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자료

[스크랩] 로마서 주석 전체

정광고무 2012. 6. 14. 08:18

로마서성경주석. 존 칼빈. 성서원.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편역. 1998.

p.21

범사에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드리는 헌사

......우리 모두는 간단 명료한 것이 주석가의 특별한 미덕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석가가 주해하기 시작한 그 저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과업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그의 독자들을 저자의 뜻하는 바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그는 그의 표적을 놓친 것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 길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현재 신학의 대의를 이 종류의 과업으로 신장시키고자 계획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알기 쉬운 주석을 할뿐만 아니라, 길고 장황한 주석을 피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이 머무 지루하지 않도록 연구하고 노력해 주는 것입니다......저 자신은 간략한 것을 좋아하오며,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동요될 수가 없습니다......반면에 우리가 너무도 짧고 간략하다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그들 또한 우리를 용서해 줄 것입니다.

p.22

.......이 서신을 다루고 있는 많은 고대 주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저자들에 의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들의 수고를 아낌없이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만일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 정체를 이해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멜랑톤은.....그의 유일한 목표는, 그러나 특별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요점들만을 다루는 데 있었던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지만, 보통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일부러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메랑톤의 뒤를 이어불링거가 나왔습니다. 그는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불링거는 교리를 쉽게 표현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널리 칭송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p.23)뷰우처가 있습니다. 그가 그의 저서들을 출판함으로써 로마서 주석 문제에 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의 심오한 학문, 풍부한 지식, 예리한 지성, 광범한 독서, 그리고 현금의 아무 사람도 거의 능가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여러 가지 뛰어난 점들 외에도, 이 학자는, 우리가 아는대로,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월등합니다. 우리 세대에 아무 사람도 그 분만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정확하거나 근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에게 특별한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옵기는, 지금 사람들이 한 일 중에 완벽하게 되어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전 사람들의 업적을 다시 가다듬고, 치장하고 또는 보충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멜랑톤은 주요한 요점들만을 설명함으로써 그가 의도했던 바를 달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주요한 과제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연구를 요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등한시 했습니다......

뷰우청의 주석은 너무나 장황하여서 일에 쫓기는 사람들은 읽어 볼 염두도 못냅니다. 또한 너무도 심오하기 때문에 이해력과 주의력이 뒤진 독자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한편으로 멜랑톤은 세부적인 것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하고자 계획한 주석은 전혀 경쟁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p.24)하지만, 이 저자들 상호간에 흔히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어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가장 좋은 해석을 가리켜 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판단을 내리는 고통을 덜어 주게 된다면, 저는 이 과업을 착수했던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자신의 판단은 다소 산만하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모든 문제점을 아주 간략하게 다룸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다른 저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본서에서 읽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게 하고자 결심했었습니다......저는 때때로 다른 저자들과 견해를 달리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몇가지 점에서 그들과 다릅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한 분별력을 가지고 적절하게 주해하지 않는다면, 말씀의 위엄이 다소 손상됩니다......

그러므로, 장난하듯이 하여 합당한 주의를 기울임이 없이 성경의 뜻을 변질시키는 것은 외람되고 참람한 짓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일찍이 이것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논함에 있어서 경건과 절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코 만일 공통의 의견 일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계속적으로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p.25)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첫째로 우리를 계속하여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의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만 아니라고 한다면, 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 구절들의 해석에 관해 영구불변의 일치된 견해를 우리 가운데서 금세에 기대하여서는 안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 백성들의 마음이 일치되는 것을 소원하신 경건에 대한 교훈들에 있어서는 우리가 함부로 하여서는 안됩니다. 저의 독자들께서는 제가 이 양편을 다 연구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539,10,18

스트라스 부르그에서

존 칼빈.

로마서의 주제

p.26

서신 전체가 아주 체계적이기 때문에 서두 자체마저도 기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것으로부터 복음을 소개하는 데로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그는 전체 서신의 주요한 주제를 다룬다. 그 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그가 5장까지 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들(1-5장)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납됨”.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졸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만심이 깨져 그들이 낭패당하기까지는, 그들은 믿음의 의가 그들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된 의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추어 주며 속이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이 강하게 느끼기까지는(p.27), 그들은 욕정의 쾌락에 아주 도취되고, 무사 안일한 생활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금방 잠에서 꺠어나 의를 구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 가지 것을 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사악함을 확신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 가지고 그들을 졸음에서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

첫쨰로 그는 세계 창조때부터 온 인류를 그들의 배은망덕을 인하여 정죄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탁월한 창조 사역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는데도 창조주이신 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인정하게 되는 때에도, 그들은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위엄을 높여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허망하여져 그의 위엄을 더럽히고 손상시킨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이 불경건죄로 비난한다. 그런데 이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 중에 가장 가증스런 죄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디서나 범하기 쉬운 더럽고 가동할 죄행들을 바울은 기록한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분명한 논증이다. 왜냐하면 이 죄행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들이요,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어떤 이방인들은 그들의 내면의 사악함을 외형적인 거룩의 외투를 가지고 가리웠다. 그리고 이 죄행들을 인하여서는 결코 정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정죄는 면제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위장된 성결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이 거룩의 가면이 자칭 성자들로 행세하는 사람들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숨은 욕망까지도 보실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도는 그의 강화에 구분을 짓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따로 세운다.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율법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그들을 고발했고도 남는다고 그는 말한다. 유대인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것인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그들에게 바울 사도가 강력하게 탄원한 악함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입으로 이미 그들에 대해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만들어 낼 수도 있었던 예(p.28)상된 반대를 미리 막고 있다. 그 반대는, 만일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거룩의 표시이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먼저, 그들이 언약을 소유한 것이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게 해 준 것이 없음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불충실로 인하여 그것을 상실해버렸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이 제거될까 염려하여, 그는 또한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약간의 특권을 누리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그들 자신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특권을 들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인들임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여기서 율법의 효용을 약간 언급한다.

