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언의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 : 43)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제2언,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 : 43)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1. 좌편에 있는 강도는 "행악자" 그 이름을"데스타"라고 합니다. (마 27 : 44)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 : 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으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나친 고통 속에서 응답 없다고 비방의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까? 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나의 믿음에 대하여 비방할 때 얼마나 회개하며 기도하셨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에 보면"예수를 모욕하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서기관들도 "회롱"하였다고 했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방인에게 희롱을 당하시는 것보다 나와 여러분에게 희롱 당하시는 때가 더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① 정욕으로만 구하는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다.
② 아무리 교회를 나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③ 구원의 확신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자기의
믿음이 죽은 것을 모르며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라고 희롱합니다.
그 밖에도 교권상의 교회 난입에도 신학의 혼란, 찬송의 혼란을 통해서 주님은 지금도 희롱을 당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요, 지금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러 오시지 않으시고 자기 몸을 비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착각하면 (롬 5 : 8), 우리의 신앙에도 큰 오산이 생깁니다. 좌편의 강도는 이것을 알지 못하여 구원을 간청하지 못하고 도리어 조롱하였습니다.
2. 우편 강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눅 23 : 40-43)
(1)우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그의 이름은 "데스마"라고 합니다.
우편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큰 병입니다. 아버지는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매는 무서워하는 격입니다. 온 인류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함은 상식이거늘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 악에 두려운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이 큰 병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비록 늦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우편 강도는 자기의 처지로 보거나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을 보거나 도저히 믿기 어려운 처지임에 틀림없으나 여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두렵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얼마나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입니까? 그럼에도 우편 강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게 되었으니 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2)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줄 알았습니다. (41절)
이 강도는 십자가상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남을 못살게 했으니 자기도 못살게 되고, 남을 죽였으니 자기도 죽어야 하고, 죄의 대가는 자신이 받고 자손 3,4대가 받고 사후에도 받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와 같은 문제와 고통과 질병을 가지고 있는 성도여, 좌편 강도 데스타처럼 원망, 희롱하지 말고 우편 강도 데스마처럼 겸손히 회개하십시오. 십자가 앞에서는 보응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저 이 강도는 구원의 도리도 모르고 찬송도 모르고 여러분들처럼 그런 조직적인 기도도 할 줄 모르고 또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구하였을 뿐입니다. "무조건으로 구속받고 무댓가로서 칭의를 얻어 하나님 아들 황태자되니 웬 은혜이옵니까? "
(3)우편 강도 데스마는 주님의 가시는 길을 알고 즉시 구하였습니다. (41 - 42절)
예수님은 아무 죄악도 없이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을 알고 즉시 구원을 간청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이들의 가는 길은 달랐습니다. (마 7 : 13)
인생은 넓은 길을 가는 사람과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착지도 다릅니다. 맷돌질을 하던 두 여인도, 잠을 자던 두 사람도, 밭에서 일을 하던 두 사람도 준비된 자의 길과 준비되지 못한 이의 길이 각각 달랐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 자기가 가는 길과 주님이 가시는 길이 다름을 알고 즉시 주님이 가시는 길로 가고 싶어 구하였습니다.
옛날에 농군의 머슴이 하도 미련하여 지팡이를 만들어 미련의 지장이라 쓰고 머슴에게 주면서 너보다 더 미련한 놈을 만나면 주라고 하였답니다. 그러자 얼마 후, 주인이 병들어 사경 직전에 머슴은 주인에게 이제 얼마후면 이 세상을 떠나신다고 하는데 이제 가면 언제 오시냐고 물으니 이 미련한 놈은 나의 죽음자리에서까지도 미련을 떤다고 하면서 "이놈아 내가 또다시 올 수 있는 길이라면 왜 슬퍼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럼 영원히 가실 준비는 되었느냐 하니 "이놈아 죽음의 마당에서 준비가 무슨 준비냐"고 하자, 주인이여 하루아침에 여행을 하는 사람도 준비를 하고 떠나거늘 주인은 영원한 길을 떠나면서도 아무런 준비없이 간다고 하니 세상에 당신같이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면서 이 미련의 지팡이는 내 것이 아니라 주인 것이다 하면서 돌려주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인생의 향락 좋아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풍파 일장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성도 여러분,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내가 갈 길을 생각하며 여러분도 우편 강도처럼 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 : 6)고 하셨습니다.
