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란 무엇인가 ?
종교는 인생 문제의 「근본(宗) 가르침(敎)」이다. 인생 문제라 함은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뜻함이다. 그 많은 문제들 중에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많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 근본 문제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나는 남자나 여자가 되었나?」 「왜 나는 황인종이냐?」 「왜 한국 땅에서 태어났는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있다면 그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인생에게는 왜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는가?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다.
이상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부딪힐 때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한계를 느끼는 인간은 절망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초월자나 절대자를 찾게 된다. 사람이 절대자를 만나서, 인생의 궁극적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종교라고 한다. 종교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줄 뿐 아니라, 우주와 역사의 발전 방향을 따라 힘차게 살아가도록 한다. 종교 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인생과 종교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종교는 인류역사의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역사와 더불어 발전하였다.
종교가 발전해 온 과정을 보면 부족한 시대에는 자연숭배, 정령숭배, 토템 숭배, 다신교, 일신교들이 성장했고,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유대교, 유교, 인도교와 같은 민족 종교라고 볼 수 있고, 그 다음 단계가 세계적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불교, 회교 같은 고등 종교의 발달이다.
종교는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종교는 반드시 문명을 만들었는데, 유대교가 히브리문명을, 기독교가 서구 문명을, 불교가 불교 문명을 힌두교는 인도 문명을, 회교는 이슬람 문명을 애굽의 아문 신 종교는 애굽의 문명을 만들어 내었다.
어떤 종교는 생명이 길고 세계인들에게 널리 확산되었으나 어떤 종교는 단명하였다. 어떤 종교가 인류에게 유익을 줄 때 흥왕 하였고, 교리 적으로 편협하거나 윤리적으로 반 사회적이거나 희망을 주지 못할 때 쇠퇴하였다. 세계 만민에게 유익한 종교가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종교의 구성 요건을 찾아본다면, 첫째로, 창시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교리가 되는 경전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신도들의 모임인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또한 건전한 종교가 되려면 첫째로,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에 빠지게 하고 고통의 짐을 무겁게 하는 사이비 종교는 경계해야 한다.
둘째로, 인류의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어, 인류 공존 공영과 세계 평화를 이룩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로, 사람이 사람다워지고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윤리적 교훈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인류역사 속에서 종교적 교리 때문에 종교전쟁을 일으키고, 음란과 퇴폐를 조장하는 반 사회적이고 반 윤리적인 종교들이 많았는데 그런 건전치 못한 종교가 개인과 나라를 망친 사례가 수없이 많았다. 특별히 사이비 종교라고 규정짓는 거짓 종교들은 독버섯처럼 일어나서 극성을 부렸으나, 수많은 사람들을, 패가 망신시키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참된 종교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서 행복한 생활을 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인류역사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 때문에 수천년동안 계속 발전하고 확산하고 있다. 지금 사람에게 가장 유익을 주는 종교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을 가능케 하는 종교가 무엇인가? 불교, 유교, 힌두교, 회교 기독교 중에서 어느 것인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기독교라고 말할 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에 참 생명이 있다면 그 진리가 무엇일까?
2. 왜 그리스도敎 인가 ?
종교나 문화를 다른 것과 비교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본다. 특별히 문화의 경우, 고유한 문화의 특성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좋다 나쁘다고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문화의 독특성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는 다소 다른 점은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저마다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특수성에는 독선적인 교리(Dogma)가 있다. 자기만이 유일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종교가 성립되지 않는다. 수많은 종교가 있는데 그 모든 종교가 다 진리이고, 구원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면, 굳이 새로운 종교를 또 하나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타종교를 박해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건전하고 유익한 종교를 분별하는 표준 중에서 그 종교의 믿음의 대상이 어떤 분이냐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 대상이 최소한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못한 인간들을 교주로 섬기는 사이비 종교들이 세상에 물의를 일으킨 사례를 많이 경험하였다.
첫째로, 불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석가모니는 분명한 인간이었으나, 그가 고행을 통해서, 보통 인간 이상의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큰 깨달음을 통한 진리를 가르침으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이 수련함으로 초인적인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석가모니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여 따르는 수련 종교가 불교이다.
둘째로, 회교나 유대교를 생각해 보자. 여기는 신앙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神이다. 사람이 신을 믿고 따르지만, 보통 사람들이 신을 만날 수도 없고 신과 통할 수 없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에 신과 통하는 사람이 필요하였다. 선지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가 그 신을 알려줌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그 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는 모세나, 선지자들이 있었고, 회교는 마호멧이 최후 최고의 선지자이다.
셋째는,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경우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대교의 神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라고 이름한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중요한 것 하나만은 꼭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사람이었는데 수련으로 신적 존재가 된 분이 아니다. 또 선지자와 같이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통하는 분도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神이었으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분이다.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가 아니라 곧 신이었고, 신의 능력으로 가르치고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셨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똑같이 믿음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나 유대교나 회교와 같이 종교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신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 특수성이 있다. 사람이 고행이나 수련을 통해서나 율법을 잘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는데 유한한 인간의 한계가 곧 구원의 한계가 되고 만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절대자의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 종교가 다시 구원의 한계를 초래할 때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러한 종교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들려 온 「기쁜 소식」 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인 가르침" 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찾아내려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문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노력을 믿음으로 구원에 도달한다는 「기쁜 소식」은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왜 그리스도교뿐인가? 영생을 향한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을 붙들고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교회를 믿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당신은 왜 그리스도교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복을 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믿습니다」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서 믿습니다」 때로는 심심해서 취미 삼아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교회는 이단들에게 많은 신자들이 약탈당한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역사 가운데,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부흥을 하였다. 그러나 양적인 성장에 비해서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고 있음으로 대단히 염려하고 있다. 아직도 그 신앙적인 기초가 심히 허약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깊은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성경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신앙의 대상이 있고, 확실한 신앙의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믿느냐?」 「왜 믿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속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처럼, 맹목적이고, 무지한 신앙인 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모든 진리를 깊이 연구해서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도 우선 기초적인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부터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해 나가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예수님께서도 3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마 16:16). 이러한 신앙고백 위에 그리스도교가 세워졌다. 그 이후에 초대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또한 이단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들의 신앙 내용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고백함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확실히 지켜 왔다.
그리스 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영접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를 믿음이라 하고, 이 믿음의 내용을 조목별로 고백해서 정리한 것을 신조(信條) 또는 신경(信經)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조가 백여개 이상 되지마는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것이 「사도신경」(사도신조)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신앙 고백서라는 뜻이다. 사실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근간으로 해서 그리스도교 교회가 2백여 년에 걸쳐서 발전시킨 것이다. 사도 신조는 그후 3세기경에 널리 사용하였는데 세례 문답때 그것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하였고 또한 이단과 박해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사용하였다.
당신이 무엇을 믿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12조항으로 된 사도신조로 자신이 믿고 있는바 신앙의 내용을 분명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신조는 후에 교리로 발전하였고, 이것을 보다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인간의 언어로 연구해 나간 것이 신학이다. 신학이 본격적인 학문으로 연구되어진 것은 「오리게네스」라는 교부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최초로 교리 학습 학교를 세워서 교회의 신앙 훈련을 시켰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학문으로 출발하였고, 교회를 위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 이후부터는 신학이 교회를 떠나서 대학으로, 신학자들의 신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신앙 없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의 학문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세계 교회는 신학이 교회의 신학으로 돌아오도록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류에게 주신 것은, 연구나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 줄 안다.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삶의 규범으로 주신 책이다.
「누구를 위한 신학인가?」라는 질문에 성실히 응답해야 할 것이다. 교회 밖에서 민중 가운데 신학의 자리를 잡거나 신의 죽음까지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신학은 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도록 확실한 신앙 위에서야 할 것이다. 이일을 위해서 쉽고도 확실한 가르침이 중요하다.