사도는 인류에게서 그들 자신의 선과 그들이 우쭐대는 자기 의에 대한 신뢰를 분명하게 박탈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성을 들어 그들을 낭패시킨 연후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그의 이전의 명제에로 이제 되돌아 온다.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되는 가를 그는 설명한다.

그는 3장의 끝 부분에서 이것에다 훌륭한 결론을 덧붙인다. 이는 인간의 자만심의 만행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 큰 은총을 그들 자신의 민족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도록, 그는 그것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4장에서 그가 아주 분명한 것으로 단언하고, 그러기에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한 실례를 들어 그는 논증한다. 아브라함이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는 한 유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 연후에, 우리가 바로 그 길을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 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믿음의 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 행위의 의가 물러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덧붙인다. 다윗은 인간의 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행위에게서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을(p.29) 그는 뺴앗아버리고 있다. 즉,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로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다윗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그가 간단하게 다루었었던 주제를 보다 충분하게 다룬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이방인들보다 높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이것은 이 축복이 둘 다에게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 주제를 보다 충분히 다룬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그가 의를 얻었다고 증거한다. 바울은 이 문구에서 할례의 효용에 관해 몇마디를 언급할 기회를 갖는다. 이렇게 한 연후에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선(善)에만 달려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약속은 성취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점에 있어서 자기의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로 돌렸던 아브라함의 본을 우리는 따라야 한다. 4장의 끝 부분에서 유사점을 가진 두 가지 것들을 비교한다. 이는 그가 인용한 실례를 보다 넓게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5장은 믿음의 의의 열매와 결과들을 다룬다. 그러나 그가 앞서 말했던 바를 대체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요점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께 화목된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풍성하게 그의 사랑을 길 잃은 죄인들에게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바울은 a mairi 논증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죄와 자유로운 의, 그리스도와 아담, 사망과 생명, 그리고 율법과 은혜를 비교시킨다. 이로써 우리의 허물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에 의하여 삼킨 바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성화에 대해 그는 논한다. 육체가 이 은혜의 맛을 조금밖에 보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마치 이제는 은혜가 끝나버린 것처럼, 그것의 악덕과 욕망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탐닉하기가 십중팔구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여기서 성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 안에 의를 우리가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례를 들어 그의 논증을 펴고 있다. 이 세례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제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p.30)통하여 일으킴을 받아 새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거듭남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근거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한다. 이러한 성결과 거룩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자유를 얻어 죄를 범하려고 하는 육체의 불경건한 방종을 제쳐 버리고, 죄의 왕국에서 의의 왕국으로 이적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져야 한다. 바울은 또한 간략하게 율법의 폐기를 언급한다. 이 율법 안에서 신약이 그 빛을 비추이고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죄사함과 더불어 신약에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7장에서 그는 율법의 효용에 관하여 공명정대하게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앞서 다른 주제를 논하면서 이것을 언급했던 바가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율법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를 정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논증으로 인하여 율법이 비난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그는 주장한다.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주어졌던 율법이 사망의 수단으로 둔갑한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동시에 어떻게 율법이 죄를 더하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죽을 육신의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한 경험하게 되는 영과 육의 갈등을 기술한다. 율법을 순종하는 데서 신자들을 계속적으로 빗나가게 하려고 하는 탐욕의 찌거기들을 신자들은 가지고 있다.

8장에는 많은 위로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신자들의 양심이 공포에 질리지 않게 하며, 또는 바울이 앞서 고발했던 바 있던 불순종이나 불완전한 순종에 대해서 신자들이 깨달았을 때에 낙담치 않게 한다. 경건치 못한 자들이 이것을 근거로 하여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성령이 풍성하게 거하시는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이 은총이 임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두가지의 진리들을 설명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죄 짐에 무겁게 눌려있을지라도 위험이나 정죄같은 것을 초월한다. 다음으로, 육신 가운데 남아 있는 자들이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역사를 맛보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들은 아무도 이 큰 축복에 참여하지를 못한다. 이 두가지의 진리들을 밝히고 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바울이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의심과 공포를 몰아내 버리시기 때문이다. (p.31)그는 또한 예견되는 반대들을 대비하여 영생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우리가 금생에서 당하는 현재의 고통들로 말미암아 저지당하거나 방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은 그러한 시련들에 의해서 증진된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탁월성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모든 환난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경우를 들어 확증한다. 그리스도는 맏아들이시요,하나님의 집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이기에, 그는 그가 사단의 세력과 궤계를 감격스럽게 이겨낸 장엄한 찬양을 노래함으로 결론을 짓고 있다.

언약의 우두머리 보관자들이요, 상속자들이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보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게 고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을 성취하는 것을 같잖게 여긴 아브라함의 씨에게서 그 언약이 제거되었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약속된 메시아가 아니었거나 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이 거부 행위가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9장의 처음 부분에서 이러한 그릇된 오해를 해소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자기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악의를 가지고 말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보다 뛰어나게 해준 그 구별들을 은혜스럽게 언급하면서, 점진적으로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범한 과실을 제거해야 하는 자신의 직무를 소개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여 육신의 자녀들 모두가 그의 씨로 간주되어 언약의 은혜에 동참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반대로, 만일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에 이르게 되면, 그들 또한 그의 자녀들이 된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이 사실에 대한 실례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선택을 다룬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있기 때문에, 선택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은 헛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유기가 있다. 이 유기의 정당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최고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다. 9장의 끝 부분에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이나 유대인들의 유기가 모두 선지서들에 증거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10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간증함으로 말을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 없이 신뢰하는 것이 그들의 멸망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는 율법이 우리를 믿음(p.32)의 의에로 인도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율법을 핑계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덧붙이기를, 이 의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에게 구별이 없이 주어졌으나, 주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깨우쳐 준 사람들만이 그것을 받는다고 말한다. 비록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이방인들이 이 축복을 받았지만, 이것 또한 모세와 이사야에 의해서 예언되었다는 것을 그는 밝힌다. 모세는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예언하였고,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와 다른 민족들 간에 어떤 구분을 두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이 문제를 답함에 있어서,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사역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제한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이는 선택이 흔히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전에 엘리야는 종교가 이스라엘에서 멸절되었다고 생각하여 오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칠천명이 아직도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복음을 적대시하는 많은 수의 불신자들을 인하여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남아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경계하기를 , 그들의 입양을 자랑함에 있어서 그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경계하기를, 그들의 입양을 자랑함에 있어서 도에 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한 것처럼 그들을 물리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입양된 이방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받아 주셨다는 점에서만 유대인들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더욱 더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에게서 전적으로 거두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침내는 이방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로 시기나게 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그 자신에게로 모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오는 세장은 권면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각 장의 내용은 다르다. 12장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들을 담고 잇다. 13장은 대부분 위정자들의 권위를 다루고 있다. 공권의 붕괴가 없이는 기독교인의 아무 자유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약간의 성급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교회에게 사랑의 의무외에는 다른 어떤 의무를 지우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이 복종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밝힌다. 이렇게 한 연후에 그가 아직껏 언급한 바 없었던 우리의 생활의 규제를 위한 명령들을 그는 덧붙인다.