왕양명은 인생의 갈 길이 많음을 탄삭하였거니와 주님의 말씀대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 : 12)고 하였으니 나와 여러분은 주님만 따라가십시다
(4)우편 강도는 낙원에 갔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우편 강도는 예수님보다 더 마음이 편안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을 보아 구원의 조건이 회개와 믿음임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임을 보여주며 세상에서 낙원에 제일 먼저 간 이가 목사나 신학자나 장로가 아니고 부자, 영웅 호걸도 아니고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을 간구한 강도입니다
달나라를 가는 아폴로가 아무리 발라도 낙원으로 직행한 강도만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은 "행하라!"이지만 신약은 "믿음과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지만 믿지 못한 부자는 음부의 나라에 갔습니다. (눅.16 : 31)
사탄의 달력은 내일이지만 하나님의 달력은 오늘입니다. 지금 오늘 여기서 믿으면 낙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3. 구원에 필요한 요소(눅 23 : 42-43)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과 우편 강도와의 대화를 통하여 구원엔 필요한 요소들을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엡 2 : 8),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함을 받을 수 있으나(요 3 : 16)구원받기 위해 중생하는 과정에 (엡 3 . 3-5)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들을 이 예수님과 강도와의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회개하는 과정이 그 첫째입니다.
우편 강도 데스마는 자기가 행한 죄의 보응을 받는 줄 생각한 것이 곧 회개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罪)자는 넉사(四)자 밑에 아닐 비 (非)자를 써서 네 가지 그릇 행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첫째는 선악과 먹으면 죽지 않고 눈이 밝아진다고 하는 마귀의 말을 들은 죄악이요,
둘째는 눈으로 선악과를 쳐다본 안목의 죄악이요,
세째는 발로 선악과나무에까지 간 도선의 죄악이요,
네째는 선악과를 손으로 따먹고 남편에게까지 준 행위에 죄악이라고 합니다.
구원에 필요한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청각의 죄, 도선의 죄, 안목의 죄, 행위의 죄악들을 철저하게 회개하는데 있습니다.
세탁은 제때해야 깨꿋해지듯 우리의 심령의 세탁도 범죄 즉시 자복하고 회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래 전에 영국 런던항에서 대서양으로 항해하던 다이타닉호가 4천명의 승객을 싣고 항해 중 빙상에 침몰하여 3천명이 몰사한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함장이 망원경을 일분만 먼저 들고 보았어도 그 배는 무사했을 것이라 합니다. 우리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영안을 열어 주의 구원을 바라보고 지금 곧 인생의 그릇된 길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회개란 곧 방향전환이니까요. 본문에 나타난 우편 강도는 회개할 처지가 못되는데서 회개하면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태산같은 죄악을 범한 죄인일지라도 지금 곧 회개하고 돌아서면 그에게는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세상에서도 낙원의 길을 주시고 사후에도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과정은 회개와 믿음과 중생입니다. 그 누구도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으니 우리는 지금 곧 회개하며 주께로 가야 합니다
(2) 구원의 요소 중 두번째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강도는 자기의 처지로 보나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을 보아 믿을 만한 처지가 못되지만 믿었습니다. 당시의 수많은 군중들은 표적을 보았고 병고침을 받고 떡으로 배부름을 받고 능력의 교훈을 받고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옷은 사형수가 입는 홍포로 갈아입고 채찍으로 살이 찢어지도록 맞아 피가 흐르고 얼굴에는 침투성이의 처절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찾으시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믿고 회개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과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강도의 신앙은 만고에 없는 믿음이라고까지 칭찬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의 설교에서나 교회에서 하는 일을 통하여 믿을 만한 처지가 못됩니까?
