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고무 2008. 10. 18. 08:36

구원

(Salvation)

“칼을 면한 자들이여 서지 말라 행하라 원방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렘 51:50)

 

구원, 이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기쁜 말입니다. 이 말에는 어떤 겉치레의 의미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억압도 반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것을 다 설명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모자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원의 의미를 제한하여 그저 새로 태어남 정도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구원의 의미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구원에는 멸망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칼을 면한 자들이여.”

예레미야 51장은 불타는 장입니다. 철저한 멸망으로 온 장이 꽉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장은 멸망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참뜻을 보여 줍니다. 멸망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선인(善人)의 구원입니다. 성경에서는 멸망을 위한 멸망은 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그저 파괴를 위한 파괴를 자행하지만 하나님은 죄인과 악인을 멸망시키실 때에도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목적은 선인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1.검의 목적

검의 목적은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첫 번째 요소는 멸망입니다만 사람들은 여기에 반대합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 주님이 자신의 사역에 관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히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주님은 자신을 모든 평화와 행복, 무지를 파괴하러 오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이 말씀은 이것들이 죄의 은폐 역할을 하는 경우에 해당됩니다.(마3:10)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 오지 않았다고 하는 놀라운 말씀이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추구하시는 일은 꼭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해방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형통 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검을 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들의 행복과 평화, 번영하고 유쾌한 생활이 구원받지 않은 생명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들은 머지않아 검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평화와 행복과 기쁨은 곧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2.검의 위험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라는 말은 옳은 것 같으나 위험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너무 사랑하셔서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니깐 우리 안에는 ‘죄인’이 남아 있어서는 안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란 말은, 그 사람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 속에 있는 죄를 파괴하시는 일을 내가 반대한다면 그 결과는 한 가지뿐입니다. 그 결과는 죄와 함께 나도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임재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요15:22-24). 하나님은 안식하지 못하는 죄를 추궁하시지 않으십니다. 위의 말씀은 구원에 있어서 멸망 요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일대일로 대면하면 그 즉시 그분과 나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되는데 이때는 핑계도 변명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때 그분이 보여 주시는 모든 죄에서 구원받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멸하러 오신 죄와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3.검의 위력

한 전설에 의하면 기가 막히도록 좋은 칼을 만드는 유명한 대장장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칼로 갑옷을 한칼에 두 조각 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 대장장이를 불러 자신의 갑옷을 두 조각 내보라고 명했습니다. 만약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장담으로 인해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명했습니다. 그 대장장이는 칼을 단 한번 휘두르고는 칼집에 꽂았습니다.와이 다시 호통을 치려 하자 대장장이는 “왕이시어, 몸을 한 번 흔들어 보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몸을 흔들자 왕은 두 조각이 나 쓰러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전설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검의 위력을 말해 줍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기를 만드시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무언가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릴 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겠지만 몇 개월 후 위기가 닥치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와 우리의 목을 죌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의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때 우리는 ‘이 말씀이 어디서 왔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수년 전, 아니 수개월 전 혹은 수주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은밀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이제 갑자기 수면 위로 드러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칼끝을 피하느냐 아니면 칼이 노리는 것과 함께 멸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되돌아보면 현재의 관점과 지난날의 관점을 비교해 봅니다. 한때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솔직히 말해 이 변화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사55:10-11).

하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성공의 결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힘없이 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 배척하든 좋아 ‘헤헤’ 거리든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의 효과가 일찍 나타나든 늦게 나타나든 그것은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받아들이나 받아들이지 않나 살피면서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만 전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드리기를 힘쓰라,” 누구에게요? 성도들에게요? 아닙니다.“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 사람들이 늘 받아들일 만한 말씀만 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온 진리는 언제나 우리가 한 번도 격어 보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므로 당연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난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어.” 이런 상황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만약 그 전한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그냥 놔두십시오. 그려면 진리가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위기가 닥쳤을 때 그곳에 케케묵었지만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결단이 순간이 다가옵니다. 멸망을 당하는 것들과 함께 날아가 버릴 겁니까? 아니면 칼을 잡은 손에 매달여 있을 것입니까?

“한 종교의 교리의 깊이를 측정하는 가장 좋은 잣대는 그 종교의 죄 개념과 죄 치료법이다.”

죄는 교정되거나 아니면 죽어 없어져 한다고 믿으십니까? 만약 죄가 교정의 대상이라면 그 상징은 회초리면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죽음을 상징하는 칼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지 않은 사상이 우리의 마음에 끼여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짖는 죄가 날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등의 생각 말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 안에서 조금씩 자라 가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성장을 방해하던

그 무엇으로 부터가 우리가 건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죄관(罪觀)은 사람의 구원관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죄관이 하나님의 책에 끼어 들어와 있습니다. 죄는 교정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 안닙니다.반드시 멸망되어야 합니다. 해방이 오려면 무언가가 파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에서 건져 내실 때도 그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실 때에도 그랬습니다.

 

구원에는 지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서지 말라, 행하라.”

‘가라, 행하라’라는 동사와 관련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집회에서 ‘가라’라는 동사를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또 ‘받아라’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받아라’를 강조하지만 신약 성경은 ‘가라’를 강조합니다. 칼날을 피했다면 가라!