(p.33)14장에서 그는 그 당시에 특별히 필요했던 권면의 말씀을 주고 있다. 그 당시 완고한 미신으로 인하여 모세의 예식들을 꼭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예식들을 등한시하는 것이 가장 무겁고 범죄한 것으로 여겨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이 예식들의 폐기를 확신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 미신을 산산조각내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미신적인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 양측은 모두 도에 지나침으로써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상대방이 하나님의 율법을 경멸하고 잇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들을 멸시하였고, 후자는 전자의 단순성을 분별없이 조롱하였다. 그래서, 사도는 양편에서 온건한 분별력을 갖도록 권하고, 전자에게는 경멸과 욕설을 삼가고, 후자에게는 지나친 무례를 삼갈 것을 명령한다. 동시에 기독교인의 자유를 사용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을 그는 지시한다. 그 방법과 사랑과 덕을 세우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행사토록 하는 것이다. 그 방법과 사랑과 덕을 세우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행사토록 하는 것이다. 그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말도록 금함으로써 그들을 그가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5장은 그의 전체 주제-강한 자는 약한 자를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에 대한 결론으로서 그의 일반적인 논증을 반복함으로 시작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계속적으로 모세의 예식에 대해 논증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교만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들 간의 모든 시기심을 해결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이 은혜에만 그들은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에 대한 모든 교만한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소망과 동일한 기업으로 결합되어야 하며 서로를 성심성의껏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바울은 그의 교훈에 대해 큰 권위를 확보해 준 그의 사도권을 천거하기 위해 지엽으로 흘러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회를 포착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가 교사의 직분을 맡은 것으로 생각하고 잇다는 자기의 소신을 확신있게 피력하였다. 그는 또한 앞서 본 서신의 초두에서 그가 말했던 대로, 비록 지금까지 그들에게 가고자 한 것이 여러번 막혔지만, 그가 이렇게 가고자 한 몇가지 이유들을 그들에게 말한다. 그는 현재 왜 가는 길이 막혔는가에 대해 설명한다. 그 이유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궁핍한 것을 구제하기 위해서 주었던 연보를 예루살렘에 가지고 가는 책임을 그 교회들이 바울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p.34)마지막 장은 거의 전부가 안부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여기 저기에 몇 가지의 좋은 명령들이 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장은 주목할 만한 기도로 결론 맺는다.

제 1 장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좋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7)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p.35.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교훈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가 자신에게 붙인 칭호들이다.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칭호를 붙인다. 첫째는, 사도직에 대한 그의 소명을 주장함으로써, 둘쨰는, 이 소명이 로마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선언함으로써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사도가 된 자’로 여김을 받는 것과 그가 로마 교회를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자로 알려지는 것은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종이요 부르심을 받아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우연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한다. 그런 다음에 이 말에 이어서 그는 바로 그가 “택정함을 입었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많은 사도들 중에 단지 하나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특별하게 택하신 사도이었다고 하는 그의 주장을 강화한다......(p.36)그러나, 사도라는 명칭을 주장하므로 해서, 그는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있다. 그러나 사도직을 찬탈하여 사칭하는 자는 아무도 사도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와 같이 그 문구의 의미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평범한 종이 아니였고, 그 자신의 주제 넘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임명된 사도이었다는 것이다. 뒤이어 그의 사도직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맡은 바 직무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서술하고 있는 이 소명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보고서, 택정을 해석하여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구별된 것(갈 1:15), 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택(누가에 의해 언급됨)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과 나는 견해를 같이 하지 않는다. 바울의 유일한 자랑은 그의 소명의 장본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가 이 명예를 스스로 외람되게 사칭하고 있었다고는 전혀 의심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말씀의 사역에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주목되어야 한다. 말씀의 사역은 특별한 소명을 요구한다. 자신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명없이 직분을 맡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종'이라는 단어는 단지 목사의 뜻만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 단어가 하나의 직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p.37.

...... 바울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었다고 결론을 내린 오리겐이 훨씬 더 정확한 듯하다. 사울이라는 가족명은 그의 종교와 혈통에 대한 표시로서 그의 부모들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었고, 한편 바울이라는 별명은 그의 로마 시민권의 증거로서 그에게 덧붙여졌던 것으로 보인다.......바울이라는 이름을 그는 일반적으로 서신들에서 사용하였다......로마 제국에서는 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2절.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p.38.

우리는 이 문구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가 있겠다. 이는 그것이 선지자들에 의해서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약속된 것이었다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선지자들이 복음을 약속했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마침내 육체를 입으시고 나타나셨을 때 복음이 계시되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약속을 복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오해하고 잇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성육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된 설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 자체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3절. 나셨고

p.39.

