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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페물 이용을 잘하신다

정광고무 2008. 8. 9. 08:23

하나님은 페물 이용을 잘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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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32 : 1 - 8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 : 1)

    대한민국에서 고 용봉이란 사람을 불러 국군이란 사명을 주어 전선에서 싸우게 하다가 부상을 입으니 상이군인이란 명칭을 붙여 연금이나 타먹다가 죽으라고 던져 버린 인간 폐물이 되고 마니. 하나님은 이 폐물을 선택하사 성령의 용광로를 거쳐 신학이란 성산을 통해 목사란 사명을 주시사 현재까지 이용하시고 계십니다.

1 . 나의 입대와 6 . 25

    나는 1949년에 서울 수도경비 사령부에 입대하여 1950년 6 . 25동란 때는 병기 보급을 맡은 군인이었습니다. 우리 부대의 보급은 이틀만에 동이 나고 한강철교가 끊어지자 우리 부대는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지휘관도 없이 밀리고 또 밀리었습니다. 전쟁이 나자 생명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오니 어린 시절에 받아들였던 신앙의 싹은 본격적으로 떠오르게 되어 위급할 때마다 진땀이 흐르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으며, 이때부터 하루 세 번씩의 정기적인 기도는 나의 큰 과업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한강이 끊어지자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탄과 수많은 희생자로 얽힌 한강을 헤엄쳐 건너서 영등포에 집결된 부대와 합류하여 재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강을 지키고 있었으나 후방에서 오는 보급이 없어 무기도 군량미도 떨어져 이틀을 굶고 전투만 하다가 주먹밥이 와서 정신없이 배를 채우고 음료수 대신 술을 주길래 마시고 술과 잠에 취해 있다가 깨어 보니 우리 부대는 벌써 후퇴해 버리고 제 앞에는 적군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주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한 나는 곧 시흥에서 적의전차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유격병으로 선발되어 십여 명의 국군이 적의 전차가 밀려오는 길 양옆에서 싸웠는데, 적은 벌써 수원까지 진격하여 우리는 인민군의 뒤를 따라가는 낙오병이 되었습니다.

    수원시에서 인민군 만세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다가 깊은 잠이 들었는데 누가 내 발을 차며 손들라고 하기에 보니 아무 표시도 없는 군복을 입은 청년이 "너 인민군이냐, 국군이냐?"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나는 손을 들고 저가 인민군이면 나도 인민군이라 하고, 국군이면 나도 국군이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군이라하니 그 청년이 나도 국군 소위니 어서 후퇴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 평택에 가서야 우리는 우리 부대와 합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급하면 누구나가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저도 모르게 철저한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다니엘의 신앙을 생각하며 하루 세 번씩 조국과 전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큰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날이 갈수록 전우들은 회생이 되어 가고, 신병들은 입대 몇 날이 못되어 포로나 부상자, 그렇지 않으면 전사되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전투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후퇴에 지쳐 버렸습니다. 낙동강 전투에서 일어난 참상은 표현할 길 없으며, 무엇보다도 미군들의 큰 희생은 차마 견딜 수 없는 분격이었습니다.

