절에 있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앓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믿고 우리에게 와진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처럼 도망가지 않고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각각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섬기는 제단에서 부여받은 사명의 십자가를 비롯하여 가정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의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육을 찌르는 질병의 십자가도 있고, 어떤 이는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 경제적인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용도 목사님은, "내가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주님 앞에 가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시면 내 어찌 대답하리요"하면서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장차 주님 앞에 가서 설 때를 생각하면서 물질로, 시간으로, 몸으로, 생활로, 침묵으로, 십자가를 질 기회가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치 않으시고 내가 원치 않는 십자가는 오늘 이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는 충 모두 못박아두시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꽝꽝 못박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으니 지금 함께 우리의 질고, 가난, 각가지 시험 등을 감당해야 될 것은 감당하고, 영광 돌리시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연결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설교를 들을 자격도 얼고 십자가의 설교를 할 자격도 없는 줄 압니다. 인생은 누구나가 다 각각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 전 자기의 십자가와 가정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 34) 우리 주님의 성체엔 가시관을 비롯하여 갖가지 상처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양손 양팔엔 출혈이 계속되고 천 마디 골수가 부시고 가슴은 찢어질 듯하며, 두통에는 현기증이 생기고 위에서는 독수리가 그의 썩은 육체를 기다리고 있으며, 십자가 밑에서는 주의 옷을 제비뽑는 로마병정들이 있고 백성들은 구경을 하고 있으며, 관원들은 비웃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상에서 내려오라고 조롱을 하고 군병들의 희롱과 함께 신 포도주를 주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흩어지고, 멀리 서서 울고 계시는 어머님과 주를 따르던 여자들은 이성 잃은 몸부림에 지쳐 있었습니다. 1. 이러한 비통함 속에서도 주님의 침묵을 보십시요. 말씀 한 마디면 수많은 하늘 군사를 부르실 수 있는 주님 이 웬일이십니까? 그저 십자가상에서 침묵,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한 마디 신음소리나 원망이나 저주도 없으십니다. 한 마디 말씀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에 부스러기를 남게 하시고 풍랑 만난 바다를 잔잔케 하시며 사탄도 복종시키시던 권능 많은 주님은 막상 당신을 위하여서는 한번쯤은 입을 떼실 만도 하신데 잠잠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침묵은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계속 무저항주의로 돌입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생은 말로만 사신 분이 아니라 생활로 사셨음을 또 한번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1) 말로만 교인 노릇, 직원 노릇을 하는 말쟁이들이여 이 주님의 침묵을 배우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위하여서는 쉬실 줄도 모르고 가르치고 전 하셨으나 당신을 위하여서는 언제나 침묵하셨습니다. 혀에 자갈을 못 먹인 아첨교인이여, 하나를 하면 열을 자랑하는 외식한 자여, 십자가상에서도 침묵하시는 예수를 배우시고 털 끝 만한 억울함이 생기면 두 주먹을 불끈 지고 온 교회와 온 부락을 떠들며 돌아다니는 소란을 피우는 덜렁이들이여, 가야바나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상에서 침묵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하고 겸손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성전을 위하여서는 채찍을 들고 저주하시고 분노하셨으나 당신을 위하여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침묵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나와 여러분은 또 한번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반대로 성전을 위하여는 무관심해져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는 묻기도 전에 서슴지 않고 나서는 극성장이가 되었습니다. 대개 위인들 무덤에는 유명한 비문이 서 있으나 슈바이처 박사의 무덤에는 비문이 없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가 만든 대리석 십자가만 그의 무덤에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그는 90평생 동안 말해 이제는 더 할 말이 없고 십자가만 남기고 싶다는 뜻일 것입니다. 설교와 말은 많으나 생활이 없는 저와 여러분은 이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은혜를 받아 어디가나 말을 잘하는 성도가 되기보다 실천하며 침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도록 노력하셔야 하겠습니다. (2)그러면 침묵 중에 십자가상에서 우리 주님이 생각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 말씀을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치욕과 쓰라림과 고통 중에서도, ① 자기를 기다리는 하늘보좌를 생각하신 것도 아니고, 먼저 생각하신 것은 십자가 아래서 철없이 승리의 쾌감을 부르는 철없는 원수들입니다. 