다윗에게 주어졌었던 약속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울을 그리스도께서 육신보다 더 나은 어떤 것-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취하여 가지고 오셨고, 다윗에게서 받지 않으신 어떤 것, 즉 바울이 곧 이어서 언급하는 신성의 영광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참 육신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셀베투스의 신성 모독적인 헛소리를 반박한 것이다. 셀베투스는 그리시도께서 창조되지 않은 세 가지의 요소들로 구성된 육신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4절.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하늘의 참 능력(a truly heavenly power) 곧 성령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행사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던 것이다......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본래 속하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의심할 (p.40)여지 없이 입증한 그 능력이 그 안에서 보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인정되셨다고 했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실제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육신의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타났다고 선언한 후에,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을 찬양한다......성경은 자주 하나님의 성령에게 여러 칭호들을 붙여준다. 이 칭호들은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 예컨대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요14:17)이라고 부르신다.......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가 굴복하였었던 죽음을 외부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령의 천적 역사에 의해서 이기고 승리하셨다.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은혜와 사도직을 구별함에 있어서 변환법(hypallage)을 사용하였다. 이는 값없이 주어진 사도직이거나 사도직의 은혜를 의미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그가 고귀한 직분에 임명된 것은 자기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에는 이 직분이 위험과 수고와 증오와 치욕만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의 눈에는 그 직분이 아무런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은총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은혜를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번역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뜻은 같다

그 이름을 위하여.

“이름”이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더 나은 듯하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요일3:23)......그러므로 ‘그의 이름을 위하여’는 ‘내가 그리스도의 인품을 알리도록’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모든 이방인 중에서.

그의 사도직이 모든 이방인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친다는 것을 그는 덧붙여 말한다. 바울은 6절에서 로마인들이 그의 목회 관할하에 있는 이방인들의 수 가운에 들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자신을 로마인들의 사도로 언급하고 있다. 다른 사도들 역시 온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특정 교회의 목자나 감독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도직의 일반적인 책임에 곁들여, 특별하게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도록 택정되었다. 그가 비두니아를 거쳐서 무시아에서 말씀을 전파하려고 애썼으나 성령에 의하여 허락되지 않았던 사실(행16:6-8)은 본 진술에 반대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8절에서 성령이 허락치 않은 목적은 바울의 사역을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아직 그곳이 추수할 때가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잠시 다른 곳으로 바울이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종케 하나니.

즉 모든 이방인들이 믿으므로 말미암아 순종하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명령을 우리가 받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부르심의 목적을 말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그의 직분을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나에게 맡겨진바 말씀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수행하는 것은 나의 의무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부르심을 너희가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말씀을 듣고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너희의 책임이다. (p.42) 우리가 이 말씀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은, 그 의도하는 바가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인 복음 전파를 불경건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완고하게 반항하여 그의 명령 전체를 반복시키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 본문에서 믿음은 순종으로 언급되어져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르시고, 그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고의적인 불순종의 근원은 불신앙인 것이다. 나는 순종케 보다는 믿어 순종케 라는 번역을 낫게 여긴다. 은유적으로 쓰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종케 라는 번역은 그것이 비록 사도행전 6장 7절에서 한 번 사용되기는 했어도 정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복음에 순종케 되는 방편임에 틀림없다.

7절. 모든 자에게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부성애에 전적으로 그 근원을 둔다. 제일 주요한 사실은 이것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다. 그의 사랑에 대한 유일무이한 이유는 그 자신의 순수한 선하심이다. 그의 부르심 또한 이것에 의존한다. 이 선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의 정하신 때에 그가 전에 자유롭게 선택하셨던 사람들에게 양자의 인을 치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가 있다. 비록 그들이 아무 자격도 없는 가련한 죄인들이지만, 주님께서 은총을 그들에게 베푸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고,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격려되어 거룩함을 갈망하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신실한 성도라고 볼 수 가 없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도록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축복인 것이다. 이것이 은혜가 의미하는 바다. 또한 우리의 제반사에 성공과 형통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오게 하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것은 평강이 의미하는 바다. 비록 모든 일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면, 우리의 바로 그 축복은 저주로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의 유일한 기초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8절 첫째는......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p.45.

우선 로마사람들의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암시하는 식으로 그들의 신앙을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감사하는 것이 유익을 얻은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신앙을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사도가 그의 축하 인사말을 항상 감사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때에 우리가 여기서 배우게 되는 교훈은 우리의 모든 축복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우리 또한 이러한 표현방식에 익숙해져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보다 민감하게 일깨워 하나님을 모든 같은 태도를 갖도록 해야 한다. 만일 사소한 축복들의 경우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면 믿음에 관하여는 더욱더 많이 그렇게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흔해 빠지거나 무분별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우기나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사도가 명령한 바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 가에 대한 한 실례를 여기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긍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고 찾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일컫고 있다. 이것은 신자의 특별한 권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특권을 신자에게만 부여하셨다. 이 내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는 약속 가운데 표현되어 있는 상호관계가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데서 바울이 드린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징표로써 그가 지닌 인품에 나는 그 구문의 말씀을 한정시키고 싶다. 이에 대한 예로,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참되고 충성스런 선지자이었다는 것을 선언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을 이사야의 하나님으로 불렀다(사37:4).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순결을 지켰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히 다니엘의 하나님으로 일컬어졌다(단6:20).

9절.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p.46.

바울은 그 맹세로 말미암아 하등의 그리스도의 계명을 위배함이 없이 그 지혜를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맹세들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재세례파들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도가 아니었고, 오히려 율법의 참된 준행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의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p.47)바울은 이에 대해 다른 곳에서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1:23)라고 말하고 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p.50.

나는 뷰우처와 견해를 같이하여, 헬라어 동사를 “안위하다”는 뜻보다는 오히려 “권면한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번역이 문맥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니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3-15)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p.53.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가 찾아 구하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그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높이고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이같이 확보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따라 우리는 복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p.54)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능력을 복음에서 발휘하시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 그가 말씀 전하는 직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그는 여기서 어떤 은밀한 계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입으로 말하여 전하는 말씀 전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것을 듣는 데서 물러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며 그의 구원의 손길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유효하게 역사하시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내적 교사로서 조명하실 때에만 효과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그것의 능력은 보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음이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사망의 맛을 내는 사실은 복음 자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함에 기인한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p.55.