 

1. 죄에 마비됨

날 때부터 노예인 사람이 갑자기 해방되면 다시 노예 신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미국에서 노예들이 해방되었을 때, 노예들은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놀라고 당황했고 어리석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몸뚱이에 대해 주인 노릇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옛날 주인에게로 되돌아가고 싶어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갑자기 해방되면 한동안 의식이 마비되는데 이것은 갑작스런 해방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죄에서 해방된 죄인도 마찬가지로 이런 마비의 기간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자기 죄에서 해방되면 더 이상 유혹이 없는 천국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데려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내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속으로 모두 이런 일을 바랍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고, 성령을 넘치도록 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야, 그러니까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모든 것이 잘 될텐데, 나는 잘못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려워,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면 전에 내가 어떻게 넘어졌는지 생각이 나고 다음에 또 그렇게 되지 않을까 겁이나.’

사탄은 이 마비의 순간을 노립니다. 그래서 죄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는 특별한 지시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전도집회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올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올무는 한가지 있습니다. 이 올무는 “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난 성화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고 가르치면서 다른 지시를 내려 주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있는 충고는 이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은 진리로 확인해 보십시오. 성경은 “(계속) 행하라”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난 직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앉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책이 주시는 이 지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지시는 단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행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2. 구원받은 자의 고통

오랫동안 붙들어 메 놓은 관절을 풀어놓으면 심한 통증이 옵니다. 그렇지만 이 통증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대부분 환희의 순간입니다. 기쁨과 행복과 광명과 함께 생명이 용솟음칩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으며, 이루 말할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환희만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구원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이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때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변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가지 마. 가만히 앉아 있어. ‘영원한 축복을 마음껏 노래하라’는 찬양이나 실컷 부르렴.”

우리는 영적인 걸음마를 배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 받기전 우리는 죄로 인해 꽁꽁 묶어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의 종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사용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다르게 사용하라는 뜻입니다(롬6:19).

늘 글만 쓰던 사람이 대장장이 일을 하면 근육에 알이 배어서 며칠 동안 끙끙 앓게 됩니다. 그렇지만 얼마간 시간이 흘러 그 일에 익숙하게 되면 통증이 사라지는데 이것이 새 일에 맞게 근육이 다듬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걸음마를 가르치시면 우리는 불평하며 온갖 앓은 소리를 다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영적인 갓난아기의 불평-‘똑같은 것만 계속 가르쳐 주세요. 통증이 따르는 진리는 빼놓고 그저 단순한 복음만, 늘 믿어 오던 사실만 이야기해 주세요.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은 들으면 고통이 와요’ 라는 식의 불평-에서 구원하소서”(히 5:12참조). 물론 이것도 해야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구원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장성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성장의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3.구원의 열심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해 보면 이 말씀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는 말씀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길든 짧든 우리가 은혜 안에 있었던 기간을 돌이켜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가장 많이 자랐던 시기가 어느 시기인지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청명하고 평화로우며 형통하던 시기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역경의 시기, 마음 졸이던 시기, 불의의 사고로 깜짝 놀라던 시기, 이 육신의 장막이 막다른 골목으로 밀려들어가던 시기가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히 깨닫게 된 시기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자연계의 큰 재해, 즉 죽음, 질병, 사별 등을 통해서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사람이 전과 달라집니다. 평안하고 안전한 곳에만 있는 다면 ‘역경의 보화’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구원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나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우리를 장성한 남자, 장성한 여자로 만들어 갑니다.

성령의 열심은 정확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방향을 지시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방향을 모른다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는 싫어. 잘 알지도 못하잖니. 이야기 하지 말자”라고 말하고 맙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전에는 잘 알지 못하던, 성장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자꾸 대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 보름달만큼 완전하게 성장하십시오.

 

구원에는 훈련의 요소가 있다

“원방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 이방 땅 한복판에서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당백(一黨百)의 힘이 솟게 합니다. 이 말씀을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과 조심스럽게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만찬 행사는 가신 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기에 계신 는 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1.위험한 과신

과신이란, 우리 자신의 안전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자는 자신이 괜찮다고 과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번역이 말한, 성도들에게 닥치는 ‘매혹의 늪’입니다(벧후1:12-13참조). ‘자, 이젠 됐다. 여기에서 좀 쉬어야지’ 하는 기분이 든다면 우리는 위험한 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쉴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쉴 곳은 주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젠 됐습니다’ 하면서 과신의 늪에서 쉬게 될 때 우리는 저 아래로 떨어져서 사탄은 역시 사탄이고 나는 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명령

“원방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되새겨 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과 주님을 일치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수동적인 자세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장애물과 시련이 감옥 벽처럼 느껴질 때 나는 반듯이 드러누워 잠을 청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이것이 무슨 말라비틀어진 소리입니까. 이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영의 병처럼 고치기 힘든 병은 없습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나약이 아니라 - 신체적인 나약이라면 몇 번이고 거듭해서 고칠 수 있습니다 - 영적인 나약입니다. 영적인 나약은, “한번 은혜는 영원한 은혜니까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주님은 너무 좋으시기 때문에 나를 그냥 버려두시지 않을 거야” 라는 식의 말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병든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나태함을 얻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안락의자에 앉아서 끄덕끄덕 졸고 있으면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때립니다. “앉아 있지도 서 있지도 말고 가라!”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가 언제 영적으로 침체되고 유혹의 늪에 빠졌었는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의 자비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모든 것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산산조각이 나게 하셨지요.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두 발로 벌떡 일어서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내집 아니네”, “원방에서 여호와를 생각하며”라는 말들은 우리가 그분과 같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