십자가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는 우편 강도를 바라보고 자신에게서 믿음을 일으키도록 노력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비참한 모습이나 무엇인가 잘 성사되지 않는데서 믿음을 가질 수 없으시면 역시 이 강도를 생각하며 우리도 믿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섭리에 대하여 이해가지 않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강도를 생각하면서 믿음을 잊어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왼편 강도는 희롱할만도 합니다. 그 까닭은 분명 예수님은 강도들보다도 더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러나 구원받을 믿음으로 본 우편 강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 회개와 함께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요소 중 두 번째 보화입니다.
믿음으로 중생이 오고,
믿음으로 성화되고,
믿음으로 영화되며,
믿음으로 칭의를 받고.
믿음으로 성령받고 갖가지 치료받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고.
믿음으로 형통하여 영에까지 이릅니다.
이적을 보고 따르던 무리는 구원받은 자 없어도 믿음으로 부르짖는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히 11 : 1-6)
(3) 구원에 필요한 세번째 요소는 전도입니다.
우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도 좌편 강도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속된 말로 그 꼴에도 전도가 나왔습니다. (눅 23 : 40-41) 그토록 예수님을 독점한 것처럼 따르던 제자들도 도망하고 주님의 덕을 본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보며 조롱하는 이때에 강도는 좌편에 있는 강도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의롭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를 증언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전도합니다.
성령받은 자는 전도합니다.
축복받은 자는 전도합니 다.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고, 구원의 성취이고, 빛을갚는 일이요, 화를 피하는 것이며, 이웃을 구원하는 길이요, 성도의 의무이니 누구에게나 전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좆겨나 호수나 산이나 거리나 다락방, 바다로 다니시며 전도하셨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은혜받고 나서는 성전에서 쫓겨나 전도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시커먼 산돌(탄광)을 배회하는 아무 교회도 속하지 않은 무리나 산으로 들로 촌으로 길가로 도시로 뒷골목으로 창고로 농부들의 부엌으로 따라다니며 전도하여 회개하고 돌아온 무리다. 나도 큰집과 큰회당이 그립지만 이 야외전도로 많은 영혼을 더 구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물질과 시간과 재물을 드려 전도하여 내 가정에 잃은 양을 찾고, 내 직장에 잃은 양을 찾고, 내 이웃에 잃은 양을 찾아, 나는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고 우리 교회는 부흥을 가져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편 강도는 십자가상에서도 전도하였읍니다. 구원의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전도이기도 합니다.
(4) 구원의 요소 중에 또 하나는 소망입니다. (내세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성도들은 철두철미한 내세관이 있어야 찹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 : 5) 성도의 소망은 부끄럽지 않게 합니다. 소망으로 믿으시고 실천하십시요. 소망으로 강하고 담대하십시요. 소망으로 즐거워하며 봉사하십시요. 소망으로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위해 수고가 넘치도록 일하면서도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편 강도는 소망으로 예수님께 간구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의 확증을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어 생명이 두 시간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는 처자에게 유언을 하는데 예수 잘 믿는 아내와 장남과 막내와 딸에게는 내일의 광명한 영생의 아침이 오면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여 마지막 유언 인사로 저녁인사를 하고, 방탕하며 주께 돌아오지 않는 자식에게는 잘되기를 노력하라 하고는 만일 네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것이 마지막이라 하며 아침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방탕하는 자식은 장례식이 지난 후에 생각하기를 자기에게 아침이 없다면 어찌되나 생각만 해도 실망이 되어 즉시 회개하고 신학을 하며 아침이 있는 좋은 목사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있었던 사실입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절대적인 믿음과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정치적인 소망, 경제적인 소망, 자녀에 대한 소망, 부부에 대한 소망, 남이 모르는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소망이 주 안에서 성취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하늘에 대한 영원한 소망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망으로 인내하세요. 소망으로 부르짖으세요. 소망으로 전진하세요. 믿음과 소망으로 충성하십시요. 더욱더 큰 믿음과 소망으로 헌금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부끄럽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한국에는 어둡기만 하지 않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에는 순교의 피가 흐르고 조국을 향한 기도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깨꿋한 단일 민족이며, 갖가지 수난을 겪은 민족이며, 오전만 가슴에 복음이 심어져 가고 있으니 내 조국은 절대적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병든교회, 잠자는 교회, 무덤같이 죽은 교회도 없지는 않습니다. 신학의 혼란. 교과의 혼란, 찬송의 혼란도 있습니다. 그러나"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을 때"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삼상 3 : 3) 이 땅의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불도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불길은 번져가고 있습니다. 붙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다같이 성령의 햇불을 들고 어둠의 구석 구석을 찾아 비치는 역사를 일으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직장과 사업에도 소망이 있음을 믿고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이삭처럼 공서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왕서방이 되는 기적과 형통의 중요임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백 번, 천 번, 만 번 실패해도 역사하는 믿음의 소망만 가지면 곧 재기됩니다.
