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연구
죄에 대한 연구
1.죄의 철학
(The Philosophy of Sin)
"모든 죄의 공통적인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의 이탈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이탈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보다 이기적인 마음이 정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욕망과 결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과 인간 정신의 최초 범죄가 공통적으로 지닌 속성이다.“
성경은 죄의 창시자를 말해주는 유일한 책입니다. 죄에 대한 경험적 지식과 지식적인 이해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부터 먼저 필요를 체험하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듯합니다. 그리고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 어떻게 충족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힘을 다 기울입니다. 죄를 깨달으면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지식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구원자를 찾다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마음속에는 큰 욕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셨는지 이해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을 무시합니다만 이 장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체험하고 나면 마음을 느슨하게 가지기 때문에 다시 돌이켜서 죄에 관해서, 구원에 관해서, 인간 생활 전체에 관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꼭 마지막에 가야 나타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좇아 해볼 것을 다 해보고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고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물의 영장으로 사고하는 한 하나님 없이도 잘합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으면, 근본적인 문제에 맞딱드리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하는 그자체로 만족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계에까지 내몰리고 나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고 하나님은 거기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낮은 차원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따분한 책입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언제나 성경이 유일한 책이 되고 하나님이 이 세상 내의 유일한 존재가 되십니다.
죄의 근원은 사탄(사14:12-15)
여기에서 살펴 보려는 것은 죄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고에는 그 기초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에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감사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의 무지를 밝히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물질 세계라는 꼭두각시 뒤에 숨어 있는 사탄을 보여 주시는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점에서 있어서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성경이 사탄에 관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사탄이란 존재는 언제나 물질적인 존재로 화신한 상태에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창3:15, 마16:23 참고) 우리 주님과 성령은 언제나 사람들 뒤에 있는 사탄을 보셨습니다. 이때 사탄은 시간계 안에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죄의 근원을 찾을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만, 우리는 성경이 죄의 진정한 속성과 죄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 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1. 죄의 창시자(12절)
성경은 죄의 창시자가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 다음가는 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반역의 순서(13절)
이 구절을 보면 반역한 순서가 나타나 있는데, 그 첫째는 순전히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반역입니다.
3. 하나님을 이기려고 함(14절)
둘째는 하나님과 겨루어 보겠다는 도전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 전에는 이 세가지 모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사탄과 죄에 대한 믿음을 비웃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원리, 즉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기 전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원리를 확인시켜 주는 증거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이 뭔가 찾아 헤매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성경은 유일한 책이 되고 소위 말하는 이 이론이 죄의 근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로 보이게 됩니다.
죄는 사람의 본성에 들어 있는 요소이며 그 창시자는 하나님 다음으로 힘이 센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사탄의 죄는 어렴풋하게 나타나지만 그 어렴풋한 윤곽은 마음대로 짓는 새까만 죄, 양심적인 죄,영적인 죄 등 모든 죄의 최고봉입니다. 그의 실수로 지은 것도 남의 꾀임에 빠져 지은 것도 아니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면서 고의로 지은 죄입니다. 우리가 이사실을 충분히 깨닫는 다면 사탄의 베일은 비닐처럼 투명한 베일이 되고 맙니다.
사탄의 첫번째 올무(창3:6-7)
사탄은 자신의 본래 목적을 철저하게 은폐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사탄의 의도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사탄은 첫 번째 올무를 본래 의도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떼어서 설치해 둡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시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신을 개발할 것을 요구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생명의 희생이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즉 아담은 자신의 자연 생명을 희생해서 그 생명이 영적인 생명으로 변화되도록 했어야 하는 것인데, 이 과정은 일련의 도덕적인 결단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바로 여기에 첫 번째 올무를 본 목적으로부터 멀리 떨여지게 설치해 놓고 자신이 무엇을 노리는지 전혀 보여 주지 않습니다.