    한번은 낙동강 상류에서 잠복 근무중 키 큰 사람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혼비백산이 되어 우리 앞으로 도망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우리가 그를 잡고 보니 포위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미군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배치되어 경주에서 가까운 안강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6·25 당시에 안강 전투는 낙동강 전투 못지 않은 큰 전투였습니다.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 전우들의 발에는 무좀이 생기고, 옷에는 이가 들끓고 냄새가 나니 후퇴병의 초췌한 꼴이란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우리 부대는 거의 신병들로 7백여 명이 재조직을 되어 안강 뒷산에 배치되었습니다. 후방에서 보급이 오지 않는 우리 부대는 또 적의 기습을 받아 전투 경험이 없는 군인은 전사, 중상, 포로가 되었고, 다음날 집결하여 보니 2백여 명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또 포위를 당해 한바탕 싸우고 아침에 파악된 군인은 41명뿐이었습니다. 정말 눈에서 불이 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삼 일 동안 밥 구경을 못한 우리 41명은 그곳 이장(里長)을 불러 밥을 해줄 것을 요청하니 그는 우리를 세 곳으로 배치해 놓고 부인들에게 밥을 지으라고 시키고는 뒷산에 잠복중인 인민군 4백 명에게 밀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도 못 먹은 채 또다시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나는 무기를 놓아둔 채 변소에 갔다가 하도 다급해져 그 집으로 뛰어 들어가니 12세 가량 되는 남자 어린이와 그 부모가 이불 속에 숨어 있기에 나를 숨겨 달라고 했더니, 그 부모는 인민군에게 발각되면 자기들까지 죽으니 못 숨겨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 어린이가 나오더니 나를 부엌 구석에 숨기고 나무 한 단을 가져다가 그 위에 덮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자 인민군들이 몰려와 여기 돼지 한 마리 들어왔으니 내어놓으라고 어린이에게 따발총을 들이대었습니다. (그때 인민군은 한국군을 잘 먹고 잘 싸운다고 돼지라고 했음) "여기 오지 않았다"고 그 아이가 말하니 인민군은 "요놈아,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린이는 "이리 들어와서 외양간으로 도망쳤다"고 하면서 무너진 담벽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그놈의 새끼 빠르기도 하다" 하며 부엌문에 앉아(나와의 거리 3m)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무 사이로 다 내다보며 "하나님, 살려 주세요. 죽이시려거든 내 영혼 받으십시요" 하고 기도하였는데, 다급해지니까 기도가 간단해 좋더군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거기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나를 가린 나무를 들추는 바람에 놀라 깨니 이 어린이가 속히 나와 군복을 갈아입고 이 적지를 빠져나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린이와 부모가 준비해 준 한복을 입고 그 집 이불보따리를 지고 소를 몰고 피난민 행세를 하며 양쪽에 즐비하게 잠복한 인민군 사이를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어린이는 다시 그 전방으로 들어가서 내 군복을 짚단에 싸서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공 재호라는 그 어린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 주신 보호의 신인 듯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그릇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안위함을 받는 것을 나는 이 위험 속에서 배웠습니다. (시 23 : 4)

2 UN의 도움과 한국군의 전진

    우리 부대는 얼마 후 UN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주에서부터 반격이 시작되어 본격적으로 전진이 시작되었고 그야말로 승승장군이었습니다.

(1) 춘양 전투와 손의 부상

    우리 부대가 춘양에까지 전진하자 산에서 18세 가량의 처녀가 면장딸이라고 울면서 도움을 간청하기로 우리 부대 식사 당번 겸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군인들이 잠복 근무중 이 여자가 나가서 짚단에 불을 붙여 초가집에 불을 질러 여기가 국군 본부임을 알려 주는 간첩 연락병으로 둔갑을 하였으니 우리는 그 간첩 여자에게 속은 것입니다. 이날 밤 우리 부대는 여기서 큰 피해를 보았고 이 전투에서 나는 오른손에 부상을 입어 평생 글을 못 쓰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전우와 상관들은 내게 입원을 강요했으나 거절하고 전진하는 대열에 끼어 북진을 계속했습니다.

(2) 전투 중에도 피난민을 돕는 즐거움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지 몰라도 전진할 때나 후퇴할 때나 피난민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전투중에 도 주머니에 돈만 있으면 피난민을 도왔고, 심지어는 전우들의 봉급까지 빼앗아가 어려운 일을 도왔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지 ? 어떠한 치열한 전투에서 하루 세 번씩 하는 기도와 선행은 지휘관들에게 인정을 받아 부대 비밀과 중요연락은 모두 나에게 맡겼으며. 예수쟁이와 아멘은 나의 별명이었는데 나에게는 만족한 별명이었습니다.

(3) 38선을 넘어서면서

    우리 부대는 어느새 38선을 넘어 강원도 양양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이북 사람들을 대하니 감회가 깊었으며, 그 동안의 끈질긴 전투에도 살아남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주여,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4) 함경도까지 진격하면서

    그 동안에도 수 차에 걸친 위험을 모면하면서 우리 부대는 원산까지 진격하였습니다. 여기서 원산을 탈환하고 7백 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는 전과를 세운 우리 전부대원은 일계급씩 특진을 되었고, 나는 여기서 이 계급특진과 대통령의 특별훈장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5) 보기만 해도 소똥내가 나는 쇠고기

    함경북도 길주 지방에서부터는 엄동설한에 김치, 된장은 없고 여기저기 주인없는 소를 잡아 소굴에 끓여 먹거나 구워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먹음직했으나 몇 달이 지나니 산 소만 보아도 소똥내가 나며 김치와 된장이 한국사람에게는 제일 좋은 반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눈보라치는 추위에 버선 안 신고 장갑도 없이 물길러 오는 여인들 턱에 고드름이 생기는 것을 보고 강한 여인들의 매력에 마음이 끌리기도 하여 솔직히 말해 짝사랑도 해보았습니다.