제 2 장 : 우리가 믿는 하나님 (神論)
1.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 방법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였으나, 그 결과는 신통치 못하였다. 유한한 인간의 주먹만한 머리로 우주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신을 연구해서 그 존재 여부를 증명해 낸다는 것이 가능치 않다는 말이다.
만약에 어느 누구가 이 일을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 신이 참 신이 아니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사람이 알아낼 만큼 쉽게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신은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신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능력의 한계이다. 사람이 무엇을 많이 안다고 하지만, 사람의 머리로 무엇을 알아내는 능력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신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을 좋게 볼 수 있겠지만, 무리하게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정직한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神의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은 神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 아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종교에서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神을 잘 알 수 없지만 신앙으로는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열렬한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에게 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길이 있다고 한다. 그 유일한 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류에게 열어 보여주시는 계시(啓示)이다. 계시를 통해서만 신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를 자연 계시라 한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작품이므로, 그 작품을 통해서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연 계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는 있지만 간접적이기 때문에 희미하게 밖에 알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자상하게 알려주신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성경 속에 나오는 창조와 섭리와 구원과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실하게 계시하셨다.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분명하게 알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마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이며 완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꼭 같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상 완전히 동일하심으로 그를 본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과 꼭 같다. 요한복음은 이상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말씀이 육신(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일찌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공동 번역 요한 1:1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유한하고, 영적 감각이 마비된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만나 뵙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먼저 주셨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꼭 같으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보내 주심으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게 하셨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本質)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자유롭게 계셨다.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기 전부터 고유하게 지니신 특성을 편의상 하나님의 本質이라고 표현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라는 말은 하늘의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모든 피조계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특수성과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신들과 다르며, 우리 인간들과 모든 피조물과도 다른 점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후부터는 세계와 인간과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심으로 그 관계성 가운데 일어나는 성품도 있다. 그러나 그 관계성에 앞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한다.
첫째, 살아 계시는 하나님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시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시는 하나님과는 다르다.
모든 피조물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이다.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똑같이 유한하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소멸되지 않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불변하는 권능으로 활동하신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인류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신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우상과 같지 않다는 뜻이요, 관념적으로 존재한다는 다른 신들과 구별되어 활동하신다는 뜻이다.
둘째, 자유롭게 우주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며, 또한 어떠한 것과도 의존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으시고 홀로 서 계신다는 뜻이다. 세계의 모든 신들은 거의가 다 형상이 있다. 그 형상들은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 고안해 낸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형상이 필요 없으며 언제, 어디든지 시공간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신다.
셋째, 전능 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지 만물의 창조는 無에서의 창조라 한다(Creatio ex nihilo).
有에서 有를 창조한 것은 최초의 창조라 할 수 없다. 창조 이전에 이미 물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절대자가 아니라면, 믿을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애굽의 아문(Amun)신이나, 가나안의 바알신이나,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신들과 싸워서 승리하신 전능하신 신이시다. 그 뿐아니라 자연도 자유롭게 다스리신다.
넷째, 한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 성경의 하나님은 유일신이시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으로 일관한다. 참 신은 한 분 밖에 없고, 다른 모든 자연계나, 인간과, 신들도 모두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계 모든 만물은 땅위에 있다. 구약의 유일신 사상은 다른 어떤 신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야훼 하나님께서 여성신의 도움 없이도 생명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한다. 이러한 신앙은 다른 신들이나 우상을 타파하고 참 신은 오직 한분 뿐이라는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 일 계명은 {나} 외에 다른 것들은 참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분이신 야훼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본질이시다. 이 세상 만물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우주 만물이 파멸하지 않고 지탱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변덕이 심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믿을 수 없다. 또한 여러 분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참 신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 그러므로 참 신은 한 분이라야 하며, 불변하시는 분이라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고, 스스로 자유롭게 계시며, 우주 만물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에든지 계신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면서도 유일하신 분이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3. 세상 중에 계신 하나님(性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시는 본질적인 성품을 가지셨지만, 지으신 만물과의 관계성 속에서 여러 가지 성품을 나타내신다. 성경에는 창조 이전에 홀로 계시던 하나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셨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목자와 양과의 관계, 그리고 토기장이와 질그릇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기를 좋아하시지 않으시고,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시고, 지으신 만물을 섭리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초월적인 본질 외에도 인류와의 관계와 교제를 통해서 인류에게 끼치는 감화력이나 영향력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와 근본적으로 구별된 다른 분이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과 같은 성품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고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롬 1:18-26).
출애굽기 29장 45-46절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하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사시기를 기뻐하시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 주신 것이다. 그러한 뜻을 가지신 하나님은 회막이나 성전에 영적으로 임재해 계시다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친히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요 1:14, 빌 2:5-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만남을 강조하는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만나 함께 존재하는 역사와 대화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승천하신 이후에는 보혜사 성령으로 강림하셔서 온 우주와 인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 인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은 어떠한가?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나, 지으신 만물을 섭리하실 때 나타내신 성품의 근본이 사랑이셨고, 죽어 가던 인류를 용서 하사 구원하신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사람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의(義)로우시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바르고, 공평하고, 흠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는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법이 바르게 지켜지고, 사람들끼리도 공평하고 역사가 바르게 굴러가도록 영향력을 끼쳐 주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율법도 주시고 선지자도 보내시고, 종내 에는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박으시는 일까지도 하셨다. 사람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정의를 실천하여, 바르고, 밝고, 공평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미가 6:7).
셋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 「너희는 거룩하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셨다. 「거룩하다」는 말은 「속된 것과 구별된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오염되어 있는 이 세상의 것으로부터 깨끗이 구별되어 계신다. 우주 만물은 타락하기 이전에 창조 당시의 원형을 회복하여 거룩하여지도록 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 하나님은 만물의 선함의 근원이시다. 모든 선한 것들이 그로부터 나온다. 그는 어떤 가치의 판단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모든 가치를 초월하시는 동시에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되신다. 이러한 신을 철학자 플라톤은 지고선(Summum Bonum)이라고 불렀다. 출애굽기 34:6에서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길이 길이 참으신다 :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을 향하여 어머니와 같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길이 참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 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일하시는 하나님(使役)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교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깨우쳐 주신 것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우주적이며, 만민의 하나님이요,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맹렬히 일으켜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유대인의 민족신으로 만들어 가두었고,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비활동적인 왜소한 신으로 만들어 유대교라는 액자 속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경외심 없는 형식주의에 빠지고, 사두개인들은 현실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제자들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만민의 하나님이 되시고 만민은 하나님의 자녀로 형제 자매가 되도록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신다」는 점을 강조하시고,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도 밝혀 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닫고 있는 하나님은 액자 속에 갇혀 계시는 神이 아니다.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을 통해서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면서 친히 다스리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창세기 2:4-25에서 인간을 손수 만드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에 대해서 좀 더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창조와 섭리, 두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창조 사역
「전능 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 제 1항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뜻은 첫째로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本源的인 創造」를 의미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한분 외에 어떠한 「물질」이 있었다고 하면, 처음 창조가 될 수 없고, 하나님도 참 하나님일 수 없다. 하나님 이전에 이미 어떤 神이 존재하여서 이미 창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이 한 귀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無에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시작이라는 것이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런 질료도 없이 다만 「말씀」만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것이며, 「이미」있는 것으로 다시 있게 하시는 계속적인 창조가 아니었다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다(참고 마카베오下 7:28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은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신 뜻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피조물로부터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면서도, 피조물을 초월해서 자유롭게 계신다. 지음을 받는 세계는 창조주 앞에 꿇어 경배해야 하며, 절대로 창조주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피조물이 신격화 될 때, 이 세상은 반드시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도 창조 신앙에 포함되어 있다.