1. 자연적 호기심에 오염되 영혼
6절에 보면 사탄은 하나님이 지으신자연 피조물의 일부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먼저 여자에게 이야기 합니다. 여자는 자연 상태의 인간 속성을 상징합니다. 조금도 의심할 줄 모르고 호의적이며 호기심 많은 심성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최초의 죄에서 죄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원래 나쁜길로 갈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방황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은 사람을 이 양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의도가 전혀 없지만 양처럼 방황합니다. 바로 여기에 사탄의 첫 번째 올무가 있습니다. 사탄은 멍청하고 우둔한 양과 가틍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사탄의 방법은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혼이 이미 자연적인 호기심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2.정(친밀함)이라는 올무(6절)
6절에 보니까 하와는 두 가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자신이 바라던 물건을 잘 알고 있었고 둘째, 남편과 절친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와는 그 열매을 보고 먹음직하게 느꼈고, 그것을 남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죄는 절대로 혼자 시작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사탄이 하와를 미혹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와가 자신이 하고 있는 잘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그도 먹은 지라”(창3: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자연적 본능이란 올무(7절)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신을 발전시키는 일에 동참하라고 요구 하셨습니다.다시 말해서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자연의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변모시켜야 했습니다. 자연 생명은 도덕적으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주님도 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허기를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허기를 느끼신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계셨을 때 무엇을 드셨더라면 이것은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욕이나 식욕을 느끼는 것, 이것은 다 죄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몸이나 식욕을 희생하라 하실 때 거절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사탄의 기초적인 첫 번째 올무는 자연적인 본능에 있습니다. 우리가 “약간의 호의나 호기심을 가지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잖아”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베일을 걷고 그 배후에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보게 해 주십니다. 그 힘은 한 가지 목적을 설정해 두고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멀리 떼어놓습니다.
인간적인 해결 방법(창3:1-7)
사탄은 자신의 본래 목적과 멀리 떨어진 곳에 올무를 설치해 두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의심할 줄 모르는하와는 사탄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지을때의 우리도 하와와 마찬가지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하와나 우리는 모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사탄은 즉시 첫 번째 올무를 던짐니다. 이 첫 번째 올무에 걸리고 나면 패망은 시간 문제입니다. 나머지는 식은죽 먹기 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우리의 자연 생명을 희생해야 하느데 이 원리가 깨어지고 나면 나머지는 그냥 진행됩니다.
1.하나님께 대한 의심(1절)
유혹에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사람의 속, 깊은 마음속이며 신체적인 행동은 마지막입니다.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씀하며 그 원인을 설명해 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두 존재가 하나님의 승인 없이 서로 결탁했습니다. 이 두 존재는 사탄이 된 천사와 아담인데 이것이 바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과정입니다.
우리가 만물의 영장으로 피상적인 생활에 만족한다면 성경은 하찮은 내용이 될 것입니다 (혹 이런 사람이 성경을 존중한다면 그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지 실제적으로 성경을 존중할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안을 들여다보게 되면, 마음을 시원하게 설명해 줄만큼 지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이 성경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죄 문제를 다룰 때 성경은, 우리 속에 상존 하는 하나님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의심으로 곧장 내려갑니다. 이것은 배후에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구속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바뀌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육신의 생각’이라 부르고, 또한 이것을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다 하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라고 말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모든 죄의 결정은 온 손에 피가 가득한 채 하나님께 덤비는 의식적인 반역입니다.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의식적인 반역은 아닙니다만, 인류 역사를 통해서 역사하며 궁극에 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드러납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죄의 결정이 아니라 모든 죄의 바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으면 거기에는 늘 첫 번째 죄의 특성,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참으로…”(창3:1-7)라고 하던 의심의 원리, 의심의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사탄이 우리 속에 넣어 준 의심입니다. 일단, 이 의심이 사람에게 침투하게 되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궁극적인 멸망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심은 강둑의 틈새와 같아서 홍수가 몰아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탄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만 사용한 특별한 방밥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이것은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사탄은 첫 번째 범좌에서처럼 사람의 지성,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의심을 집어 넣는 방법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보다 우리 자신의 결백을 신뢰하고 그서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백과 예수님의 말씀이 상반될 대 우리의 결백을 신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하소 말씀하시는데 그 뒤에 이어 나오는 목록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뭐라구요? 이건 말도 안됩니다. 내마음속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어요. 나는 결백하단 말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러한 우리의 결백이 허상이며사람 마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깨달을 때가 올 것입니다.
