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기초연구

[스크랩] 성경기초연구4,

정광고무 2012. 6. 8. 15:32

성경기초연구4,

제 24 과, 성도의 죽음

< 성 경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1. 죽음의 기원

먼저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문제를 알기 전에 죽음이 왜 왔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이 선포하심으로 사람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16-17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에게, “먹지 말라,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아담은 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참조).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흙으로 된 육체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것은 선고받은 그 즉시 죽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창세기 3:17-19 참조).

이 말씀 중에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필경은 종말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그 몸이 원상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씀이 이 죽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알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아담의 죄와 죽음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은 범죄 함으로 이미 성령이 아니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육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의 혈통을 따라 자기 모습대로 자손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자손은 다 아담과 같은 죄와 죽음의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2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것처럼 우리도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죄인이 되었고, 아담이 죄 값으로 죽게 된 것처럼 우리도 아담 안에서 죄로 죽게 된 것입니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인간은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 그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흙으로만 창조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창조 받을 때부터 영혼이 존재했습니다. 이 영혼은 육체와는 전혀 별도의 것으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입니다. 이 영적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26 참조).

그러면 육신의 죄와 이 영혼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육신의 죽음과 영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죄는 첫째로 사람의 육신을 죽게 만듭니다. 이것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입니다.

둘째로 죄는 인간의 영혼을 더럽힙니다. 죄인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영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에스겔 18:4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히브리서 9:27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그래서 죄를 범한 인생에게는 두 가지 죽음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영혼의 심판입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28).

그리고 우리가 명심할 점은 사람은 한 번 죽은 것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둘째 사망으로 죄의 심판이 완전히 끝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받는 심판이 완전한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성경책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0:11~15, 21:8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이 사망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불꽃인 지옥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은 사망이라고 나와 있지만, 영원히 형벌 받는 형편을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다 죽은 것이 인생이요, 다 무서운 지옥의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할 인생들을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3. 육신의 죽음

우리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 요소인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의 죽음은 육신과 영혼과의 분리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도서 12:7).

그러면 왜 영혼은 하나님께로 갑니까? 선악간에 심판을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절 말씀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은 흙이므로 기력은 진하게 되고 쇠약해지며 그 기능은 또한 소멸됩니다. 그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이 오는데, 이때 영혼은 하나님께로 분리되어 올라가게 됩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으니 무덤에서 티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육체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가 무덤에 있는 것은, 다만 부활할 때까지만 한정되어 있는 죽음이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잠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 육신을 떠난 영혼은 어떻게 되나?

육신은 신자나 불신자나 같은 상태에서 무덤에서 티끌로 돌아가지만, 영은 죽지 아니하는 존재이므로 육신과 함께 땅에 묻힐 수도 없고 어디로 인가 증발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가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주님은 분명히 우리의 영혼이 가 있을 곳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3:42-43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죽자마자 즉시 그리스도인의 영은 완전히 거룩한 상태로 영광 중에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 이끌려 간 일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1-4 참조).

* 두 가지 잘못된 사상

⑴ 영혼 수면설 : 이 영혼 수면설은 육신이 죽으면 그의 영혼도 육신과 함께 잔다는 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인간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영혼은 의식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6:19-31 참조). 주님은 사두개인들의 부활에 관한 답변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오,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마태복음 22:31-32 참조).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순교를 당한 영혼들이 제단아래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요한계시록 6:9-10 참조). 이런 성경적인 근거는 사람의 영은 절대로 없어지거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어느 장소에서 부활의 날까지 영광 중에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을 누릴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거처는 천국이요, 불신자의 대기소는 지옥입니다. 신자는 천국에서 불신자는 지옥에서 부활의 날까지 영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 부활의 날에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부활하여 영육간의 축복과 저주를 받는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⑵ 연옥설 :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기 전에 연옥이라는 곳에서 일정 기간동안 형벌을 받아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지은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설입니다.

이 사상은 천주교적인 사상입니다. 이 교리는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은 성령이 거듭나게 하심으로 이미 거룩해진 것입니다. 이 의는 주님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에 완전한 거룩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었음으로 영이 새삼스럽게 거룩해지기 위해 연옥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5. 그리스도인들도 죽어야 하는 이유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죄 값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죄 값이 다 지불되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는데, 왜 죄 값인 죽음을 거쳐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이 육신의 몸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다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흙으로 만든 육신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나 생명이나 영생은 이 몸이 다시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아니할 몸인 부활을 약속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을 통하여 영생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이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육신의 죽음은 불가피합니다.