이 말씀은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진술한 앞 구절에 대한 설명이요 확정이다. 우리가 만일 구원,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의를 구해야 한다. 이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될 수가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심으로 나타나는 그의 자비로 인한 그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의로와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복음 외의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외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 준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인 이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원인으로부터 결과까지를 논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화, 즉 그의 의의 전달이 얼마나 희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유의하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그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생각에 의로 간주되는 것이,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이 많은 예언들을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예언들 가운데서 성령은 시종 일관하여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그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설명한다. 나는 본문의 말씀들이 이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p.56)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리고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의 개념이 내게는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학자들이 이 ‘의’가 값없는 사죄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또한 중생의 은혜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값없이 화목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적당한 장소에서 보다 상세하고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다.

앞서 그가 사용한 바 있었던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표현 대신에 이제 그는 ‘믿음으로’라고 말한다. 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믿음에’를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고 우리의 지식이 향상됨에 따라,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증가되며, 그것을 우리가 소유한 것이 다소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맛볼때에는, 우리는 우리를 향하여 은혜스럽게 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참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볼 뿐이다. 우리는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더욱 많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가 우리를 향하여 더 가까이 오고 계시는 것 마냥, 보다 더 분명하고 친숙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별로 없고 난해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율법 아래 살았던 선조들을 우리와 비교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의 매일 매일의 진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미래 시제로 된 동사는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의 연속되는 영원성을 가리킨다......(p.57) 하박국이 이 문제를 명백하게 다루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값없는 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로 미루어 보아 이 구절이 우리의 본 주제에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우리는 그의 논증으로부터 믿음과 복음간의 상호관계를 또한 필연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까닭에, 그는 그러한 생명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본 서신의 첫 부분의 주요점을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주요점을 바울 자신의 말씀들에서는 찾아보지 못하였으나,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는 문맥으로부터 나중에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는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이 신성과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8-23)

18절.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p.57.

의가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서만이 주어진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반대되는 것들을 비교하여 바울은 이제 논증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모두가 정죄받는다는 것을 그가 논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복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그가 예증으로(p.58) 들고 있는 첫 번째 확증은, 세계의 구조와 그 구성 요소들의 가장 찬란한 질서를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는 데도, 그들의 의무를 이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그리고 비열하고 간악한 배은망덕의 죄가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아세베이아:불경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함의하고, (아디키아:불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부당하게 하나님에게서 그의 합당한 존귀를 박탈한 것을 의미한다......(p.59)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그것을 삭제하거나 덮어 감추는 것을 뜻한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막는 자들은 절도죄를 범한 것이 된다. ‘불의’로는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부당하게’를 의미한다.

19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그 하나님의 속성의 현현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우리들 모두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심령속에 새겨져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분명히 보여 알게되나니......

p.60.

하나님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위엄이 그의 모든 작품들과 그의 모든 피조물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로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분명하게 그들의 창조주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는 그의 히브리서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또는 반영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람들은 정죄 받는 것을 면할 구실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21절.하나님을 알되.

p.61.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p.62.

그들의 불의가 이러한 것이었기에, 참 지식의 씨는 그것이 자라서 성숙하기도 전에 그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질식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식,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24-32)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p.66.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 하고서 여러 모양의 형상들을 예배하는 것은 구실을 붙이기 위한 허무맹랑한 핑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를 인정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여기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제 2 장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1-2)

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이 책망은

p.71.

외적으로 거룩한 체하여 주의를 끌고, 자기네들이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렸기나 한 듯이, 그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었다고 생각하는 위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2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p.72.

‘진리대로’라는 문구는 히브리적인 표현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진리’가 흔히 마음의 내면의 순결성을 뜻하며, 그래서 명백한 거짓뿐만 아니라 외관상으로 선하게 보이는 행위에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3-10).

4절. 혹 네가......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p.74.

사도 바울은 반대 논증에 의하여, 위선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그들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는 데 있어서 전혀 다른 계획, 즉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회심시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돈독하지 못한 경우에는, 외적 형통에서 오는 자신감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로부터 우리가 얻게 되는 결론은, 하나님께서 금생에서 목숨을 살려준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 큰 형벌을 임하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다른 사악한 짓에다 하나님의 부성적 초청을 거절한 죄를 더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p.75.

만일 어떤 사람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감동시켜 주지 않는 한 그의 변론은 소귀에다 경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경우에 우리 자신의 사악한 성품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경우에 우리 자신의 사악한 성품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촉구하여’로 번역하기보다는 ‘인도하여’라는 번역을 취한다. 이는 후자의 단어가 더 깊은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아 넣다보다는 손을 잡아 인도한다는 의미로 본다.

6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p.76.

버림받은 자의 사악함을 정당하게 보복하여 벌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되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결심하셨던 사람들을 다시금 성별(p.77)시키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을 빛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로를 보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은 본 문맥에서는 입증될 수가 없다. 본 절의 문맥은 선행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언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진가, 또는 그것들에 합당한 값어치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행위가 보상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공로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1-13).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p.79.