인자의 죽음이나 고통은 하나님의 유일무일한 성업완성을 위한 것이지만 몇 날이 못 가서 저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생각하며 수십년간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예루살렘의 그 웅장한 하나님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겹 놓이지 않고 무너지며 멸망할 갖가지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볼 때 주님은 저절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은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누구나 은혜 받은 자는 자기의 영광을 생각하기 전에 상대방의 멸망을 바라보고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은혜받은 스데반을 보십시요 자기의 하늘 영광을 생각하기 전, 돌을 던지는 멸망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음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 :60) 은혜 받은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였고, 또 은혜 받은 모세는 출애굽기 32장 32절에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하였으며. 은혜 받은 아브라함은 소통성의 멸망을 위하여 얼마나 안타깝게 호소했습니까! 그런데 요즘의 은혜자들은 원수 사랑은 고사하고 성도끼리 목사끼리도 물고 뜯으며 용서할 줄 모르는 완악한 상태로 변해 버렸습니다. 저는 산에서 2년 동안 산기도를 하고 내려와 제 가슴속의 사명에 불타 성령이 뜨겁게 역사하고 있을 때 제가 기도와 물질로 최선을 다하여 도와 준 모 과부 직원에게 좋지 않은 모함을 받아 갑작스럽게 그 교회를 떠나게 되어 이삿짐을 싸놓고 그날밤 제단에 나가 철야 기도하는 중 그 직원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에게 닥칠 하나님의 채찍이 영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저가 한 일을 알지 못하고 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라고 진심으로 기도를 하면서 이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첫 번째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 받았습니까?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해를 주고 상처를 입히고 헐뜯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에 성령께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감동과 감화가 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여기 주님의 십자가상의 첫마디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산 교훈과 진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원수의 죄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 보훈에서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하시며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시는 교훈을 지금 십자가상에서 실천하고 계십니다. (마 5 : 39-42)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 : 23)하신 말씀이나, "네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무한정) 용서하라"는 교훈을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실천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내 아내가 일곱 번 정숙하지 못한 짓을 했으면 일곱 번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처럼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는 힘드는 일이나 성령의 감화가 오면 가능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무서운 죄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우리도 남의 죄를 용서해 주고 축복하여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주님의 아버시지요, 우리의 아버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교훈하셨습니다. 성도는 아버지가 두 분이십니다. 그것은 시아버지와 친정 아버지가 아니고 육신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세째로 이 십자가의 첫 말씀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사죄의 길이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아담이 범죄하여 실락원이 된 이후 인생의 모든 죄는 내가 지고 가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로 이 기도는 십자가상에서 시작하신 후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는, ① 가야바와 같은 죄악도, 성도여, 여러분 주님을 십자가에 다는 무리에게 기도해 주시고 속죄를 빌어 주시는 우리 주님 앞에서 우리의 어떠한 죄악이라도 속죄함 받지 못할 것이 없음을 믿으시고 어떠한 죄라도 주께 돌아와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곧 속죄하여 주시며 평안히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속죄함 받지 못한 죄악은 너무너무 커서 자신이 평생을 두고 받아야 하며. 내 자손 3, 4대까지 받아야 하며. 사후에는 영원히 받아야 합니다. 나도 속죄함 받고 남의 죄를 용서하고 주님처럼 가리워주며 복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네번째로 주님은 이방인에게 죽지 않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죽으셨음을 알 수가 있음이다. 현재도 예수님은 불신자들에게 욕을 당하시거나 해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외식하는 교인이나 맹물단지 목사와 장로들에게나 신학자들에게 계속 해를 받고 계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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