고린도전서 15:35-38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결론 : 영생이 주어지고 부활이 약속된 우리들은, 이미 사망권세를 이긴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부활의 영광된 몸으로 변화시킬 때, 그리스도인에게서 모든 저주와 죽음은 영원히 사라져 버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 15:53-57).제 25 과

(제 25 과), 부활과 심판

< 성 경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1. 그리스도인의 부활

우리는 먼저 부활교리가 우리 기독교의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⑴ 천국은 영이 사는 곳이 아니고, 부활한 몸이 가는 곳입니다. 신자들의 영이 죽은 후 천국에 올라가는 것은 영원한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 아니라 부활의 날까지 소망 가운데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영적 생명이 살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라 부활한 몸이 살 수 있도록 창조된 곳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죽은 자들이 어디 있다고 했습니까? 위의 12절 말씀에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다고 했습니다. 바다도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사망과 음부도 내어준다고 했습니다. 내어준다는 말은 해방시켜 준다는 것으로, 죽음이 죽은 자들을 풀어주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지옥에 가는 것도, 천국에 가는 것도 부활한 몸으로 간다는 것이 성경 적인 진리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심판의 부활 자는 둘째 불 못이란 곳에 들어가고, 생명의 부활 자는 영원한 천국인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이란 곳은 부활체로만이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⑵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절대로 없었을 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219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위의 13절 말씀에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절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위의 14절 말씀부터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 되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놓으면 이처럼 헛것만 남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죽으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신 증거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하심으로 증거가 된 것입니다. 로마서 1:4절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그가 부활하심으로 그 부활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예수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지만 또한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부활은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주셨다고 하는 증거인 셈입니다.

2. 주님은 부활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셨나?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그 당시 부활을 믿지 않는 일단의 유대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두개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이 사람들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찾아와서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2:23-30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이런 질문에는 예수님도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답변을 통하여, 주님은 부활의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니,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신분은 천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천사들을 부러워 하지만, 그때 가서는 천사들이 우리들을 흠모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 사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15 참조).

이 사건은 확실히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라도 부활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무덤에 장사지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간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허망한 선전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유혹을 받을 터인 즉, 무덤을 지키게 해달라고 말하여 파수꾼들을 완전 무장시켜 지키게 하였으며, 이것도 미덥지 못하여 무덤 입구를 큰돌로 막아 완전하게 지켰습니다. 사흘 되던 날 새벽에 이르러서 하늘로서 천사가 내려와 큰 지진과 함께 돌을 굴려내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흰데, 이 모양을 본, 수직하던 파수꾼들이 무서워 떨며 다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여러 번 보이시고,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으며, 감람산에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에도 많은 제자들 앞에서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셨던 것입니다.

4. 부활한 몸은 어떤 몸입니까?

부활한 몸이 천사와 같다고 하는 것 외에는 더 자세하고 명백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바라봄으로 우리의 몸도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하는 사실밖에는 그 실체의 설명이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44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⑴ 첫째로 부활을 씨에다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땅에 뿌린 씨앗이 죽어야 열매를 맺듯이, 사람도 그 육신의 몸이 죽는 것은 부활의 씨를 심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은 한 개의 낱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양의 형체를 주시는 대로 그 형체를 갖는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습니다.

⑵ 부활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7절 말씀을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어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 같고(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못 받을 사람들),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하늘에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하늘의 천군 천사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러나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땅에 속한 자의 형상에 그치고 말게 됩니다.

⑶ 주님이 보여주신 부활의 몸은 아무 곳이라도 출입할 수 있는 몸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사람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생활을 합니다. 주님은 문이 단단히 잠긴 집안에 들어가셔서 그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식사하시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원하는 대로 가시고 원하실 때 어느 곳이건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5. 언제 부활하게 됩니까?

부활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24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각각 자기 차례대로 합니다. 이 차례는 그리스도인의 상급을 말합니다.

⑴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인이십니다.

그가 첫 열매로 받으신 상급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5-11(참조).

⑵ 다음에는 첫째 부활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6절에서, 이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증거하고 이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상급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20:4-6 참조).

이 부활에 참여할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 군대로 주님과 함께 백마를 타고 내려온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7:14, 19:11-14 참조).

믿음의 선진들은 이 부활을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11:35-37 참조).

⑶ 그리고 마지막 부활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이 부활이 요한복음 5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이루는 시기인 것입니다. 이 시기는 천년왕국이 끝난 직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벌어지는 전체 인류의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의 모습이 두 곳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1-46, 요한계시록 20:11-15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결론 : 이처럼 우리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거짓된 교훈에도 결코 미혹되지 말고, 이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소망, 영광된 부활의 소망을 깊이 보화처럼 간직해야 합니다.