2. 하나님의 섭리 사역
「섭리」라는 말은 본래 성서 밖에서 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말이다. 라틴어의 "Providentia"(섭리)라는 말은 "Provideo" 즉 「미리 pro + 본다 video」는 말에서 나왔다. 그러나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그냥 바라보시기만 한다는 뜻9이 아니다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내 몸에서 머리카락 하나라도 결코 떨어질 수가 없다」(마10:30)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보존하시고 동반하시며, 친히 이끌어 주심으로 창조 때에 계획하셨던 목표에 도달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섭리 신앙이란 창조의 권능으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지으신 만물과 인류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계신다.
5.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예정(豫定)하심
1. 오해하기 쉬운 예정론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버림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구원받을 사람들의 숫자까지도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첫째, 나는 예정 속에 들어 있을까? 둘째, 저 사람은 어떨까? 셋째, 전도가 필요 없지 않을까? 넷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섯째, 인간이 기계나 동물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는가? 숙명론에 빠져서 체념하여 사는 것일까? 여섯째, 만약에 구원이 다 예정되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는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셨고 죽으셨는가?
위와 같은 끝없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정 교리는 어려워서 크게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시켜 그 의미를 축소시키는 사람들도 있고,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며 예정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별히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다」(롬 9:13)라는 이중 예정(二重 豫定)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예정론은 사도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에 의해서 강조되어 오는 중요한 진리 중에 하나이다.
2. 예정에 대한 성경의 근거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요 15:16)는 말씀을 비롯해서 17:6,12과 같은 곳에 요한 복음의 예정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가장 많이 나온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에베소서 1장 4-5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느니라」하였고, 그 외에도, 행 4:28, 고전 2:7, 엡 1:11, 딤후 1:9 등에서도 예정에 관한 말씀이 있다.
3. 신앙에 유익한 예정론
성경에 나타난 예정에 대한 말씀은 대부분 사도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예정 신앙은 바울의 신앙고백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구원받고 보니, 그 구원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데, 그 구원의 비중을 더욱 생각하여 소급해 올라가 보니, 결국 창세전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죄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창세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확실한 것이요 견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정 신앙이 대단히 유익한 것이 된다. 신앙인 에게 유익한 예정론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정이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짐을 감당하시고 인간을 구원과 생명으로 선택하고자 결정하신 사건, 곧 은혜의 선택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예정의 때는 창세전이요,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동으로 뜻을 합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셋째, 예정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세상 전체가 구원의 대상으로 넓게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골고루 비를 내려 주시듯이 지으신 만물과 만민을 사랑하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넷째,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타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예정의 범위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버림받는 사람들을 대신하면서 버림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된다.
다섯째,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안에서 감사하게 되고 확신을 가지고 예정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도하게 된다. 「버림과 선택」은 믿음의 결과로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아직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은 큰 믿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6. 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신가 ?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있는 내용과 교회의 신앙을 정리해서 3세기의 터툴리안이라는 신학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이면서 하나님인가? 처음에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본래 하나님인데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할 때,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때 제자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聖子)이시요,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라고 했을 때 그들은 「두 분의 하나님」(二神論)을 섬기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성경의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또 보혜사 성령의 강림으로 그들은 三神신앙의 혼란에 빠질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통해서나 신앙고백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한 분과 같이 믿고, 섬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이 논리적으로 확실히 정리할 능력은 없었지만 세 분이 같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은 논리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초기 성도들의 신앙고백에서 시작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을 후세의 신학자들이 희랍철학의 힘을 빌어서 논리적으로 정리해 나갔던 것이다. 터툴리안에 이어서 오리게네스와, 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같은 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으나, 모두가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가 정리한 이론이 가장 성서에 가까운 최초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세기 말에 와서는 삼위일체 신관이 확립되었다.
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가? 라는 질문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왜, 삼위로 계시며 한 몸을 이루고 계시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비밀에 속하는 범주이므로, 사람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알아본다. 즉 역으로 삼위일체 신앙의 당위성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똑같은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신은 신인데 성부 하나님과 다른 신이라면, 유일신 신앙이 무너지고, 또 하나는 유대교인들 처럼 메시야가 아닌 선지자에 불과한 인간이라고 할 때, 기독교는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의 순교로 끝나고 만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나 죽음이 아닌 한 인간의 훌륭한 죽음으로 끝난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상 똑 같은 분이기에, 그리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죽음과 같은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인류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 성령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감화력이나, 능력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신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모든 활동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 종속되었다든지 성부와 성자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성화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과거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현재에 계시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셋째,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독립적으로 계시면서 한 몸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한 분이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주장을 할 경우(양태론), 결국에는 성부의 유일성은 강조되지만 성자와 성령의 위치는 무시되고 만다.
넷째,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앙이 무너지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무너지고, 인류의 구원도 성화도 없는 유대교와 같은 여호와 종교에 머물던지, 다신교로 떨어지든지 할 것이다.
7. 이상적 신관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1.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근거 :
①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라는 귀절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② 창세기 1:26, 11:7에 하나님 자신의 호칭에 복수를 사용했다. ③ 마태복음 3:16, 28:19, 고린도 후서 13:13에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신다. ④ 빌립보서 2:6, 요한복음 10:30, 14:9에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이 나타난다. 요한복음 1:3은 성자의 창조 사역을 증거 한다. ⑤ 이사야 48:16, 63:10에서 영을 인격으로 표현하고, 사도행전 5:3-4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표현했고, 로마서 8:9, 11:14, 고린도전서 2:11-14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영 또는 성자의 영으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성경귀절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지만 삼위일체란 용어는 없다. 이러한 성서적인 근거를 가지고, 후세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을 논리적으로 정립했다.
2. 삼위일체론에 대한 설명 :
한 마디로 말해서 설명이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사람이 완전히 알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약간의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이 하나가 된다」 「하나와 여럿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식의 개념은 희랍 철학자들 사이에서 성립되었던 이론이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관 정립에 최대한 참고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 확립에 가장 공이 큰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본질상 같은 분이지만 세 분이 고유한 인격과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세 인격」(three persons)과 「하나의 본질」(One substance)을 가지신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부, 성자, 성령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고유한 인격성과 주체성을 가지지만 사람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영원한 사랑과 성령으로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한 「점유와 순환」의 전통적 신학 개념이 있다. 「점유」라는 말은, 세 인격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설명하는 말로서 창조와 구원과 성화 사역은 세 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지만 창조는 성부께서, 구원은 성자께서, 성화는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고유한 사역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순환」의 개념은 신적 세 인격이 서로 구분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인격들에 참여하고, 그들의 삶속에 들어가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고, 성자는 성부와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며, 성령도 성부와 성자의 존재와 사역에 참여하여 서로 분리할 수 없이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항상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이 순환의 개념은 서로 구분되어 있는 세 인격들의 일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창조의 주체는 성부이지만 성자 성령도 창조 사역에 동참한 창조자이며, 구원의 주역은 성자이지만 성부와 성령도 구원자이며, 성화의 주인공은 성령이지만 성부와 성자도 성화의 하나님으로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서로 구분되어서 존재하고 일할지라도 항상 떨어지지 아니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일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성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성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성부와 성령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는가? 성자가 십자가에 달릴 때 성부와 성령도 성자 안에서 함께 고통을 당했다. 성자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었고 성부의 성령은 성자의 죽음을 안고 함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나 성부는 죽지는 않았다. 마치 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며,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부모와 같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3. 삼위일체 신관의 특성과 우월성 :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관은 유대교와 회교와 같은 일신론(一神論)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여러 종교들처럼 다신론(多神論)이나, 범신론(汎神論)이 아니며 다신론과 일신론의 여러 가지 폐단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류에게 평등과 협력, 일치와 다양성, 자유와 책임과 같은 사상을 일으켰으며 인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가장 우월한 신이시다.