지금까지 바울은 온 인류가 죄가 있다는 것을 전체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따로 나누어서 비난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는 그들에게 그들 간의 어떤 차별도 없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방인들은 무지를 그들의 구실로 삼았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영예를 자랑했다. 바울은 전자에게서 그들이 구실을 붙여 회피하려고 한 그들의 기도를 제거하고, 후자에게서는 거짓되고 헛된 자랑을 제거하였다. 그러므로 온 인류는 두 계급으로 분류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분시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모두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이 차별로 인하여 이 두계급이 동일한 죄를 지은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가치나 명예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는 모든 외모에 대해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할 때, 그가 중히 여기시는 것은 마음의 순결, 즉 내적 순수성이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인 가문, 국적, 계급, 재산등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말은 다른 민족들 간에 차별을 두어 취급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p.80)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반대론이 제기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이 이중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성품에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아무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조건없이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무에서 부르시고 택하여 받아주시는 경우와,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우리에게 그의 은사들을 부어 주시고, 그가 우리 안에서 발견하시는 그의 아들의 형상을 인하여 은총을 베푸시어 받아주시는 경우를 들어서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13절.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바울은 유대인들이 내세울 수도 있었던 반대를 예상하고 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특출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의의 법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신4:1). 이 잘못된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율법을 듣는 것이나 아는 것이 의를 얻게 해 줄 만큼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이를(하나님의 규례와 법도)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18:5)는 말씀에 따라서 행함이 그 열매로 결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참고,롬10:5,갈3:12). 그러므로 (p.81)이 구절의 의미는,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율법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의가 행실이 완전한 데 있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주장할 목적으로 본 구절을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만인의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허무맹랑한 논증을 해결 짓기 위해서 칭의에 관한 장황한 논의를 여기서 그가 언급한 바 있었던 율법의 심판을 유대인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이 율법을 성취하지 않는 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며,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범하면 저주가 그들에게 당장 선언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완전한 절대 의가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까닭에, 다른 의를 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참으로, 본 구절에서 아무도 행위로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만일 율법을 성취하는 사람들만이 율법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고 하면, 아무도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아무도 율법을 성취했다고 자랑할 수 잇는 사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4-16)

14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p.81.

그는 이방인들이 핑계로 내세우는 무지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어떤 의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법률의 한계내에서 존속되지 않을 만큼 일반적인 모든 것을 반대하는 민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을 (p.82)받지 않고서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그것들을 (프롤레-프세이스)라고 일컬으며, 본성적으로 그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기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법이 있으며,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모세의 기록된 율법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지식을 결코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은 악과 덕을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자에 대해서는 그것을 벌하여 억제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권장하고, 그것을 좋게 여겨 상을 주어서 높인다. 바울은 본성을 기록된 율법과 대조시켜, 이방인들이 의에 대한 본성적인 빛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본성적인 빛이 유대인들이 가르침을 받는 율법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기에, 그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었던”것이다.

15절.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즉,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분별력과 판단력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분별력과 판단력에 의해서 그들은 정의와 불의, 정직과 부정직을 분간한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의지에 새겨져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구하며 열심히 추구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진리의 힘에 의하여 지배되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마땅히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데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서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종교의식들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이 절도와 간음을 악으로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하기나 한 것처럼, 본문에서 의지의 능력을 추론해 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성취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감정의 좌소가 아니라, 단지 이해력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는 신명기 29장 4절, “여호와께서 깨닫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와, 그리고 누가복음 24장25절,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말씀에서와 같다.

우리는 본문의 구절에서 율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 사람들에게 있다고 (p.83)다고 결론할 수는 없고, 다만 그들의 본성에 심어진 정의에 대한 약간의 씨가 있다고 결론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 말미암아 증명된다. 즉, 모든 이방인들은 한결같이 종교 의식들을 제정하며, 간음, 절도, 살인을 처벌하는 율법을 제정하고 상거래와 계약에 있어서 성실을 높이 평가하는 것등으로 보아 증명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간음, 절도, 살인이 죄악이며, 정직이 존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종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신들을 그들이 만들어 냈는가를 규명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하는 바게 돌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일천 명의 증인에 상당하는 그들 자신의 양심의 증거는 그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압력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한 행실을 한 줄로 생각할 때에는 내심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한다. 그런 까닭에 선한 양심은 최대의 극장이지만, 악한 양심은 가장 악질적인 처형자들이요, 어떤 원령(怨靈)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경건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는 이방 격언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확실한 본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그 율법은 어떤 행동은 성하여 다를 만한 가치가 있으나, 다른 어떤 것은 증오하여 피해야 한다는 것을 진술해 준다.

양심에 대한 바울의 학자다운 정의에 주목하라. 바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가 취한 행위의 바른 경로를 옹호해 주는 어떤 논증들이 있는 가 하면, 반면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유죄 선고하는 다른 논증들이 있다. 바울이 이들 비난 또는 옹호의 논증들을 주의 날에 관련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그 때에야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는 그것들이 금생에서 그것들의 기능을 성취함에 있어 항상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논증의 목적은 아무도 그 논증들을 중요하지 않다거나 지속적인 의미가 없는 것으로 멸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p.84)다. 전과 같이, 바울은 ‘그 날까지’라는 말보다 “그 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6절. 하나님이......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 길다란 묘사는 본문에 가장 적합하다. 바울은 자기네들의 도덕적 무감각의 은신처에 자신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깊은 곳에 지금은 전적으로 숨기워진 은밀한 생각들이 그 때에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내 복음이 이른 바와 같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단어들을 심판의 날에 적용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들도 있지만, 주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심판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본다.

20절.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한글 개역 성경에는 19절임)......

p.87.

“규모”라는 단어가 모형이란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튀폰;모형, 형식)을 사용치 않고, (모르포-신;외형)이란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사도는 그들의 교훈의 과장된 외형을 지적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과장된 외형은 흔히 ‘허식’이라고 일컬어진다.

22절.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p.88.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의 존엄성을 우상들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신사에 봉헌된 성물을 누구든지 약탈했을 경우에만 그것을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그들은 신사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종교의 전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다......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경고를 받는다. 첫째로, 우리가 율법의 일부만을 준행하고서 우쭐대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지 말 것이며, 둘째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불경건을 추방하고 일소하는 일은 힘쓰지 않으면서, 외적인 우상을 제거한 것으로 자랑삼지 말 것이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가 율벙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거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5-29)

25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p.90.

