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 : 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도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도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 : 26-27)
제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 : 26-27)
세번째 주닙의 눈동자가 집중된 곳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동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면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나는 1977년 8월 7일 이스라엘에서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주님이 지고 가신 갈보리산, 고난의 길을 나도 감격 속에 걸어가면서 "주여, 당신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길을, 진정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나는 평안히 걸어가나이다" 하면서 감격 속에 올라가면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시온 중턱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던 옛터가 있는데 지금은 cocna culum이라 불리우며 다락방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었고 나는 여기에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던 모습과 가를 유다가 만찬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베드로가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곳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이름이 "닭이 울던 교회"(cock crow church)라 하며 여기가 원래 가야반의 집터였다고 하며 닭 우는 소리에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한 곳에 기념 돌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의 이름을 고난의 길, 슬픔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길의 넓이는 4 m정도요, 거리는 5000m쯤 되어 너무 길이 좁은데 놀랬으며 지금도 금요일이면 프란시스코파에서 이 길로 걸어다니며, 고난주간 금요일이면 성대한 행사가 이 길에서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일어난 사건의 장소마다 표시를 해 놓았거나 기념비나 아치가 세워진곳이 14군데나 되었습니다.
제 1표시 :
빌라도 법정을 나와 갖은 고역을 당하신 곳(빌라도 궁전)
제 2표시 :
십자가를 지신 곳(로마군의 주둔지)
제 3표시 :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처음으로 넘어지신 곳
제 4표시 :
주님이 어머니를 만난 곳인데 여기는 슬픈 기색을 띤 마리아상이 있다.
제 5표시 :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길이라 하지만 실상은 부축만 하고 끝까지 예수님이 지고 가시므로 구속 사업을 완성하셨으며 후에 시몬은 주를 믿고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와 어머니는 초대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막 15 : 21, 롬 16 : 13)
제 6표시 :
주님을 사랑하던 여자 "베로니카"가 주님의 피땀을 닦아 준 곳. 그런데 이 여인이 12년 혈루증에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낳은 여자라고 한다. (마 9 : 18)
제 7표시 :
주님이 두 번째 넘어지신 곳. 여기는 길이 오르막길이었다. 그러니 쓰러질 수밖에…
제 8표시 :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신 곳(눅 23 : 28)
제 9표시 :
주님이 세 번째 넘어지신 곳
제10표시 :
주님의 옷을 로마 군인이 벗긴 곳. 이런 표시들은 대리석 판벽이었다.
제11표시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골고다가 해골 형태의 산인 것은 분명하나 지금은 웅장한 성전 안에 있어 성경에서 찾는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제12표시 :
십자가를 세웠던 곳. 여기에는 십자가의 큰 성화와 거대한 석주, 신상촛대 등으로 엄숙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제13표시 :
주님의 성체(聖體)를 십자상에서 내려놓았던 장소. 여기는 지금도 예수님의 시체에 기름을 발랐다는 돌판이 보존되어 있었다. (요 19 : 39)
제14표시 :
주님이 묻혔던 묘지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 여기는 지금도 돌무덤의 문이라 한 사람씩 밖에 들어갈 수 없으며 무덤 안에 주님이 누워 계시던 돌 앞에는 세 사람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무덤의 돌을 만지니 손은 차지만 나의 가슴은 뜨거움을 느껴 감격에 벅찬 기도와 헌금을 했다. 이 무덤은 사방 2m정도의 방 같고 우편에 대리석 들판이 주님이 누우셨던 돌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한참 내려가 주님의 부활을 가르쳐 주던 천사가 앓았던 곳에다가 교회를 세웠고 그 이름을 "천사교회"라고 했다.
그런데 제 4표시에 주의 어머니와 이모님이 울면서 따라가는 그림과 글이 적힌 대리석 벽이 그때에 마리아의 심정을 잘 나타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심정을 한번쯤은 더듬어 봄도 은혜가 될 줄 압니다.