8. 악의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
일반 종교사에서는 善과 惡, 빛과 어두움을 二元論的 체계로 이해하고 있다. 선과 빛을 지배하는 세력과, 악과 어두움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어서 서로 대립하여 싸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원론을 배격하고 우주 만물의 근원이 창조주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악의 근원은 무엇인가 악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선하였다(창 1:31)고 하였으나, 창세기 3장 1절에 유혹자 뱀이 등장함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죄악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악의 세력이 가속화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비극이 연출되는 모든 것이 궁금하다.
우리 인류는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첫째로, 뱀으로 등장하는 악마는 어디에서 나왔으며 그 정체는 무엇인가? 즉 이러한 악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선(善)의 근원이신 데 악이 어떻게 발행하였는가?
둘째로, 전지전능하시다 는 하나님께서 악마의 출현을 모르셨다 거나, 사전에 막지 못하셨다는 것은 전지전능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셋째로, 죄없는 사람들 즉 의인의 고난을 어떻게 버려두시고, 악인들의 번영을 눈감아 주시는가?
이상의 문제들을 풀어 가면서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옳으심을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 질문인 악의 근원에 대해서는 명쾌한 대답이 어렵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천사들이 있었는데 천사 중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천사들이 스스로 하나님 자리를 넘보다가 추방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한다.(벧후 2:4, 유 1:6)
이것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사탄의 부하들을 마귀라고 한다. 이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로 등장하여 파괴자, 참소자등으로 활동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인류의 파멸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초대 교부들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해석이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창조에는 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이 없는 곳에 악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선이 부족하거나 결핍된 상태를 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져 있을 때 악이 발생하는 것이고, 악은 인간의 자유의 오용(誤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사과가 아름답고 맛이 좋은 것이지만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서 오래 두면 부패하여 독소가 생기는 것과 같다.
악의 근원에 대한 또 하나의 설명으로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유한성과 상대성 불완전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악이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에서 파생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다.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여 죽고 부패하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는 선하지 못한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완전치 못한 것이 곧 악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왜 악을 막지 못하셨는가? 하는 문제도 앞에서 설명되었다고 본다. 자유의 남용이나, 피조물의 한계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셋째로, 의인의 고난, 악인의 번영에 관한 문제는 인간들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과 시각이 다르다.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고, 합동해서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내신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는 악마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것을 대적하여 악의 문제를 대결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첫째로, 이 세상을 주장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악마가 아니다. 다만 악마는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사람들과 활동할 뿐이다. 그러므로 악마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존재로서 초인적인 힘은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악의 문제를 해결해 놓은 열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와 악의 근원을 해결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심의 영원한 근원이시다.
제 3 장 :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基督論)
1. 기독교의 중심, 그리스도
"그리스도교", "예수교"라는 말은 그리스도 중심 또는, 예수 중심 종교란 말이다. "여호와교", "성령교" 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교"라고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역사속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신 그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시고 보내신 성령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지 않는 성령운동도 위험한 유령종교가 되기 쉽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운동을 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교리나 신학의 중심도, 그리스도론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방법은 성경이다. 성경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유일한 재료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리스도이다. 역사적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과 성도들이 복음서를 기록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까지 전하여 주고 있다. 성경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와같이 기록한 것과는 다르다.
복음서 기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33년 동안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으로 믿으면서 그 분의 모든 것을 기록하여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록이 역사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모든 삶을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역사적인 예수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의 메시야로 확신하면서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역사적 예수의 모든 삶을 하나의 역사가의 입장에서 기록했다면 슈퍼 스타, 위대한 선지자, 휴머니스트, 성인 정도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제자들과 같은 믿음의 눈으로 읽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할 것이다.
오늘 세계교회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2천여년전 성서시대의 그 상황에서 활동하시던 역사적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로 찾아보는 것이다. 그 때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무엇을 생각했으며,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가장 바르게 알아내어서 그것을 본받는 것이다.
둘째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그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믿고 따랐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으며, 2천여년 동안 전승되어 왔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넷째로, 2천여년 동안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구한 역사를 통해서 밝혀진 결과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가지 노력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가인가?」하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풀어보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리스도는 무슨일을 하였는가」하는 사역을 알아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 것과 그분이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의 이러한 수고는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구원을 얻고, 바르게 살기 위한 것이다. 「바르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생기고, 잘못된 믿음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의 이단과 온갖 종파가 많이 생긴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는 것이다.
2. 신앙고백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의 외아들 2)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3)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심 4)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5)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 6)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7)장사되심(음부에 내려가심) 8)죽은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 9)하늘에 올라가심 10)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11)거기서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실것임.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정리해 본다. 1)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2)하나님의 독생자 3)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4)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5) 빛의 빛이시요 6)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7)그는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다. 8)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다. 9)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10)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다. 11)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12)그는 고난을 당하시고 13)매장되셨다가 14) 사흘만에 성서의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15)그는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16)그리고 그는 영광중에 다시오셔서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17)그의 나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지혜요, 그 자신의 영광의 본체인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2)그는 성령에 의해서 한 동정녀의 본체에서 인간의 본질을 받으셨다. 3)이와같이 「다윗의 의로운 씨」요, 「하나님의 크신 교훈의 천사」요, 약속된 바로 그 메시야가 나셨다. 4)우리는 그를 임마누엘이요, 5)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요, 6)완전한 두 본성이 한 분 안에 하나가 되어 결합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인정한다. 7)따라서 우리의 고백서를 통하여 우리는 아리우스와 말키온과 유티크스와 네스트리우스와 같은 가증스럽고도 유해한 이단들을 저주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성이나 그의 참된 인간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혼동하거나 분리하는 사람들을 저주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1)하나님은 영원한 목적을 가지시고 독생자 주 그리스도를 택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게 하셨다. 2)삼위 중에 둘째 위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에서 나왔으며, 따라서 아버지와 동일하시다. 3)그는 때가 이르매 사람의 본체를 입으셨다. 사람이 가지는 근본적 요소와 거기서 나오는 일반적 결점을 가졌으나, 죄만은 가지지 않으셨다(히 2:14,16,17, 4:15). 4)그는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그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셨다. 5)이와 같이 온전하고 완전하고 독특한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끊을 수 없게 한 인격안에 결합되어 변경되거나 혼성되거나 혼동될 수 없게 되었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며, 한 그리스도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
소요리 문답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문답중에 한 가지만 소개한다. 문 2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대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스스로 가지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으며, 성령의 힘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어 그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죄는 없으십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가지만 소개한다. 1)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과 그가 하나님이시요, 또한 사람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을 믿는다(엡 2:13-16, 딤전 2:5). 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시사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인류역사 안에서 생활하셨다(마 1:3). 이와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 한번으로써 완결된 사건이요, 최대의 기적에 속하는 사건이다(히 9:28).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모든 과정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品格), 무엇을 하셨는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3. 그리스도 이해의 순서,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존재 양태를 시간적으로 역사의 순서대로 하향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리스도의 본질과 인격에 대하여 먼저 알아본 후에 그 분이 무엇을 하셨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아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하는 문제를 먼저 알고 나면, 그 분이 하신 일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둘째 방법은,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채택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알림으로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믿도록 하는 방법이다. 비유하면 꽃 나무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에게 찔레나무와 장미나무를 설명하여 알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장미꽃을 가지고 그 나무를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한번은 예루살렘 솔로몬 행각에서 자신이 메시야이며 하나님과 자신이 동일하신 분이심을 밝히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였을 때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않거든 믿지 말라, 그러나 내가 행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임을 알게 되면 그 일을 믿으라」고 하였다(요 10:22-49).