유대인들은 할례가 그 자체만으로도 의를 얻는 목적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 자신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논하면서, 다름과 같은 대답을 해준다. 즉, 만일 의를 얻은 이 혜택이 할례에서 기대된다고 한다면, 그 조건은 할례 받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라는 것을 자신이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완전을 요구한다. 우리의 세례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해질 수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례의 물만을 신뢰하고, 그리고 마치 세례의식 자체로부터 거룩을 얻었기나 한 것 마냥, 그가 의로와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반대하여 세례의 목적을 예증해야 한다. 세례란 주님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셔서 거룩함의 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세례가 우리에게 증거하고 인쳐주는 은혜와 약속이 이 경우에 언급되지 않을 것은, 세례의 헛된 그림자로 만족하고, 세례의 참된 중요성에 대해 주목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신학적인 논쟁말고 표적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 표적들에 속한 약속들의 효력과 성취들을 그 표적들과 관련시켜 생각한다는 것을 우리가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표적들의 성격에 알지 못하는 사려 없는 해석자들과 논쟁을 벌일 때, 그는 그 표적들의 참되고 고유한 성격에 대한 일체의 생략하고, 그의 모든 논(p.92)증을 그들의 거짓 해석에 집중시킨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의 다른 행위보다 할례를 예증으로 든 것을 보고서, 그가 단지 의식들에서만 의를 박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의해 반대하여 자기 자신들의 공로를 감히 내세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참된 선보다는 외적인 외적에 행함을 더 많이 자랑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크게 감동된 사람은 아무도 감히 그의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의를 얻으려고 애쓰면 쓸수록, 그가 그 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더욱 더 분명하게 분별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거룩한 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새인들에 관하여, 그들이 그렇게도 쉽게 자신들을 속이는 것에 대해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에 의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을 자랑하는 이 가련한 속임수 외에는 아무 것도 유대인들에게 허락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에게서 이 헛된 허식마저 제거해 버린다.

26절. 그런즉 무할례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바울의 논증은 매우 힘있다. 수단은 언제나 목적보다 열등하며, 그것보다 아래이다. 할례는 율법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열등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할례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 할례는 율법을 위하여 힘들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는 경우, 그는 만일 유대인이 율법을 범한 경우 무익한 할례를 받은 그 유대인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결국이 이로부터 나온다. 비록 그 무할례가 본성적으로는 부패되어 있다 해도,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화될 것이므로, 그에게 무할례는 할례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무할례’라는 단어가 하반절에서는 그 본래의 개념으로 취해져야 할 것이나, 상반절에서는 이방인들을 두고 한말이다. 이것은 좀 경멸적인 표현으로 사람을 물건 취급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율법 지키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는 것을 또한 덧붙여 말해 둔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의도는, 만일 율법을 지킨 이방인이 아무라도 발견될 수 있다고 하면, 그의 의는 의가 없는 유대인들의 할례보다 할례 없이는 훨씬 더 귀중할 것이라는 가정을 단지 내세워 보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어 나오는 말들인 본래 무할례자가......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p.93)이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실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는 본다.

29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바울이 덧붙인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의문’은 경건이 없는 외적 의식을 의미하고, ‘신령’은 이 의식의 취지를 의미하는데, 그 취지는 영적이다. 표적들과 의식들의 모든 중요성이 그것들의 목적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목적이 제거되게 되면, 의문만이 남게 되는 데, 그 의문 자체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바울이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경우,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p.94)사람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의문 곧 사문서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명령이 마음을 관통하는, 그것은 다소간 신령으로 변화된다. 예레미야 3장 33절에서, 주님께서 그의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새긴 후에, 그의 언약을 재가하고 세우리라고 그가 선언한 것과 같이, 여기에 옛 언약과 새 언약간의 차이에 대한 암시가 있다. 바울은 또한 다른 문맥(고후3:6)에서도 같은 취지를 의중에 두고 있었다. 고린도 후서3장 6절에서 율법을 복음과 바울이 비교하여, 율법‘의문’이라 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하는 것인데 반해서, 그는 복음‘영’이라 호칭하여 일컫고 있다. ‘의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경우는 본문을 완전히 그릇 해석한 것이다.

제 3 장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1-2).

2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p.96.

“첫째는”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숫자를 표기한 것이 아니고, 단순히 “먼저” 또는 “특별히”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품위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함에 틀림없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천국 지혜의 보화를 맡겼었다고 대답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제쳐 놓으면 유대인들에게 아무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주님께서 그의 영광을 유대인들 가운데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을 기뻐하신 만큼 오래도록 그들에게 말씀을 안전하게 보존하도록 맡기셨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분배하고자 하신 때에, 그들은 그 말씀들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려야 했다. 유대인들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었고, 둘째로는 그 말씀들을 따라 나눠주는 청지기들이었다. 주께서 한 민족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의 말씀을 맡겨 주신 것이 그처럼 큰 유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하면, 말씀을 경멸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말씀을 아주 소홀하게 또는 조심성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멸시하여도 결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함과 같으니라(3-4).

4절.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p.99.

히브리어로는 이 둘째 구문이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로 되어 있다. 이 말씀의 뜻은 단순히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든 심판을 행하실 때에, 불경건한 자들이 제 아무리 항의 소동을 벌이고, 증오심에 불타 불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지워버리려고 제 아무리 애써도,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 대신 헬라어 역본을 취하여 따랐다. 이는 그 역본이 여기서는 그의 목적에 더 잘 적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들은 성경을 인용함에 있어서 흔히 원문보다는 더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그들이 인용한 것이 그들의 주제에 적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고, (p.100)그래서 그들이 자구 사용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조심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응용하여 의역할 수도 있겠다. “만일 사람들의 죄들 중에 아무 것이라도 주의 영광을 선포하는 데 필요하고, 그리고 특별히 그의 진리로 말미암아 그가 영광을 받으신다고 한다면, 인간의 거짓마저도 그의 진리를 뒤엎기보다는 오히려 확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비록 (크리스네스다이)라는 단어가 수동태뿐 아니라 능동태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헬라어 성경 번역자들은 선지자 다윗의 의미와는 반대로, 그것을 수동의 의미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5-8)

5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p.101.