(6) 함경도 주을 전투에서의 억울한 희생

    주을 전투에서는 너무나도 추운 밤이었습니다. 우리 부대원 중 00명이 고지에서 밤을 새워 지키던 중 00명아 새벽에 이르러 동사(凍死)하였으며 00명이 동상으로 고통을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한 희생입니까 ? 그 밤에 나는 밤이 새도록 찬송을 부르며 주님과 함께 지낼 수가 있었으니 역시 주의 은혜일 것입니다.

(7) 청진에서의 후퇴와 부상병의 희생

    우리는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대가로 치르고 무난히 백두산까지 가나 했더니 서부 전선에서는 벌써 평양에서 4백 리를 후퇴했다며, 우리 부대도 갑작스런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끓는 아쉬움 속에서 청진까지 후퇴하여 큰 군함(에리씨티)으로 부산까지 와서 재배정과 재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로 삼척까지 와서 전방에 배치되었습니다. 한번 크게 후퇴한 군인들은 사기를 잃었고 맥이 빠졌습니다. 그런 중에서 수많은 전우들을 잃어 가며 그들은 전선을 지키었습니다.

3. 나의 부상과 2년간의 치료와 신유

    간성 지구와 향로봉지구에서의 전투는 여기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였습니다.

(1) 나의 부상과 수술

    때는 1951년 8월 25일인가 싶습니다. 간성과 향로봉전투에서 복부에 큰 부상을 입고 즉시 속초 제1이동 외과병원으로 후송되어 여기서 세 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세번째 수술시에는 나의 다리에서 살을 다섯 군데나 떼어서 상처에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간호원이 살과 피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자신의 몸에서 이식수술을 했습니다.

(2) 시체실에서의 구출

    세번의 수술을 치른 나는 얼마 후 의식이 회복되었는데 손발은 움직여지지 않고 얼굴에 무엇으로 가리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눈을 뜨고 수건을 벗기고 보니 거기는 부상자들이 전사하면 시체를 안치하는 시체실이었습니다. 그래도 내 맘에 평안이 가득함은 주께서 허락하신 은총일 것입니다.

(3) 부산으로의 후송

    얼마 후 중환자들은 배로 후송되어 여수, 순천을 거쳐 부산 제15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여기서 또 두 번의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4) 장구한 병상에서의 고독과 아픔

4. 절망중에 부르짖은 산기도와 신유

    다섯 번의 대수술을 치른 중에도 나의 상처는 계속 재발되는 고통과 아픔이 있을 뿐이었옵니다. 여섯 번째의 수술을 또 받게 된 나는 수술문에 이르렀을 때 그 지긋지긋한 수술을 또 받는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이때 나는 원망과 항의에 찬 기도를 얼마나 뜨겁게 뜨겁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가 아니라 죽음과 싸우는 피끓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시 79 : 1-12).

    순간 나는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하신다(히 12 : 7-9)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수술을 포기하고 환자의 까운을 벗어버리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병원을 나와 산으로 올라가다가 소나무 한 그루를 잡고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울부짖음의 제목은 "왜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하십니까 ?"였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먹을 것, 마실 것, 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기도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건 필사적인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상처는 치료를 받지 못하니 파리가 상처에 와서 쉬를 할 만큼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에 쓰러져 얼마만에 깨어나니 그렇게도 오랫동안 고통을 주던 상처는 깨끗하여지고 감격과 기쁨과 속죄와 평강에 넘치는 춤을 추었습니다.

5 . 제대와 신학교 입학과 목회

    나는 상처가 완쾌됨을 인정받아 제 5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1952년 9월 5얼에 상이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타락과 부패가 가득해 나는 누구를 위해 싸웠나 하는 실망과 공허감에 사로잡혀 타락하게 되자, 다시 상처가 재발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서원기도를 하고 1954년에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 2학기 때부터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까지 25년간의 목회와 20년간의 집회 인도를 할 수 있는 능력과 사명을 받은 것은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확신하여 주께 감사합니다.

    77년도에는 미국에 가서 열 곳 이상의 연합 집회 인도와 성지 순례를 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고, 78년에는 41평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며, 축복받은 믿음」(매진),「교회생활의 표준」(재판인쇄중),「그리스도인의 기쁨」,「호렙산 불꽃」(공저 매진)이라는 책을 쓰게 하심은 더욱 큰 은혜라 믿으며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목회를 통해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은 시온감리교회 윤장근 장로님과 조 승현 속장님이십니다. 이분들은 나의 목회의 20년간을 여러 모로 협조해 주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까마귀라 생각하며 늘 감사합니다. 나의 남은 여생도 오직 주와 교회와 성도와 조국만을 위해 살아야 겠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빛도 얼이 이름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아멘.

    하나님은 폐물 이용을 잘 하십니다. 우리도 주께 거듭남을 받으십시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고 나의 과거를 고백한 신앙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