1 .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아픈 마음
오늘의 성도들은 마리아를 성모라 칭하니 축복 받은 여인 같고 또한 성경에는 축복 받은 여인으로 나타났으나 육적으로나 외적으로 될 때에 마리아는 참으로 괴로운 여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성신으로 잉태된 고민
우선 마리아는 성신으로 잉태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 그러니 여기에도 두 가지의 큰 아픔이 있으니
첫째는 부끄러움이요,
둘째는 두려움입니다. 당시에는 처녀가 잉태하면 돌로 쳐서 죽이는 율법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성가대원 하나가 임신을 하고 나는 남자를 모르는데 절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 목사인 내가 믿겠습니까 ? 여러 성도님들이 믿으시겠습니까 ? 아무도 못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얼마나 창피하며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 그러한 면에서 마리아는 마음이 아픈 여인임에 틀림없습니다.
(2) 남편에 대한 송구감입니다.
정조 관념이 철두철미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혼한 남편과 관계도 없이 임신하고 나타나는 송구함은 처녀가 남자 모르게 임신해 보지 않고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리아가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 뒤에서 요셉이 처량하게 서 있는 성화를 보면 요셉의 심정을 이해할 듯도 합니다.
그때 요셉은 아기 예수를 내려다보며 저것이 누구의 자식일까, 정말 성신으로 잉태했을까 설혹 성신으로 잉태하였다고 해도 나는 숫처녀와는 결혼을 못하는구나하면서 서글펐을 것입니다. 제 아내가 옥동자를 나서 내게 가져오면서 이것은 성신으로 잉태하였고 나는 깨끗하니 믿음으로 인정해 달라고 왔다면 저는 징글맞다고 하면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면 모르거니와 아마도 성모 마리아는 남편 요셉에게 대하여 평생 송구한 마음으로 살아 왔을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자식을 데리고 와서 사는 여인이나 내 자식을 두고 후처를 얻은 남편들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갈지도 모릅니다. 성경 외경의 야고보복음서에 보면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리아가 여섯 달이 되었더니 보라, 요셉이 일하던 건축현장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자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몸이 커진 것을 보았다.
이에 저가 자기 얼굴을 치며, 비복으로 땅에 엎드려 몹시 탄식하여 말하되 '내가 무슨 면목으로 주이신 내 하나님을 뵈올 것인가, 또 내가 이 여자에 대하여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인가, 내가 주의 성전으로부터 동정으로 저를 받아 가지기만 하고 내가 저를 감시하지 않았구나. 나를 넘어뜨린 자가 누구냐, 내 집에서 이런 악한 짓을 해서 동정녀를 더럽힌 자는 누구냐, 아담의 역사가 또 내게서 되풀이한 것이 아니냐, 아담이 송가를 노래할 때 뱀이 와서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저를 속여버린 것같이, 내게도 이제 바로 그처럼 되었구나' 했다.
요셉이 슬픔에서 일어나 마리아를 불러 '아아,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어쩌다가 이런 짓을 저질러 주이신 네 하나님을 잊어 버렸느냐, 무슨 까닭으로 네가 네 혼을 매장해 버리느냐, 네가 지성소에서 자라 천사의 손에서 먹을 것을 받은 자가 어쩌자고 내 혼을 욕되게 하느냐'했다.
마리아가 몹시 울며 말하기를 '내게는 죄가 없습니다. 나는 어떤 남자와도 사귄 일이 없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에게 '그렇다면 네 뱃속에 있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이냐.'고 물었다. 마리아는 '주이신 내 하나님을 걸고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합니다'하였다."
