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심판
(judgment)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사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그리스 도인에게 있어서 정신 건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상(vision) 가운데 받는 진리를 굳게 붙드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근본적인 진리의 한 부분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죄든지 성령이든지 아니면 죄에 관해서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상을 상실하면 영혼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결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주신 이상에 푹 젖게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 이상을 꼭 붙들려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저 힐금 보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라고 말했습니다. 한때 진리에 대한 이상을 받았지만 그 이상을 붙드는 데 실패한 사람을 보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심판은 여기에서 옵니다. 이것은 지적인 분별력이나 이상을 남에게 전달하는 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상을 꼭 붙들고자 노력함과 동시에 그 이상이 우리를 붙들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상으로 받은 위대한 진리가 있으면 그 안으로 깊숙이 계속해서 들어갑시다. 잠자리로 갈 때도 함께 가고, 아침에 일어 날 때 이 이상과 함께 일어납시다. 우리의 생각을 늘 그 이상에 붙들어 맵시다. 이렇게 할 때 달이 가고 해가 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양의 진리에 전문가가 되게 하십니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위기의 의미를 알자
“정죄는 이것이니.”
사람은 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소 차이가 있겠으나, 여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바람 부는 데로 물결치는 데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테스트를 받는 순간입니다. 위기는 좌측 우측으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입니다. 이때는 언제나 속 성품이 드러납니다. 만약 우리가 위기가 지난 다음 그 문제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지만 그때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엇이나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고 그 순간에는 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1. 심판의 대상 (막6:16)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헤롯의 경우 그의 위기는,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님을 전할 때 그 일로 인해서 닥쳐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드러날’ 때 헤롯은 놀라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이 위기로 인해서 헤롯은 그의 두려움에 떠는 양심을 그대로 노출했습니다. 헤롯은 사두개인이었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온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미신적인 공포에 사로잡혀서 “이건 요한, 내가 목 베어 죽인 요한이야. 그가 살아났어”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2. 죄책감 (막6: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은 이미 들은 바가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진리를 이야기해 주었을 때 그것을 귀담아 듣기도 했습니다― “달게 듣고 많은 일을 했습이라”(20절, 영어 개역 성경 난외주). 그렇지만 한 가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빛을 받았지만 그 빛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 헤롯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이었습니다.
3. 범죄의 기회 (막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교회 사역자들은 일반적으로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기막힌 기회, 다시 말해서 죄를 완성하기에 좋은 기회가 옵니다. 죄란 것은 본래부터 완성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초자연적인 능력의 닦달을 받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모든 죄의 완성은 바로 지옥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감상주의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종교 생활을 하고 성행을 쌓으며 계율에 얽매이기는 좋아하면서도 정작 잘못된 근본에 손을 대려고 하면 싫어합니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회개하고 죄도 고백하지만 성도들과 많이 접하다 보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에게 보여 주거나 자신들이 보기를 거부하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감상주의적인 허물을 벗어버리고 이와 같은 맹점을 바로 지적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이 세 가지는 위기가 올 때마다 매번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위기가 성품을 드러낼 뿐입니다.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늘 양심의 빛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게 살수는 없습니다. 성도의 삶의 특징은 단순함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은 위기의 순간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내가 네 입장이라면 나는 이렇게 이렇게 했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정작 우리가 남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위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본성이 갑자기 드러나게 만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서 평소에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느꼈었는데 평소에는 상처나 사업의 실패, 혹은 와병과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보니까 놀랍게도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아주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위기가 왔을 때 보니까 놀랍게도 비열하고 이기적이며 지독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언제나 심판입니다.
심판의 기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온 빛입니다. 누가 세상에 온 빛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신 분입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분명히 보는 것, 바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 따라서 편견이 없고 정에 끌리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아미엘)
아무리 좋은 성도라 하더라도 성령께서 이 심판 기준을 적용하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잠깐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원하고 얼마나 순종하고 싶어하는지 하나님은 아시지요? 그런데 그렇게 헌신하고 순종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 마땅한 기회를 만나지 못한 듯합니다.” 이런 변명이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고 이것은 우리의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을 나로 하여금 적용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준을 남에게 적용하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정말 빛에게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의 이기심은 마음을 흐리게 하여 주님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거하시듯이 우리도 빛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1.이방 세계의 심판 기준 (요1:9, 롬2:11-16, 마25:31-46)
심판 기준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방인에 대한 기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또 들어 볼 기회도 없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심판을 받습니까? 위의 본문들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기준을 잘 보여 줍니다. 이방인들의 심판 기준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질 수도 없는 빛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빛입니다. 그 빛은 ‘양심’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접촉이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우리가 수행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알 기회도 없었던 이방인들이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게 된다는 교리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나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기독교 세계의 심판 기준 (요3:18)
“저는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기독교 세계에 대한 심판의 기준은 그들이 이미 받은 빛이 아니라 마땅히 받았어야 하는 빛입니다. 기독교 세계 안에 있은 나라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알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서도 의식적으로 거부한 그 순간에 결정됩니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신자들에게 적용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신자들에 대한 심판 기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 기준입니다. 신자들에 대한 심판 기준은 우리 주님입니다.