제 26 과 , 인간의 죄와 그 보응

< 성 경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0-14).

1. 사람이 완전하지 못한 이유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3: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하나님의 육법을 완전히 준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6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예외자도 없이 죄를 범한 자로 정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서 3:23 참조).

여기 모든 사람이란 동양사람, 서양사람, 옛날사람, 지금사람, 동서고금 모든 사람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의인으로 나타나 있는 아브라함까지도 그 행위로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4:1-3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아브라함도 의를 얻지 못했으니, 석가나 공자나 맹자도 의를 얻지 못했음은 분명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의인이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은 다 아담의 자손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로마서 5:12 참조). 이미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인 그 조상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 성품이 후손에게 미쳐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그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두 가지 면에서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이미 사망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담의 실패는 모든 후손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사망의 유산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5:17절 말씀에서 “한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18절에는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했으며, 19절에는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한사람이란, 아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다 아담의 자손들이므로 이 굴레에서 헤어날 길이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누구든지 율법의 정죄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죄인들을 정죄합니다. 나면서부터 이처럼 죄인으로 태어나는 우리들은, 누구나 율법의 저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절망적입니다. 다만 죄 값인 사망만을 무서운 보상으로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 인류는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종교로도, 어떤 교육으로도, 어떤 수양으로도, 어떤 희한한 방법을 다 써도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 죄 값인 사망에서 해방될 길이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인간의 창조자가 되시며 인간의 심판주가 되시며 율법의 제정자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기 전에는 영원히 절망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인간들에게 사망에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으며, 죄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방법을 주셨으며, 절망에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그 아들로 갚게 하시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를 아담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24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2. 사람들이 스스로 취하는 멸망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그의 행위나 자신의 공로로 의를 얻어서,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선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모든 인류들에게 차별 없이 주시건만, 하나님과 원수된 완악한 인간들은, 이 선물을 거역함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8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3. 우리가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잘못

우리는 거짓된 선생에게서 나오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하여 속지 말아야 합니다.

⑴ 하나는 ‘완전론’입니다.

이 완전론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중생 한 후에는 완전 성결함을 얻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제단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에 대하여 아주 초연한 것처럼 자랑하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세상에는 범죄치 않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전도서 7:20).

요한1서 1:10절 말씀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⑵ 다른 하나는 ‘도덕폐기론’입니다.

이 주장의 요지는,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이룰 수 없고,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해야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죄를 경히 여기며, 죄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범해도 사유함을 받을 것을 전제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조장하는 일을 합니다.

4. 죄의 보응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보응은 이 세상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세에서 받는 보응이 더욱 두렵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⑴ 현재적인 보응

ꋫ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이사야 59:1-3).

ꋫ 하나님의 저주가 따릅니다(잠언 3:33).

ꋫ 악인에게는 화가 있습니다(이사야 3:11).

ꋫ 악인은 잘되지 못합니다(전도서 8:11-13).

⑵ 내세적인 보응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내세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자리가 ‘크고 흰 보좌’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그 자리를 영광의 보좌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1-34, 41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죄인들은 최종적으로 들어갈 곳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곳을 영영한 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주님은 다른 곳에서 그곳을 지옥이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

요한계시록 14:9-11절 말씀에는 그곳을 가리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 말씀에는 이곳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인데,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이런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8).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밖에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결론 : 베드로전서 5:8절 말씀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마귀의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삼킬 자를 찾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옥으로 잡아 끌어가는 일입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로 받는 지옥의 심판의 두려움에 대하여 이처럼 경종 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태복음 18:8.)

이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한 길뿐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서운 죄 값을 갚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단 한사람의 예외자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받아 그를 의뢰하며 그를 섬김으로, 우리의 의와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안에서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제 27 과 , 말씀과 구원의 사역

< 성 경 >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32).

1. 기독교와 말씀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또한 말씀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는 언제나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말씀은 어떤 의식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참조).

복음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5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16절 말씀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17절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상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로마서 3:10-12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죄인들인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의 길이나 방법을 발견해 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을 주시는 일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시는데, 바로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⑴ 고넬료의 가정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시고, 가이사랴에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44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식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0:34-48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⑵ 빌립보 감옥의 간수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복음을 인하여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감옥의 한 간수를 구원하셨는데, 그 간수가 구원받은 일을 보면 이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으로 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적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하나의 예비적인 방편에 지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25-34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이 말씀 가운데 특히 32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4절에 가서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적이나 기적이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넘어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적이나 기적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이런 것이 인간들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았거나 자신이 체험했다고 해도, 이것이 그 자신의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적이 그대로 믿음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따라 다녔습니다. 특히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았던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얼마나 믿음이 있었습니까?