이상의 두가지 방법은 모두가 타당하고 좋으나 상황과 대상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첫번째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상당한 이해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분이신가를 역사적인 순서를 따라서 존재양태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을 시간적으로 구분한다면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먼저 계셨다는 것(先在)이다. 둘째는, 먼저 계신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成肉身). 셋째는, 다시 처음 계셨던 곳으로 올라가신 것이다(復活,昇天).
이러한 세가지 순서를 따라서 성경과 신앙고백서와 교리와 신학적 이해의 발전 과정들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한 후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고 희망이 없는가를 규명하려고 한다.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 강조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구조를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 구원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일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것과, 이 세상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심판주로서 다시 오시는 것등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신관을 확실히 가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라는 문제는 예수님 당시에도 대단히 중요한 토론제목이 되었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항간의 여론을 청취한 일이 있었고 제자들의 이해와 신앙을 점검하신 일이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질문하시니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요한, 선지자중의 하나」등등으로 여론을 종합하여 보고했다. 이것이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한 이해였다. 지금도 유대인들이나 회교도들은 선지자중의 한분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믿고 이해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 분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앞에서 언급한 순서와 방법에 따라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4.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이 세 가지라는 것을 앞에서 언급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先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成肉身),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마치시고, 다시 승천(昇天) 하셔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시간적인 순서대로 세가지 양태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먼저 계심」(先在)과 「육신을 입으시고 땅으로 내려오심」(成肉身)과 「다시 하늘로 올라가심」(昇天)을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면서,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시면서 일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먼저 계심(先在)」에 대해서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찾아 보도록 하겠다.
그리스도의 선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한 확실한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 성경적인 근거
(1) 요한복음에 나타난 증거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3). 여기 「태초」라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시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존재한 것이다. 「말씀」은 그리스도를 뜻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을 창조하실때 함께 동참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요 1:2,3).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며(요 6:38),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며(요 8:58), 창세전 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화롭게 계셨다(요
17:5).
(2) 바울 서신에 나타난 증거들 :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꼭 같으신 분이시며, 한 몸이시고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늘의 자리를 비우시고, 땅으로 내려오셔서 사람의 모양을 스스로 취하셨다(빌 2:6-8) 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으며,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고 증거한다(골 1:15-17).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 세상으로 내려오셨고, 다시 승천하셨다(엡 4:9,10). 만물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났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났다(고전8:6).
(3)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증거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요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이다」(계 1:8)라고 증거하고 있다.
2. 신앙고백에 나타난 증거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분명하게 많이 취급되어 있으나, 선재에 대한 내용은 부족하다. 그러나 탄생에 대한 내용속에 선재신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도신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 속에 이미 先在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안디옥교회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A.D. 35-107)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정리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며, 그리스도 선재(先在), 처녀탄생,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등에 대한 교리를 간결하게 매듭지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지음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와 같은 분으로 함께 계시다가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인류와 함께 계시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가셨다고 했다.
니케아신조(A.D. 351)는 초기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정리한 고백서이다. 이재고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선재에 대한 조항을 보면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는 것과 「그는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시다가, 하늘 보좌를 비우시고 인류구원을 위해서 사람이 되셔서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낮아지심(卑下)은 인류 구원을 가능케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이 막혔으므로 성자께서 친히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이 인류구원의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말은, 그가 성령수태, 처녀탄생,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구속의 대업을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자를 통한 구원 사역의 의미를 알아 보려고 한다.
1. 성령수태와 처녀탄생의 의미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수태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신앙고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화 된 교리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해가 부족한 신자들이 많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홀로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과 하나가 되어서 성령안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사람으로 임하신 것이다. 이 때에 성부께서도 성령안에서 함께 해산의 수고를 하셨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령수태와, 처녀탄생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 예수의 평범한 출생으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길밖에 없었다고 본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처녀 몸에 수태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구원의 다리를 놓으신 은혜로운 작업이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최선의 수단이었다.
십자가 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해되는 근거는 바로 성령수태사건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데 있다. 성령이 성자와 하나가 되시어 수태하였고, 성령이 성자와 함께 일하였으며, 십자가에서도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성부는 성령안에서 성자와 함께 늘 계심으로 인류구원의 효험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한 선지자 예수의 출생과 고난과 순교로 끝나고 만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수태는 성자의 인간적인 아버지를 배제하고 「죄의 유전」으로부터 피하도록 하였고, 성령의 성결케 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셨지만, 원죄와 죄가 없다는 것은 바로 성령수태 때문이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가 남편 없이 성자를 수태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2. 성육신과 낮아지심의 의미
(1) 성육신의 의미 :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류의 일원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몸은 우리와 똑같은 몸이다. 재세례파(再洗禮派)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로 부터 마리아의 몸을 통과하여 세상에 왔으나 우리 몸과 똑 같지 않은, 유사한 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 같지 않은 몸으로는 우리와 일치할 수 없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와 똑같으나 죄는 없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미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이다(요 1:14).
(2) 낮아지심의 의미 : 빌립보서 2:7-8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비우심」과 「낮아지심」 에 대한 말씀은 왕의 보좌를 사양하시고, 스스로 노예의 신분으로 하야(下野) 하셨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리까지 내려가 주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말구유에서 부터 십자가와 무덤에 까지 내려가심으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구원할 자격자가 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자신을 낮추셔서 죄많고 무상한 세상으로 뛰어드신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성부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는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세상을 더럽다고 피하지 않으셨고 죄인들이 보기 싫다고 산속으로 들어가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물속으로 뛰어드신 분이시다. 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늘로 올라가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한다.
6. 그리스도의 높아지심(昇貴)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The States of Exaltation)은 중보자의 인격의 높임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세상에 내려오셔서 모든 굴욕적인 고난을 감당하시고 음부에 까지 낮아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덤속에 계시던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사 하늘의 존귀한 자리에 앉히셨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과 재림에 관한 신앙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自己卑下)과 높아지심(昇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적절한 표현을 하고 있다. 즉 하늘보좌를 비우시고 종의 모양을 입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심, 재림등 네단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율법 아래에 있는 저주로 부터 자유로워지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해서 승리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만민들을 완전히 구원하셨다.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당하신 모든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상하사 존귀와 영광으로 면류관을 씌워 주신 것이다. 세상 만민들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의로우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인류구원이라는 신령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그대로 방치하신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라는 칭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의롭게 살아가는 만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낮아지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스스로 높아지는 자는 낮아질 것이다. 자기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는자는 잃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이러한 원리가 온 세상에 널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수고에 대한 보상을 정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버림을 당하게 되고,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昇貴)에 대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다시 살려주셨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대체로 성자는 성부께 복종하여 철저히 죽으셨고, 성부께서는 완전히 죽으신 성자를 능력으로 다시 살리셨다고 믿는다. 그러면 성자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다시 살아나실 능력이 전혀 없으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고(요 11:25) 자신의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은 권세도 있다고 선언하셨다(요 10:18).
그뿐만 아니라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도 하셨다(요 2:19-2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은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지 아니하다. 그리스도는 그 몸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그 몸이 실제로 죽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시다(고전 15:45). 그 영과 함께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 몸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몸과는 다른 신령한 몸이다.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아니 할 것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변화는 미래의 천적(天的)인 환경에 완전히 적합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받았다. 이것은 역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세상에서도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몸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성령이 계셨고 성령안에 성부가 함께 계셨다.