3.교회의 심판 기준(엡4:11-13)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이 말씀은 신자 개개인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서는 성도들 개개인이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주셨으니.” 무슨 목적을 위해서 주셨습니까? 성도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많은 은사를 받았는지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즉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이 ‘은사들’하나 하나가 다 걸림돌이 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등 이 모든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단 하나,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점을 바로 깨닫는 사람이 의외로 적습니다. 구원을 받고 성화를 체험한 뒤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그 다음에는 그대로 멈추고 말아 결과적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 중단되어 버립니다.
선탠의 순간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의 선택은 시간계와 영원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 놓습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결정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 합니다. 우리의 느낌, 우리의 감동, 우리의 영감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할 것이니가’ 하는 그 결정이 우리를 세우기도 하고 망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 하셨는데 나는 이 심판의 결과를지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해야 할 시기가 조만간 닥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아니야, 나는 받아 들이지 않을 거야” 라고 하거나 “결정을 보류할 거야”라고 할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두가지 모두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어둠을 더 좋아함(마6:23)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곘느뇨.”
사람이 위기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 성향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본인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이 변화 되지 않은 자연적인 성향을 “‘어둠’ 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빛을 싫어하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2.자기 방향의 고집함 (막6:26-27)
“왕이 심히 긴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 오라 명하니.”
세례 요한은 헤롯왕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했습니다. 그때 헤롯은 하나님의 음성을 침묵시키기로 결정했으나 한동안 심히 괴로움을 겪었습니다(막6:16-18).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양심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23:8-9을 보면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음으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케 하라는 명령을 내렷고 그 음성은 잠잠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돛의 방향이 멸망으로 달려 가도록 맞추어진 것이니다. 헤롯의 삶은 쥐죽은 듯이 잠잠했고 정말 죽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선, 순결, 정직을 도무지 믿지 않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무시무시한 상태입니다. 성경은 이런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죄 없다 하지 않습니다.
마약 여러분이 한 가지 죄에 대해서 눈을 감고 더 이상 생각 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보거든 그 사람에게 가십시오. 가서 아무리 상처를 입고 아무리 괴로워하더라도 그 죄를 지적하고 끄집어내십시오. 절대로 봐주거나 동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 교회의 마음 문을 걸어 잠그는 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오늘날에는 너무나 적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목소리입니다.
3.심판의 선포(눅23: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여기에서 예수님이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신” 이유는 마가복음6:26-2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헤롯은 이미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앞에 서있지만 그에게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양심에 아무런 자극이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헤롯이 내린 이 결정처럼, “이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거야”라는 결정을 내린다면, 그때는 자기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잠잠하기 시작하는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잠잠하게 하는 일은 시간계에서도 심판이며 여원계에서도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입니다. “하나님ㅇ은 나를 떠나서… 대답지 아니하시기로”(삼상28:15). 이 말은 시간계 내에서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빛으로 와서 빛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에 대한 최종 심판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받은 빛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빛을 받는 것은 한낮일 수도 있고 한밤중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거나 믿은 지 얼마 안된 시기일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주 최근, 바로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지 자신이 정확히 알며 이것은 정말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이 모두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길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떤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 빛을 주셨지만 그 빛을 붙잡고 인정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그 방향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진리에 관해 분명한 이상을 주셨지만, 그 이상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그 이상은 곧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 다스리는 왕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딴 곳으로 간다면, 비록 그들이 성화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단계에 머물러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이상에 순종하는 대신 손쉬운 평범한 신앙생활을 선호 하며 그 단계에 남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자가 적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제발 이렇게 간청합니다. 이상을 주시면 절대로 그 이상에 불순종하는 태도를 취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단 하나의 목적밖에 없고 그 목적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