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1 요한 복음 6장
패역-1
(Backsliding)
요한 복음 6장
유혹을 받을 가능성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그때부터 사람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아담과 우리 주님의 경우가 그 증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중생이 유혹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시켜 준다는 사실입니다. 유혹의 가능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휴식에 대한 욕구
“특별한 관점에서 자신을 유지하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다 보면 지쳐서 편견에 빠진다.”
사람에게는 휴식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자연 법칙에 속하지만, 도덕적이로나 영적으로 볼때는 부도덕하고 세속적인 생활로 빠지게 합니다.
1. 휴식에 대한 욕구(10-15절)
진정한 영적 생명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휴식을 원하면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축복에만 안주하며 쉬려고 하면 졸음병에 걸립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이 연합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축복에 안주하려고 하면 패역이 시작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했던 사람들과 같습니까?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까? 이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들이 일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자신을 먹여 살릴수 있으리란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인간 본성에 감추어져 있는, 휴식을 원하는 욕구를 그대로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만약 이 욕구를 다스리지 않고 그대로 버려 둔다면 우리의 성품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2. 영적인 생활의 부패(30-31)
‘진실(reality)'이란 하나님과의 완전한 조화를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하나님과의 축복, 예를 들어 성화와 같은 축복을 삶의 최종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영적인 생활의 부패가 시작됩니다. 성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신비한 생활인,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하며,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에서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가 이것들을 알고 또 진리 안에 굳게 서있지만 깨어 있지 못하면 이것을 최종 목적지로 착각할 위험이 있습니다.(벧후1:12-13) 우리는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고 있습니까? 성령은 지금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영혼들을 일깨워 그들이 실재 중의 실재, 곧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자리로 나아가기까지 쉬지 못하게 하십니다.
패역은 아주 은밀한 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 마십시오. 우리는 패역에 빠질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령을 의지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신체적인 휴식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영적인 휴식도 꼭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영적인 축복에 안주하려고 하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미 받은 것에 만족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앉아 있으면 그때부터 영적인 생명의 죽음이 서서히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 보여 주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리니”(엡4:13). 완전한 성화의 열매의 안식은, 나태한 안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인 실제적인 안식입니다.
3. 영적인 멸망(34-35)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이 말씀들이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세속적인 마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예수님이 계속 경계하시는 영적인 휴식을 꿈꿀 때 세속적인 마음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다고 하면서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올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순종하도록 하는 대신 예수님과의 말씀과 다른 우리 자신의 꿈과 야망을 키우는 것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사탄의 유혹에 빠져 옆기로 빠지는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서 잘못됩니다. 휴식의 욕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영적인 재난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것이 바로 성도의 자세입니다.
되돌아 가려는 욕구
“삶 자체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의 시험대이며, 이 말할 수 없는 방황들은 영혼의 유혹이 아닌가.”
유기적인 생명체 안에는 언제나 원형으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화초밭을 잘 가꾸어 놓고 한 일이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원래 그대로 되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도 이기적인 원형으로 돌아가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롬8:29)
1.마음에 걸리는 것(52절)
마음이 상하려면 쌍반간 어느 정도 성질이 비슷해야 합니다. 서로 아예 다르면 부딫칠 일도 없으니까요.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마음 상할 일도 없지만 신자들은 이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마11:6참고) 사탄은 우리에게 다가와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하시겟니,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식으로 인도하시겠니, 절대 그렇지 않아!”하며 소근대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하시고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이 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2.변절(60-61절)
변절이란 우리가 누구에게 헌신한다 해놓고 상대의 말이 우리 생각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에게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인 처험에도 이런 단계가 있는데 성화 이전이나 이후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변절이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해설하면서 우리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 때, 우리가“아니야,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런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어.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하나님이 보여 주신 계시 일리가 없어. 이건 확실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서 변절이 싹틈니다. 언제나 마음에 걸림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변절이 싹틈니다. 마음에 걸림이 생기면 그럴까 하면서 눈을 감고 내 편견에 비추어 거슬리지 않는 것 외에는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변절입니다. 예를 들어 진리에 대해서 마음 문을 닫아 걸고 자신의 몸에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나 마음이 날마다 새로워 져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성도가 있다면 이런 성도들은 영적인 침체에 빠질 뿐 아니라 변절하게 됩니다.