그리스도의 높이심은 성부의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였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롬 6:4)는 것은 성부의 사역안에 성령께서도 함께 역사하신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서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는 말씀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7.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1. 復活 信仰의 뿌리
인류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종교마다 표현이 약간 다른것 뿐이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추구한다는 내용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좋아서 죽음이 억울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은 고생만 하다가 좋은 세상 한 번 잘 살아보지 못하고 죽게 되니 억울하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신앙은 죽은 자의 부활이다. 그들은 막연한 영생이나 막연한 사후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는 반드시 종말이 오는데 그때에 메시야가 와서 잠든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산자와 죽은 자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린 것도 그들의 고난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고 본다. 그들은 강대국들에 의해서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고 호소하였다. 악한 사람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질문하였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의인들을 구원하시고 상급을 주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삼는다는 것이다.
그 심판의 내용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모든 죽은자들을 다시 살려 선악간에 정확한 심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의롭게 산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불의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고, 전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후자는 영벌의 세계로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현대의 고통을 극복하면서 의롭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산자와 죽은자의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신앙 때문에 그들은 고난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옳으심」을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활의 첫열매」라고 한다. 그것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거해 보여 주신 첫 열매라는 뜻과 의인들이 부활을 믿고 기다리는 그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의를 증명해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며 의인의 고난에 대한 최후의 질문을 하셨다. 이 질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고난에 역사에 대한 대표적인 질문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던 모든 제자들의 질문이요, 나아가서는 인류전체가 안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을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하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흘동안 침묵을 지키시고 대답하지 않으시다가 그리스도의 무덤을 여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심으로 하나님의 옳으심(義)을 분명하게 증명하시고, 답변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죽음의 문제와 의인의 고난에 대한 문제를 선명하게 해결한 정답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속의 예수를 초월적인 믿음의 그리스도로 높이신 사건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계실 때에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육신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장소에서 제한된 사람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면서 만민의 구주로 나타나게 되셨다. 어제의 예수께서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요 29:19-30, 마태 19:20).
4.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신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죄와 사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악마의 사령부는 이에 정복되었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동참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성도들이 지금 악마와 싸우는 전쟁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해 놓으신 전쟁을 하는 것이다(고전 15:54-55).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내가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인류구원을 위한 일이요, 우주만물과 인류를 다스리시는 일이다. 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으로 보내신 것이요,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직분을 주셨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임하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 3:16-17)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이 사건을 메시야 임직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받으신 「그리스도직」(메시야)은 구약의 모든 직분을 통합한 총체적인 것이다. 구약의 중요한 직분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직분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직분은 구약의 세가지 직분을 통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직분을 세우실 때 처음에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하도록 하셨다. 예컨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일, 제사하는 일, 종족을 다스리는 일을 다 맡아서 했었다. 그러나 출애급 이후 백성의 수효가 창대하여짐으로 모세가 처음에는 혼자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을 성별해서 제사장 직분을 분담시키셨다. 그 후에 왕을 세우셔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를 따로 세우셔서, 제사장과 왕의 직분를 바로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봉사하였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왕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세 가지 직분이 확실히 구분되어서 상호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세가지 직분이 예수께 와서 다시 통합되어 한 몸으로 이 세가지를 수행하는 그리스도(메시야)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하신 것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여 주창한 분은 요한 칼빈이며, 그 이후,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이 세 직분론을 교과서 처럼 사용해 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모든 사역을 이 세 가지로만 묶어두는 것은 아쉬운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굳이 미흡한 점을 보충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문제이다. 제 2 이사야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역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가진 고난의 종의 직분을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의 직분 어느 것에도 포함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세 가지 직분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난의 종」이라는 직분이 구체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가지 직분을 합한 「그리스도의 직분」을 알아보자.
첫째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직분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 신속하게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들에게 전하 는 직분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선포하신 모든 사역은 선지자 직분을 수행하신 것과 같다.
둘째로,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장벽을 허물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해를 이루는 직분이다.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친히 제물이 되셔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셨다. 그리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용서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화해의 길을 열어주셨다.
세째로, 왕의 직분은 통치권을 위임받아 그 백성을 하나님 뜻대로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세상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주를 통치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실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나라운동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서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도 보혜사 성령의 강림으로 계속 이어졌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핵심은 贖罪이다. 이 속죄의 핵심은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속죄에 대한 연구가 초대교회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이 다양하고 어렵고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려오는 속죄론을 정리해 보면서 가장 옳다고 생각되는 뜻을 찾아보려고 한다.
1. 배상설
이것은 초기 신학자 이레니우스와 오리게네스가 주장한 학설이다. 인류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배상금을 지불하였는데 그 속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범죄한 인류가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사탄은 하나님께 대하여 인류를 석방해 주는 대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예수 그리스도를 요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사탄이 그리스도를 삼켰으나 사흘만에 다시 토해 내고 말았다고 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요나가 고기 뱃 속에서 나온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탄의 권세를 쳐부수고 승리한 것이다.
2. 만족설
11세기 영국의 남쪽 캔터버리 대주교 안셀름이 주창한 것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친 학설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람에게는 죽음을 가져왔고 하나님께는 결정적인 불명예를 끼쳤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노여움을 가지고 계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고,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명예를 회복하시고 노여움을 푸시고 만족해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는 벌을 받았으며, 그 결과 인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3. 도덕설
「아베라르」라는 중세신학자는 만족설을 철저히 반대하면서 도덕설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고 하면 그 하나님은 무정하고도 냉혹한 신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표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도덕적 감화를 받아 자기도 사람의 생활을 하도록 하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4. 형벌 만족설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 신학자들이 안셀름의 만족설을 따르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포함시켰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죄를 그대로 벌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되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벌을 받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갈 3:10).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나타난 것이다.
5. 통치설
종교개혁 당시 「그로튜스」라는 신학자는 인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너진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서 죄를 벌하셨는데 그 길은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6. 모범설
17세기 [소치누스]는 용서를 핵심으로 하는 속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모범을 보이신 것이라는 뜻이다.
끝으로 이상에서 여러가지 주장을 살펴보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상징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매를 드시고 때리시는 하나님의 의가 강하게 나타났는가 하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고난의 종으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의와 사랑의 표현이요,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신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제사를 드린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여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완전한 제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천하만민은 믿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구원을 얻게 된다.
제 4 장 : 우리가 믿는 보혜사 성령 (聖靈論)
1. 한국교회 성령운동 이대로 좋은가 ?
우리 나라 교회는 세계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적인 부흥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경이적인 성장의 원동력이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 성령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으로 본다. 그 이후 강약의 차이는 있었지만, 100여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어 오다가 1970년에 와서 급격한 교회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부성적(父性的) 특징과 모성적(母性的) 특징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다. 부성적 특성은 유교적 전통과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성적 특성은 무속적 전통과 관계가 깊은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성적 성령운동은 사회 지향적이고 투쟁적이고 이지적이고 남성적이다. 그래서 사회구원을 위한 사회참여쪽으로 흘러갔고 모성적 성령운동은 개인지향적이고 포용적이며, 병든 백성들을 치유하고 기복신앙을 부추기며 여성적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가진 성령운동은 상호갈등 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호보완해서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성적 운동이든 모성적 운동이든 각각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하지만, 문제점도 많았다. 같은 성령을 받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다른 영을 받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행동을 만들어 내는 종교적 배경이 있다고 본다. 유교적 전통과 이지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부성적 운동을 한다면 무속 적인 불교와 도교의 전통과 감성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모성적 운동을 좋아한다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운동을 다시 점검하여서 올바른 내용과 방향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성령의 은사는 각각이고, 역사 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기와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정죄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된다. 다양한 성격과 문화적 전통 위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도 다양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령의 역사냐 ? 인령(人靈)의 역사냐 ? 악령의 역사냐 ? 하는 것을 구별하고 혼합시키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래서 건전한 성령운동의 방향을 설정해 나가야 한다.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나 개인적인 기복신앙과 신비 체험 쪽으로 열심을 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다같이 방향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구별하지 말며 영과 육을 나누지 말고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이해를 가지고 성령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다른 살림을 차리는 불행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다양한 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병들어 죽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하는 전도운동과 병들어 무너져가는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주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서 강렬한 사랑의 실천운동이 일어나고 맹렬한 바른 삶 실천운동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인 윤리 실천운동이 일어나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성령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성령체험」이라고 해서 성령의 개인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확대하고 보편화시켜서 그 경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는 잘못이다. 또한 치병, 축귀, 환상 같은 것을 극대화시키고 모든 성경 귀절을 그 체험을 풀이하고 증거 하는데 인용하려 하는 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이 표준이고, 그리스도가 모든 진리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령경험을 해야하며 신구약 성경에 기초를 두고 2천년 교회역사에 나타난 성령운동의 내용과 방향과 성격을 바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으로 성령론 해설을 전개하려고 한다.