주님이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자, 그들은 그 말씀에 매력을 잃었습니다. 요한복음 6:66절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으나, 언제나 이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장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3. 경계해야 할 이적 신앙

지금 교회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신앙이 이 이적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병폐는 무엇입니까? 이적이 나타나고 이적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이면 분별없이 쫓아다니다가 잘못된 영을 받기가 쉬운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신앙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적 신앙을 가지고 신비적인 집회에 따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요한1서 4:1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기도를 받는 일 중에 안수기도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영의 역사가 가장 강한 것이 안수기도입니다. 그래서 장로교 헌법에 의하면 성직을 맡은 사람, 다시 말하면 목사직을 맡은 사람 외에는 함부로 안수하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목자를 하나님의 대리권 자로 믿고, 하나님은 자기 교회 목사를 통하여 말씀을 먹이며, 신유의 능력도 나타내며, 기적을 이루는 권능도 주시며, 축복 권도 주셨음으로, 목사가 심방 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복해 주면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 말씀을 읽는 경우보다 듣는데서 더욱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읽는 것과 듣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구원의 역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알 수 있는 일은 믿음은 읽는 것보다 듣는 것에서 오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듣는 일은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부터 듣는 것임으로, 말씀을 영적으로 잘 풀이하여 깨닫기가 쉬울 뿐 아니라 말씀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지만 영적인 깨달음이 부족하여 해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빌립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 말씀을 풀이하여 강론할 때, 그에게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존속하고 있는 이유도 이 ‘말씀선포’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 시간마다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말씀을 귀담아 잘 듣는 사람의 신앙과, 교회는 등한히 하고 집에서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의 신앙을 살펴볼 때, 성경을 읽는 것에만 치중하고 듣는 일에 등한히 하는 신앙은 열심과 뜨거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다 겸하되, 먼저 듣는 일에 더욱 치중해야 합니다.

5.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다음 몇 가지 형태의 사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⑴ 아무리 들어도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⑵ 다음에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⑶ 말씀을 즐겁게 듣고 잠시 동안은 은혜를 받는 것 같으나, 말씀을 확신하거나, 회개까지는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33:32절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너를 음악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음악 잘하는 사람의 노랫가락같이, 즐겁게 잘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못한다면 구원에 유익이 될 수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으나, 그 말씀을 믿음으로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⑷ 다음에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달으며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온전한 구원에 이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 하여 혹 100배, 혹 60배, 혹 30배가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다 동일한데, 왜 이처럼 누구에게는 그 말씀이 생명에 이르는 구원을 갖게 되고, 다른 이에게는 그러하지 못합니까? 그 해답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서는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빛은 엄연히 존재해도, 눈먼 사람들에게는 그 빛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도 영적으로 눈 먼 사람들을 깨우쳐 회복시키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6:63). 복음은 우리의 영을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그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구원의 믿음을 갖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이 없이는 혹시 그 말씀으로 위로를 받거나 즐거워하거나 마음의 위안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회개를 가져오거나 확신 있는 믿음을 일으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똑같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다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무리들은,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회개를 이루어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저같은 자는 죽여야 한다고 분노하여,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설교를 잘하고 잘못한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깨닫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성령은 누구에게 이런 역사를 하십니까?

누가복음 11:11-13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6.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임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나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심령이 새로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⑴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망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시편 19편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젖을사모하듯이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⑵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는 태도에 있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겸손히 듣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들을 때, 말씀을 판단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하여 나를 때리는구나” 설교를 이런 자세로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는 기갈에 처해 있습니다. “저 말씀은 이렇게 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이 같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영적 교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문체가 훌륭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것보다 더 유식한 표현, 더 아름다운 묘사, 더 완전한 표현으로 기록할 수 있는 재질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련하고 우둔하고 배우지 못한 갈릴리 어부들로 제자를 삼으시고 성경을 쓰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 목자가 먹이는 양식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여 먹어야 합니다.

⑶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여 생활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말씀을 생활에 활용할 때, 그 말씀이 내 생활에 살아 움직여 역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우리들에게 항상 마음의 평안을 주며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결론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멀리 했던 생활에서 얻을 유익은아무 것도 없고, 다만 은혜가 식어지는 일과 사랑이 메마르는 일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일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생활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제 28 과 , 성찬과 세례

< 성 경 >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1:23-26).