2.사람의 육욕(5절)
일단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 공의에 대한 의심이 마음속에 침투하도록 내버려두면 다음에는 육욕의 홍수가 밀려들어 옵니다. 여기에서 ‘육욕’이란 생명을 지탱하는 힘을 자연 환경에서 찾으려는 노력, 이기적인 목적에 이끌려 가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육욕이라 하면 흔히 깜짝 놀랄 정도로 끔찍하고 충격적인 죄를 생각하지만 이말에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포함됩니다. 육욕이란 말은 얇은 구름과 같습니다. 이서은 엄청나게 육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일 수 있습니다. “나한테 소원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착해지고 구원을 받고 성화되는 것이야. 이것이 나 자신의 특별한 목표야”라고 소원조차도 육욕에 의한 것일 때가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들어오도록 허용하고 나면 뒤따라오는 육욕의 홍수은ㄴ 한이 없습니다. 욕망도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현오스러울 정도의 육적인 죄를 가리키는데 사용하지만 성경은 이 말을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합니다.
욕망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나는 당장 이것을 가져야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적인 욕구일 수도 있고 영적인 소유욕 일수도 있습니다.욕망이 황동하는 원리는 “나는 지금당장 이것을 가져야 해. 하나님은 너무 무관심하시기 때문에 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의 활동 원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며, 항상 이죄의 성향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눈여겨보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의 외적인 행동으로 속단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부도덕함이나 육적인 지저분함을 보시고 경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점잖은 양반들이 그런 꼴을 보면 기겁을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이런 생활의 근원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내적인 욕망과 외적인 환경ㅇ르 잘 조화시켜 나가려는 비상한 재주에서 나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혼이란 단순히 사람의 영의 자기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의 영은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아직 혼이 명료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혼’은 거의 언제나 육적인 본능을 가리키며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영을 표현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궁극에서 나타나신다(괴테).”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만 나타나신다고 한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만약 우리가 피상적인 생활에 만족한다면 성경의 글은 모두 바보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서 건져내셨는지 깨닫고 나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정의를 그대로 수용하게 됩니다. 성경외에는 다른 합당한 설명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경을 떠나서 죄를 설명하려는 사람을 보면 그저 불쌍한 생각만 들게 될 것입니다.
3.아담의 해결책(7절)
여기에서 우리는 죄를 해결하려는 아담의 개인적인 노력을 봅니다. 이노력은 간악합니다. ‘간악하다’는 말은 불의 부당한 왜곡을 의미하고, ‘개인’이란 한정된 핸동을 수행하는 전인(全人)을 말합니다. 의심이 먼저이고 다음은 육욕, 파멸은 제일 끝입니다. 만약 죄가 초자연적인 창시자에 의한 근본적인 왜곡이라고 한다면, 구원은 초자연적인 창조주에의한 근본적인 교정입니다.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 구원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개탄스런운 일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실 수 있는 일이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반작용 정도에 그치고 만다면, 그리스도에게 걸맞는 이름은 ‘구세주’가 아니라 ‘문화’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라 하는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구원할 자임이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그 일부만 알면, 또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수 있는 다른 원리에 대항하는 원리를 우리 속에 넣어 주는 정도라고만 생각하면,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일로 인해서 하나님을 욕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죄를 피상적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이것이 전부라면 구세주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죄의 실제에 직면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구원에 일원도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뛰어난 교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나, 또 우리의 체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원은 죄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유전(遺傳) 인자를 아직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바로 알고 죄를 바르게 생각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인간의 미미한 오류들을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작은 오류들은 인간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새로운 유전 인자를 주시기 위해, 다시 말해서 자신의 성품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 사람 속에 있는 사탄의 능력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와 맞불 을 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우리 속에 두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일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지체는 죄의 종이었고 지금도 우리는 과거와 동일한 몸, 동일한 식욕,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는데 여러분은 성도로서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지성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여러분은 성도로서 자신의 지성을 굴복시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실패한 일에 전부 성공하셨습니다. 사탄은 주님을 만날 때도 아담을 만나던 때와 똑같이 자신의 올무를 감추고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네가 만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사탄은 첫 번째 의심을 예수니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의심하기를 거부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심으로 자신의 자연 생명을 영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우리도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연 생명을 희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