이때에 마리아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3)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
부모보다 앞서서 먼저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마음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그것도 십자가로 죽어가니 예수님은 평생동안 마리아에게 고통만 주다가 가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가슴에는 보이는 못이 박히셨으나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못이 수도 없이 박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주님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거니와 마리아는 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마리아는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과 똑같은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니 더 심한 고통을 당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딸이 피아노를 치다가 손목에 이상이 생겨서 기독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는데 적은 것이니 마취를 하지 않고 그냥 하니까 아프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러오니 재 엄마가 밖에서 함께 울었다고 해요. 왜 울었느냐고 하니 마음이 아파서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은 적지도 않은 성체에 십자가에 못을 박아 운명해 가시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 그 아픔과 괴로움은 세상에 어떠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서는 마리아를 성모로 모시는지도 모르지요. 누가복음 2장 35절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 예수께 와서 축복하고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씀이 여기에서도 생각나게 합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시면서 "아 ! 저는 분명 나를 슬프게 하기 위해 왔다 가나 보다. 저는 나를 처녀로 잉태하게 하고 남편에게 송구감을 주고 자식들에게 불신감을 주게 하고 세상에서 좋은 일은 혼자 하면서도 박해와 증오 속에 살다가 제자들에게까지 배신을 받고 부모 앞에서 십자가로 죽어 가는구나"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2.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아픈 마음
십자가상에서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은 또한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솟았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엎드려 있는 나다나엘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주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여인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주님. 어느 물고기 뱃속 에 돈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가롯 유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신데 자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
십자가상에서 어머니의 마음 구석구석을 보고 계시는 주님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신 뜻은"어머니여, 나는 아들이 아닙니다"하는 육적으로 불효감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식 노릇을 못하고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가오니 요한 네가 네 어머니로 모시라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세 번째로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곳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이었옵니다
(1)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임을 주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산교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효도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윤리의 표준은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계명인 1계명에서 4계명까지와 인간에 관한 계명인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에 관한 첫 계명인 제 5계명이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애초에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두 돌판으로 되어 있었는데 아마 두번째 들판의 맨 위에 이 5계명이 새겨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에 기독교인들이 묘지에 가서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는 불효의 종교'라고 하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효경(孝經)에 보면 "효는 모든 덕 (德)의 근원이며, 이 효는 인간이 인간 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최초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거기서 인간역사가 시작됩니다
부모는 어린아이에 있어 태양과 같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2대 비극중
첫째는 되는 것은 부모 없는 고아가 되는 것이라 했고,
둘째는 나라 없는 망국의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효도 없는 가정, 효 없는 조국애가 있을 수 없으며, 낳으신 은혜, 기르신 은혜, 가르쳐 주신 은혜, 축복해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면 그 은혜 백골난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선진들의 효도
구약성서에 보면 부모님을 노엽게 하거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엄격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위대한 민족이 되게 한 효성의 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불효한 사람은 상관에게도 순종할 줄 모르며 사회생황도 원만하게 할 수 없는 인격입니다.
칼 바르트는 그의 교의학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에서는 하나님 없이 부모를 성기다 보니 세상을 떠나신 후도 묘비나 사진 앞에 상을 차리고 제사함이 축복을 받는 길로 알기까지 되었으나 이것은 우상숭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으니 생존해 계실 때 기르게 해드리는 것이 바른 효성입니다.
강철왕 카아네기는 자기가 결혼을 하게 되면 어머니보다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될까 싶어서 독신으로 어머님을 봉양했다고 합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던 요셉도 그의 아버지 야곱을 모셔다가 최선을 다해 효성을 하였습니다.
옛날 효성이 지극했던 백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종종 매로 종아리를 치며 교훈을 하셨는데 하루는 종아리를 맞는데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아버님의 기력이 쇠해졌던 것입니다. 백유는 아버님의 기력이 쇠해진 것을 서러워하며 그 매를 들고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백유읍장'(伯愈泣杖)이란 말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 . 20)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머니를 즐겁게 하라." (잠 23 : 25) 우리 주님은 십자가상에서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부모나 형제나 이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효도하여야 할 이유
①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먼저 말씀 드린 대로 십계명 중에 먼저 네 부모를 효도하라 했으며, 성경에는 수도 없이 여러 곳에서 효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출 21 : 15-17, 신 21 : 20, 엡 6 : 2, 잠 20 : 20, 골3 : 20)
②효도는 인생의 본분입니다. 물은 흘러서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고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를 덮어 주며 까마귀도 어머니의 공을 갚아 반포(反哺)의 보답을 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이 누가 가르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당연한 이치요, 인생의 본분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시간까지 그 모친에게 극진한 효성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주님을 따르고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요 19 : 26)
③효도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孝는 自行之本이요, 萬福之源이라 했습니다. 효도하는 자에게는 장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고(출 20 : 12) , 범사에 잘되는 형통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고 (옙 6 : 3, 잠 3 : 2), 지레와 명철을 얻으며 (잠4 : 5),부귀와 영화의 축복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잠 1 : 9)
④효도는 전도의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상의 사명이요, 성도의 첫째되는 본분인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부모님을 잘 섬겨 가정에 평화와 축복을 가져오면 부모님이 믿는 것은 물론이요, 이웃 불신자까지도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 나와 그 영혼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하두 장남에게 딸 주는 것을 꺼려해서 나는 설교하면서 여러분 이제부터는 자식을 낳을 때 장남부터 낳지 말고 둘째 아들부터 낳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노인을 잘 섬기고 우리 성도가 효도한다고 소문이 나면 그처럼 큰 전도의 무기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3 어떻게 공경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할까요?