1.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聖禮)를 한문의 뜻을 따라 푼다면, 거룩한 예식을 말합니다. 성례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거룩한 예식입니다. 기독교란 영적인 종교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문제도 영적인 일이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영적인 일입니다. 사람이 거듭나 새롭게 되는 것도 영적인 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 4:24).

그런데, 성례는 영적인 유익을 얻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눈에 보이고 손과 몸으로 감각적인 체험으로 하는 예식이라는 점에 있어서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무려 일곱 가지에 달하는 성례를 거행하고 있지만,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두 가지로 국한 시켰는데, 성경이 가르치는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이 있습니다.

성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하지(C. Hodge) 박사는 다음 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⑴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⑵ 성례는 외적이요 가견적(可見的)이면서 내적이고 불가견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을 나타내는 표라야 한다.

⑶ 성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항구적인 제도임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⑷ 성례를 받는 자들의 신앙이 강화되고 강건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印)친 의식임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런 조건에 합당한 성례는 성경에서 오직 세례와 성찬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예식만을 성례로 인정하고 다른 예식은 성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세례는 무엇인가?

세례(洗禮, Baptism)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표입니다. 그리고 은혜언약의 여러 가지 유익에 참여하는 표이기도 합니다. 세례는 세례 받는 사람이, 이 세례를 행하므로 주님의 사람이 되기로 약속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가 됩니다. 또 이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인 치시는 표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 세례에 대하여 분명하고 명백하게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영적인 유익이 있을 때, 비로소 베푸는 뜻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3:27, 로마서 6:4 참조) .

3. 세례에 대한 잘못된 견해

⑴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⑵ 세례는 세례를 받는 자가 성결하게 되었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죄의 용서나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일이지, 세례로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⑶ 세례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사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가 연합된 하나의 표로서 인정은 하지만 실질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이 성경 적입니까?

기독교사를 보면 세례는 두 가지 방법에 의하여 시행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물 속에 잠기는 침수의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물을 머리에 뿌리는 방법입니다.

침례교회나 또 어느 특정한 교파에서는 물에 몸을 담그는 침례방법이 세례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로교회 헌법에서는, “물을 적게 쓰거나 많이 쓰거나, 물로 씻으면 된다는 요구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세례 방법에 대하여 어떻게 하라고 하는 명령이 없기 때문에, 물을 머리에 붓는 세례만이 세례의 바른 예식이 된다거나 침례만이 세례의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성경 적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2절에서, 바울은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다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법에 의하여 세례를 받았습니까?

바울은 이들이 받은 세례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그들이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너면서 바닷물에 침수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침수를 당한 편은 애굽 사람들이며, 이들은 홍해 바다의 침수로 다 바다에 장사지낸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하여 기록된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됩니다.

에스겔 36:24-27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죄로 더러워진 그들에게 맑은 물을 뿌려 정결케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의 표로서의 세례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민수기에서도 이 같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9:13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이와 같이 살펴 볼 때 세례는 그 몸에 물을 뿌리는 방법으로 시행함이 더 성경 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 성찬이란 무엇입니까?

성찬(聖餐, The Lord's Supper)도 세례와 같이 주님이 정하여 세우신 것인데, 주님이 정하신 대로 떡과 포도주를 주고받음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찬의 제정에 대하여 네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6:26-29, 마가복음 14:22-25, 누가복음 22:17-20, 고린도전서 11:23-26 참조).

이 성례를 합당하게 받으려면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성찬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모든 유익을 받아 은혜 속에서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에 쓰는 음식은 떡과 포도주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친히 떡과 포도주로 이 예식을 행하여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2:19-20 (반드시 찾아 읽으십시오).

떡과 포도주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떡은 주님의 살을, 포도주는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 10:16절에서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6. 성찬예식에는 합당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성찬에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일에 대하여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려면,

⑴ 첫째로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1:29).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죄를 대신한 대속의 죽으심임을 믿고 이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5).

이 말씀처럼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서는 이 성찬예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⑵ 다음에 이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려면 고린도전서 11:28절에서 밝힌 대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살피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숨겨진 죄를 그대로 몸에 지닌 채 이 성찬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찬을 받는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에 대하여 전혀 살핌도 없고, 믿음도 없이 참여하면, 이 같은 일은 주의 몸을 죄를 범하고,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 성례는 주님이 친히 엄히 명령하신 바에 따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에 의하여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서 이행할 때, 여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받는 영적인 유익과 축복이 놀랍도록 크다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고, 이 성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미자립(개척)교회 목회자 모임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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