3.배신(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자신의 뜻으로 되돌아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고집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불순종 일 뿐 아니라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특정한 진리에 대해 가장 심하게 대항하는 적대 행위입니다. 진리에 대해 가장 심하게 대항하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6:4-6을 보면 이 점이 아주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도인 우리가 아예불순종 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다면 우리의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성화 이후라 하더라도 “이제 나는 나 좋을 대로 해도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도 불순종할 수 있다는 이 가능성은 순종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그릇된 성향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에 순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릇된 성향에서 벗어나면 그때야 비로소 순종할 자유도 불순종할 자유도 생기게 되며, 유혹도 가능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사실이 값어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오히려 유혹이 필요합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예를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과스럽게 하신 사람들은 새기 있고 깨어 있는 남녀 성도들, 즉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철저히 헌신하는 성도들입니다.
패역-2
반항욕구
“독립성은 개인 생활의 필수조건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유혹이다.”
영적인 반항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주인에게로 가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락과 반항을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속에 있는 타락의 경향중에서 소극적인 면만 다루었는데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면을 보려합니다. 적극적인 면이란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 나는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현재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토보하든지 하는데, 이 사람은 이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에는 반역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단순한 되보가 아니라 다른 주인 밑에 도장을 찍고 거기로 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명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운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쌩수의 근원을 버린 것은 패역이 아니라 단순한 타락이지만 패역은 바로 이 두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입니다. 패역에 관계된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기 위해 도덕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예를 드시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도 끔찍합니다.(렘3:8참고)
1. 수근거림(41,52절)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진리에 반항하는 힘이 발동합니다. 이것은 그저 진리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그만둔다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설득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상으로 받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아, 이것은 나한테 해당되는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 속에 들어 있는 자연스런 경향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우리 속에는 누구에게나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일을 우리에게 실천 가능한 일이라고 보여 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부터 마귀에게 기회를 주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목표에 도달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예수의 생명이 없이 노력합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인 결과는 실패뿐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시고 주신 일을 우리가 이루지 못하면,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모독입니다. 주님은 맛 잃은 소금에 관한 예화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삶에게 밟힐 뿐이니라.” 짠맛을 잃은 소금은 물리적인 세계에 아주 형편없는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성도의 맛을 상실한 성도는 영적인 세계에 전염병 같은 악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성도의 맛을 상실하고 맙니다. 눈을 떼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온갖 오류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 있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그분의 자녀로서 늘 순전하고 유쾌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이런 일을 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보다 더 힘있는 그 아버지를 의지하며 그일을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탕자의 운명에 처할 위기를 맞게 됩니다.
2.마음에 걸림(61절)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고 또한 몇 달 혹은 몇 년 전부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있었으면서 순종ㅇ르 통해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곧 하나님의 기준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줄 알면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달하지 못한 그 기준을 욕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속에서 역사하시지 못하게 거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방해하는 요소로는 두 가지자 있습니다. 첫째는 ‘과시욕 입니다. ’과시욕이란 말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으려 하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어쩔수 없이 예수그리스도의 기준을 낮추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둘째는 동정심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온 동정이 아니라 그저 자기들 끼리 하는 동정이라면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을 욕하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것은 아주 경건하게 “어휴, 저는 정말 도무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완전한 성화를 설교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물론 저도 그 수준에 올라 있지 못하지요“라고 겸손하게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사람이 얼핏 듣기에 아름답고 겸손한 말일느지 모르나 하나님 눈에는 그분의 기준을 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기준을 아무리 부드럽고 유려한 말로 선포한다 하더라도 “아니야. 난 절대로 내가 그 기준에 도달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없어”라고 하면서 그 기준을 일소해 버린다면 이것은 무례한 태도입니다. 이런 말은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그 기준에 오려 놓을 능력이 없다. 이것은 내가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실천 가능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정하지 마십시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엄하시거나 잔인한 분이 아닌 부드럽고 동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사람들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속에 움직이려 하지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움직일 마음만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즈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3.유다의 배신(70-71절)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우신 기준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유다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신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유다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단정하는 일은 쉽습니다만, 유다는 우리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 주는 하난의 표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사도 바울 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 안될 것은 유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진리 입니다. 그러나 이 암흑 같은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안전한 포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 있습니다. 성경은 “괴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의 결말을 지금 보다 어떻게 더 끔찍하게 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경고를 지금보다 어떻게 더 분명히 하실 수 있습니까? 잘못된 길에는 이미 경고판이 수도 없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음 편하게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길을 가는 우리는 “내게로 오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락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큰 위로와 평안을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