(1)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했으니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어기는 일은 할 수 엄지만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 부모님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할 것입니다.
(2) 물질로 봉양할 것입니다.
물질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하여 효도해야 합니다. 좋은 음식이나 좋은 일을 당할 때 함께 하지 못하는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대하여 송구함을 느낄 줄 알아 함께 동참할 기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3)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립시다.
아무리 대귈 같은 집에서 상아 침상에 산해진미를 봉양한다 할찌라도 가정이 불화하여 마음이 펀치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형제간에 우애하고 부부간에 화락하여 부모의 마음도 평안하고 가정천국이 이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우리의 부모님을 천국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고 그후에 심판을 받는 것은 만고불변의 철칙이요, 진리인데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다면 그것처럼 불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이, 생명의 구세주요, 나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영광 중에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27대 대통령으로 제임스 가필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가필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거행할 때에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식전에 모시는 편지를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훌륭한 많은 사람 틈에 초라한 시골 늙은이가 어찌 끼어 앉을 수 있으랴 해서 고향에 머물러 아들을 위해 기도나 하겠다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자 가필드는 "어머니께서 이번 식전에 참석치 않으시면 저도 식에 나가지 않겠습니다"라고 간곡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늙으신 어머님은 마침내 아들의 지극한 효성을 받아들여 아들의 부축을 받아 화려한 식장에 니타났습니다. 아들은 대통령의 자리를 어머님께 내어 드리고 자기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아들과 이 어머니에게로 흠뻑 쏠렸습니다. 가필드는 취임 연설을 끝내고 자리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껴안고 뜨거운 키쓰를 했습니다
십만이나 모인 군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아깝게도 1881년 취임 4개월만에 암살 당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남긴 세번째의 말씀입니다.
한국 동란 중 어느 크리스마스 이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느 가난한 어머니가 만삭이 죄었으나 아기 낳을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선교사의 집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채 도착하기 전에 산기가 나서 도저히 더 걸을 수도 없고 하여 어느 다리 밑에 내려가 아기를 낳았습니다. 살을 에이듯 추운날, 핏덩어리를 낳았으나 그곳에 무슨 이부자리가 있었겠습니까 !
그 어머니는 자기 옷을 하나 둘 벗어 그 핏덩이 아기를 쌌습니다. 아기를 춥지 않게 싸고 보니까 자기는 알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후들후들 떨던 산모는 옆에서 거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둘러썼습니다.
그밤 선교사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러 가는데 그 다리 위에를 지날 무렵 마침 차의 엔진이 꺼졌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아기 우는소리를 들었습니다.
울음소리를 따라 다리 밑에 내려가 보니 이제 갓난 아기가 싸여 있고 그 옆 거적에 산모가 있는데 그 산모는 이미 싸늘하게 숨져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아기를 길렀습니다. 12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어머니의 슬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어머니의 무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날도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한참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던 아이는 자기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 어머님의 묘를 덮는 것입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흐느껴 울면서 "어머니 ! 얼마나 추우셨나요. 나 때문에 얼마나 추우셨나요." 아이는 옷을 다 벗어 묘 위 에 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선교사가 크게 감격하고 그 아이를 안아다가 좋은 옷을 입히고 공부를 시켜서 나중에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부모에게 효성하는 종교가 기독교 입니다.
우리도 내게 있는 귀한 것을 벗어 주님의 십자가를 덮어 드리며 십자가의 구속에 감격하여 충성 봉사하면서 효도하고 사랑하는 축복의 가정 천국을 이룩하여 하늘천국까지 모시고 가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올 날이 오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