2. 성령은 누구이신가 ?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돌아볼 때,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첫째로, 성령의 역사를 무시함으로서 중세교회나 종교개혁 이후의 현재 유럽과 미국교회들 처럼 교권주의적, 의식 중심적, 예전 중심적, 제도 중심적 교회가 형성되고, 그 결과 교회가 경직화되고 정적인 교회가 되어 결국은 교회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령의 지나친 강조로 말미암아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서 이상하게 신접한 사람들처럼 이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고, 성서적인 정립이 필요하다.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는 성령운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성령운동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의 두 가지 폐단은 모두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면 성령은 누구이신 가를 정리해 보자.
1. 성령도 성부,성자와 똑같은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처음부터 계셨다. 성부의 창조사역과 예정과 섭리 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성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사역에도 동참하셨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본질상 똑 같으시고, 동등하신 동격자이시다.
성령의 출처에 대해서 로마 천주교회와 동방 정교회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못해서 논쟁 끝에 1054년에 동서방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또한 능력 면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하다든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든지, 성령은 오순절에 강림하심으로 시기적으로 늦게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많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신관을 확립하여 성령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一神論으로나 三神論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三位一體 신관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은 전지(고전 2:10, 눅 2:25-26, 사 40:13) 전능(눅 1:35, 롬 15:13-19, 슥 4:6)하시고, 무소부재(시 139:7-10, 요 14:17)하시며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히 9:14).
2. 성령은 인격성을 가지신다.
성령의 인격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령을 바람이나 물이나, 비둘기에 비유한 나머지 성령을 물질적으로 오해하여 「충만히 받으라」는 말을 컵에 물을 부어 철철 넘치게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성령님」이나 「성령께서」라는 말로 쓰지 아니하고 물상화(物象化)하여 「성령을 받으라」하면 그 무엇(it)을 받는 것처럼 착각을 했다.
성령께서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모시고, 경배하고, 가르침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지 예배때 일어나는 감화력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령을 능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성령께 사로잡혀 헌신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지(知) 정(情) 의(意)를 가지고 인간과 만나시고 지도하신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말씀하시고(계2:7),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기도하시고(롬 8:26), 기르시며(요14:26), 인도하신다(행 9:11). 또한 성령께서는 근심하시고(엡 4:30), 탄식하신다(롬 8:26).
우리는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결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와 똑 같으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성령 하나님께서 신성과 인격성을 따라서 역사 하시는 모든 사역에 순종하며 적극 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3. 성령(聖靈), 사람의 영(靈), 악령(惡靈)
성경에 나오는 영계(靈界)의 체계는 분명하고 독특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와 구원받는 사람들의 영들이 함께 사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가 있고, 한편으로는 악령과 마귀와 잡신들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영들이 함께 사는 영원한 고통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과 악령과 사람의 영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1. 성령에 대해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보혜사라고 부른다. 성령은 성부의 영인 동시에 성자의 영이시고, 그 존재의 시작이 같으시고,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동등하시다. 성령께서는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사역에 동참하실 뿐 아니라, 그 모든 사역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를 회개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 시키시며, 교회를 창설하시고 지도 육성 부흥케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인류역사를 새롭게 하고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실 때는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 그래서 보혜사라는 호칭을 붙이게 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격려와 위로와 중보의 사역을 통해서 사람에게 기쁨, 화평, 사랑, 양선, 자비, 인내, 절제, 온유, 충성 등의 열매를 맺게 하시어 인간의 행복을 주신다.
2. 사람의 영에 대해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창 2:7). 그러므로 창조의 영이신 성령과 피조물인 사람의 영은 연관성과 유사성이 있으면서도 엄격히 구별된다. 사람의 영은 피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하여서 죄된 영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의 영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하여 악령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결과 실낙원의 비참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영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나서 선한 영이 되면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살게 되고 구원받지 못한 자연인들은 계속 악령의 지배를 받으며 악한 일을 행하며 살아간다.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말로 관계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초월적 임재를 뜻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의 영 안에 계신다는 것은 영원한 내재가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오신다고 이해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과 사람의 영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의 생각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현실 중심적이지만 성령의 생각은 이타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이며 영원을 지향한다.
3. 악령에 대해서
악령의 출처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 1:4, 벧후 2:4 같은 곳에 「범죄한 천사」「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사탄의 출처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각 자 맡은 직책을 따라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천사가 자기의 위치와 사명을 이탈하여 타락한 것이 사탄이 되었다고 한다. 성경은 악령의 존재를 처음부터 인정하는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하기 때문에 악령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변질로 처리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그러한 일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다. 사탄은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시키고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들어서 파괴와 전쟁을 일으키고 슬픔과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초조와 공포심을 일으켜서 파멸을 초래케 한다. 악령은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이나 악령이 역사할 때에는 사람의 영을 통해서 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선한 영으로 활동하고 악령의 지배를 받으면 악한 영으로 활동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계속적인 지배를 받으며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울 왕과 가롯 유다와 빌라도와 네로와 히틀러와 같은 불행한 자가 된다.
4. 성령의 사역(使役)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 하나님과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할 때에 삼위일체 신관을 가지고 해야만 바르게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사역을 주체적으로 하셨지만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창조와 섭리 사역에 동참하셨으며,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때에도 성부와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고, 성령시대에 와서는 주체적인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성령시대라 함은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와 구별하는 것인데,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후부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한다. 그래서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 활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보조적 사역"이라 부르고, 성령시대의 주도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을 "주체적인 사역"이라고 한다.
1. 성령 하나님의 보조적인 사역
(1)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와 섭리사역에 동참하셨다(창 1:2-3, 2:7, 욥 26:13, 33:4, 시 33:6-7, 104:29-30) :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셔서 천지만물 창조와 인간 창조에 성부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을 보조하셨고, 섭리사역에도 항상 함께 하셔서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사랑으로 돌보셨다. 그러나 밖으로 주체적으로 나타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사역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하시게 되었다.
(2)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사역에 동참하셨다 :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을 도우셨고 세례 받으실 때 임재하셨으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함께 하셨으며 말씀선포와 기사와 이적을 행할 때에 함께 하셨다. 특별히 성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령께서도 성부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성자의 아픔에 동참하셨다. 성자는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성부와 성령께서는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이상과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여서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의 시작과 모든 과정을 완전히 아시고, 그 일을 완성하시는 것을 본질적인 사역으로 담당하셨다.
2. 성령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하나님 시대의 개막식이다.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을 완성키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는 재창조의 활동을 계속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현재화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도록 하시는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신다.
(1) 인류구원을 위한 사역 :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 만은 인간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일방적이며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화해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신다.
(2) 성도들을 위한 사역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응답하게 하신다.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하시며, 사랑과 소망이 넘치게 하시고 기도와 전도와 봉사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교회 안에서 활동하심 :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창설되었고, 부흥, 성장하였으며, 또한 성령께서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고,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하도록 새롭게 하신다.