하나님의 빛을 갚으십시요. 내 빛도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께 바른 경제관을 가지고 사시면 내 경제도 바로 세워 주십니다. 실패와 고난은 재기의 기회이니 역사하는 믿음의 소망으로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소망은 있습니다. 가정에서 고통과 억울함과 구박이 심하여 도망가는 하갈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시어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할 때,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할 때, 여호와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 :8-9)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학대받는 줄 알면서도 그 가정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며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가정에 소망이 없어 보이십니까? 절망하지 말고 믿음과 소망으로 기다리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소망은 기다리는 자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병든 몸에도 소망은 있습니다. 우편 강도처럼 소망만 가지고 부르짖으면 강건함이 올 줄로 믿습니다. 의사가 절망이라고 손을 놓았습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아 고생하십니까? 저 강도처럼 십자가를 쳐다보시고 소망 중에 부르짖으십시요. 주님 앞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의사는 소망이 없어도 주님 앞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돈 앞에는 소망이 없어도 주님 앞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병의 의원이시요, 우리의 교회는 천국종합병원이요,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출15 : 26) 소망과 믿음으로 간구하는 자에게는 질병도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의 고동이 멈추어지고 죽음이 옵니까 ? 거기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 장막이 무너지면 영원한 새 장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후 5 : 1, 히 11 : 13-16)
기독교의 5대 복음이란
예수님의 탄생이요.
십자가요,
부활이요,
승천이요,
재림입니다.
절대적인 내세관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 : 25-26)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5) 구원의 요소 중 또 하나는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중심에서 끓어 나오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뜨거운 간구입니다. 강도의 이 한 마디에 기도는 낙원으로 인도되는 축복을 받았으니 우리의 평생의 기도는 그 이상에 놀라운 구원과 축복이 올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한 마더의 기도만 보아도 기도의 힘이 얼마나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구원을 가져오는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범죄의 자리에서나 어떠한 실망의 자리에서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구원과 기적이 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강도는 한 마디 기도가 의인으로 만들어 낙원에 간 것을 알고 믿으신다면 우리에게도 그 이상의 기적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태양을 머무르게 함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함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18일 만에 대적을 총칼 없이 물리치며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은 것도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를 개혁함의 능력도 기도에서 와진 힘이었습니다.
스칸드 랜드의 개신교에 십자가가 높이 세워지게 됨도 죤 박스의 단일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고용봉이 상이군인의 몸으로 이만한 사명을 가지고 이렇게 역사하게 함도 나의 목숨을 건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지옥 직행에서 천국 직행으로 돌이킴을 받은 강도도 십자가상에서의 기도하는 힘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상에서 기도했어요? 여러분의 십자가가 있으면 거기서 기도하십시요.
구원의 요소는,
첫째, 회개함이요,
둘째, 절대적인 믿음이요.
세째, 전도함이요,
네째, 뚜렷한 하늘 소망이요,
다섯째, 간절한 간구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