(4) 우주만물과 인류역사 가운데서의 활동 :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시고 고통 당하는 인류와 함께 신음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뿐 아니라, 인류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하시는 역사 변천의 원동력이 되신다. 지금은 성령시대이며,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온 인류가 동참해야 할 것이다.
5. 성령세례(聖靈洗禮)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에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별하여 두 가지 세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이 임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하다」「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성령의 은사를 부으심」 등등의 모든 말씀들은 같은 체험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을 독립적인 어떤 神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일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일이나, 성령을 받는 일이 같은 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삼위일체 신앙을 깨뜨리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 8: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상의 사실을 잘 정리하여 혼돈이 없도록 해야 한다.
1.성령세례란 무엇인가 ?
「성령충만」이라는 말과 병행해서 많이 사용된 용어로 성령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기계시를 나타내실 때, 그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성령을 만나기 전과 이후의 변화 받은 사실을 성령세례로 표현하고 성령의 능력을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뜨겁게 경험한 사람들은 불세례를 받았다고 표현했고, 강하게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충만」이라는 용어나 「불과 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등의 표현 때문에 성령을 물질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고, 또 이상한 神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함께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독립적인 이상한 神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2.성령의 중생 역사와, 성령의 부가적인 역사
성령의 세례는 부가적인 것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나누어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중생의 사역을 통해서 생명을 받게 되고, 성령의 세례에 의해 능력을 받는다(행 1:5,8). 이것은 중생과 동시에 능력을 받는 사람도 있고 중생한 성도들에게 능력을 받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행 8:2, 15-16).
3.성령세례는 자신이 성령의 존재와 능력을 확실히 경험한 사람에게 붙여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그 실상을 분명히 증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행 19:2).
4.성령충만 또는 성령세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교회를 위해서 유일한 봉사를 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5. 성령 세례는 은사를 동반한다.
이 은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능력과 재능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 12:4-14). 결론적으로 성령의 세례는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하여 그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이웃과 세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받도록 계속적으로 헌신해서 성령께서 온전히 나를 사로잡아 쓰시도록 순종해야 한다.
6. 성령의 은사(恩賜)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서 초대교회때 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여 교회가 어지러웠다. 그러한 현상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행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1. 성령의 은사의 의미
신약 성경에서 '은사'라는 말을 뜻하는 「카리스마」는 카리조마이(선물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말로는 「恩惠의 膳物」을 줄여 「恩賜」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은사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성령의 은사는 ①성령의 기쁘신 뜻대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이다. 성령께서 마음대로 주시는 것이다. ②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보편적 선물이다. ③개개인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정한 봉사를 하도록 주시는 사명이다. ④특별한 경우, 특별한 목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기능을 부여하시는 경우도 있다. ⑤모든 은사는 사랑의 은사와 함께 주어지며, 사랑으로 결실되는 것이다.
2. 은사의 종류
일반적으로 9가지 은사를 말하는데(고전 12:5-10) 그것은 은사의 전부가 아니고 일부에 불과하다. 넓은 의미에서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지어주신 모든 것이나, 좁은 의미에서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의미한다. 성령의 은사를 크게 나누면 일반 은사와 특별 은사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합해서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1) 일반적인 은사 :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햇빛과 비를 은사로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2) 일반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의 은사 : 기적, 환상, 치병 등은 무당들도 할 수 있는 수준의 것들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중에도 이상과 같은 것이 있다.
(3) 한시적(限時的)인 은사들 :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는 말씀과 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성격의 은사도 있다.
(4) 항상 있는 은사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 성령께서 주시는 그리스도교의 은사 중에서 항구적이고, 본질적인 은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이다.
(5) 제일 중요한 은사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은사가 사랑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예언이든 병고치는 일이든 지혜와 지식이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유익이 없다.
어떤 은사이든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된다. 방언, 천사의 말,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지식, 산을 옮길만한 믿음, 모든 것을 희사하는 구제, 몸을 불사르는 순교와 같은 행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기초 위에서 행하여지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고전 13:1-3).
3. 은사의 목적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확립하며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증거하고, 사람을 구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도록 주신 선물이다. 이 은사는 사적인 것이 아니다. 공적인 것이요, 형제를 위한 것이다.
셋째,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교회의 화평과 일치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다. 특별히 사랑의 은사를 통해서 세계의 평화와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7. 바람직한 성령운동
1. 성령운동이란 ?
성령운동이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의 강한 역사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선교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운동은 특수한 경향을 띄고 있어서 "오순절 성령운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웨슬리의 성령운동과 피니, 무디, 토레이의 부흥운동과 관계가 있다.
오순절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대체로 감리교 출신들인데, 감리교회의 제도와 교리에 얽매이기 싫은 사람들이 나와서 군소 교파를 만들었다. 그들 중에 미국 켄사스주의 토페카 성서대학의 파르함(C.F Parham)과 로스엔젤레스의 아주사에 있는 감리교회의 세이모어 목사가 중요인물이었다.
1900년 12월 31일 송년집회에서 파르함이 오즈만이라는 여학생에게 안수 기도했을 때, 오즈만이 중국어로 방언 하는 것을 보고 그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다. 파르함의 제자인 목사 세이모어가 1900년부터 아주사 312번지 감리교회에서 성령세례를 주장하면서 집회를 계속하는 가운데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파르함과 세이모어를 오순절파의 창설자로 본다.
2. 이러한 성령운동이 일어나는 배경
첫째, 기성교회가 침체한 때에 일깨우기 위해서 일어나는 부흥운동이다.
둘째,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 답답함과 컬컬한 성도들이 시원한 탈출구를 찾을 때 그것을 충족시키는 성령의 역사이다.
셋째, 현재의 물질문명과 정치적 사상적인 압박감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대중들이 영적인 자유를 갈망할 때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넷째, 선교의 열정이 식어가고 현상에 안주할 때 세계교회를 향하여 선교의 뜨거운 영을 부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강력한 자기계시이다.
다섯째, 성령의 실제와 사역을 등한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성령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3. 오순절파의 잘못된 성령운동
첫째, 「완전한 복음」이란, 마음과 생활의 성결, 육체의 치유, 방언의 증거가 나타나는 성령세례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신조 5항이 문제이다. 성령세례란, 성령의 확실한 체험을 뜻하는 것인데, 반드시 방언을 해야만 성령세례의 유일증거가 된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령의 수많은 중요한 은사 중에 가장 작은 방언을 구원의 근거처럼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방언 받지 못하면 성령 받지 못한 것이요, 엄격히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바울은 방언을 인정은 했지만 장려하지는 않았다(고전 14:19).
둘째,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초월적인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의 역사를 환상, 기적, 치병, 축귀, 방언등 초자연적인 것에 만 치우치는 것은 위험하다.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그것에 치우치면 주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셋째, 지나친 영적인 생활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 도피적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고, 현실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되며, 자유방만한 생활를 하게 된다.
넷째, 교회의 제도나 조직을 경시하고, 성경을 체험보다 경시하며, 성령체험을 극대화하는 교만으로 배타와 분열을 조장하는 경향이 많다. 이상의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이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4. 바람직한 성령운동
첫째, 성령을 독립적인 신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모셔야 한다.
둘째, 모든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도록 해야한다. 성령 충만은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행 1:8).
셋째, 성령운동과 신비체험은 반드시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은사 중에서 근본이 되고 가장 크고 무거운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령운동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세계구원을 동시적으로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운동이어야 한다.
2. 인간의 기원
3. 하나님의 형상
4. 죄(罪)에 대해서
5. 원죄(原罪)에 대해서
6.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存在)
7. 총체적(總體的) 인간
8.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9. 그리스도 안에 창조된 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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