그는 한마디로 인간의 이성을 예리하게 공격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의 특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를 반대하는데 있다고 바울은 넌지시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

9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p.105.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동사인 (아이티아스타이)는 본래 법정 용어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단어를 “우리가 이미 고발하였다”고 번역하고 싶다. 어떤 원고가 다른 증언들과 증거들에 의해 실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소송에서 고소 내용을 입증할 것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10-20)

19절.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p.109.

바울은 율법이 틀림없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이 본래 유대인들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율법’이라는 단어 아래 바울은 또한 선지자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모든 입을 막고 ......

즉, “모든 핑계와 구실 붙일 모든 근거를 막고”를 뜻한다. 이 은유는 법정에서 취해온 것이다. 법정에서는 만일 피고가 합법적인 항변을 신청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의 고소장에 제(p.110)기된 혐의 사실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할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그는 침묵한다. 그리고 한마디의 항변도 하지 않고 그가 정죄 받는 것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의 침묵에 의하여 정죄함 받았기 때문이다. 욥기 40장 4절의 “나는 내 손으로 내 입을 가리울 뿐이로소이다”라는 말씀도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욥은 비록 그가 몇 가지 변명할 구실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을 단념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에 순복하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유수한 학자들 가운데서 ‘율법의 행위’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다소 석연치 않음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확대 해석하여 온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포함시키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의식에만 국한시킨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다는 점으로 인하여 크리소스톰, 오리겐, 그리고 제롬은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 율법이라는 단어가 첨가된 것은 특별한 뜻을 지닌 것으로, 그 문구를 모든 행위란 뜻으로 이해하기에는 힘들도록 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난제는 아주 쉽게 설명될 수가 있다. 행위들이란, 그 행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경배를 돌려 드리며 순종해 보려고 애쓰는 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칭의의 능력을 모든 행위들에게서 보다 명백하게 제거시키기 위해서, 의롭게 해주는 최대의 능력을 가진 그 행위들에 대해서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약속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들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이유들을 알 수가 있다......(p.111)바울은 의식에 대한 거짓된 자신감을 사람들에게 갖게 한 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사람들에게 갖게 한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제거하기 위해서 의식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의식들의 가치를 특별하게 논하지도 않으며, 그는 전 율법을 포함시키고 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주장했던 논쟁도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전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까닭 없이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지금까지 벌여왔고, 또 계속해서 벌이게 될 일련의 논증에 의해 충분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 우리가 달리 생각할 수 없도록 하는 많은 다른 구절들이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제일 중요한 진리로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곧장 그것을-즉,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범죄함으로 죄책이 있으며 그리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불의하다는 정죄를 받는다는 점을 그는 반복하여 말할 것이다. 이 두 명제-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 범죄함으로 죄책이 있다고 하는 것-는, 우리가 앞으로 나가게 되면(p.112)보다 충분하게 알게 되는 대로, 서로 반대된다. ‘육체’라는 단어는, 특별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는 한, 다소 일반적인 개념을 전달해 주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갈리우스에게서 발견한 대로,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모든 인생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그 표현이 풍부한 것과도 같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즉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죄와 정죄를 깨닫게 해주는 때문이라는 것으로부터 논증을 시작한다......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은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참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율법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둘째로 다음과 같은 것을 덧붙여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즉, 죄인으로 발견된 사람은 누구나 의를 박탈당한다는 점이다. 궤변자들이 하는 것처럼,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간 의롭게 될 수 있도록, 반쪽짜리 의를 날조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 인간은 부패하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1-22)

21절. 이제는 율법외에.

p.113.

‘율법’을 단지 의식들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고 융통성이 점을 앞으로 곧 내가 밝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어떤 현대 이론가들이 마치 이 교리가 바로 지금 그들에게 계시되었기라도 한 것 마냥 이 교리를 자랑하여 예증하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아 사도가 예외없이 모든 행위들,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서 열매 맺으신 행위 일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었고 인도함을 받았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이 받는 칭의를 말할 때,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위들까지도 일체 배제해 버린다. “허물의 사람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라는 이 말씀이 만일 믿음의 의의 정의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행위의 종류는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행위가 갖는 공로가 폐기되고, 다만 죄가 사람 받는 것만이 의의 원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through) 믿음으로 말미암아(by)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 그렇지만 그는 영적 중생에서 비롯되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이 두 명제는 완전하게 일치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는 그의 은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p.114) 그러나 바울은 아주 색다른 원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할 때에라야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선행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 때문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기 때문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죄외에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법은 어리석은 반론임에 분명한 듯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있는 것은,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와 있는 까닭이요, 또한 우리가 “믿음 안에‘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고 그리고 그의 값없는 약속들을 신뢰하는 까닭이며, 그리고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장사지냄으로써 우리를 그에게 화목시켜 주시는 까닭이다.

이것은, 어떤 주석가들이 어리석게 주장하는 대로, 칭의의 시작에 제한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은 다윗이 오래도록 하나님을 섬기고 그리고 그에게서 신앙의 연단을 받은 끝에 고백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비록 그는 성결 면에서 보기 드문 모범이지만 그가 부르심을 받은지 30년이 되었어도,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아무런 행위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의가 전가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 죄들을 사해 주심으로써 사람들을 의롭다 칭해 주신다고 가르칠 때, 교회가 일상적으로 거듭 사용하는 성구를 인용하고 있다. (p.115)양심의 평화는 행위 때문에 방해를 받으나, 그 평화는 하루만 있다가 없어지는 현상이 아니고,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만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생을 두고 바라보아야 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그리고 지금은 우리를 받아들여진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 배타적 소사인 “오직......만”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여, 우리가 성경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하여 우리를 그릇되게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논증에 의해서 논박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칭의가 율법에게도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게도 달려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긍휼만으로 된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 칭의가 긍휼만으로 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소사는 “그러나” 대신에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 시간적인 개념 없이 단지 반의적으로만 사용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만일 시간적인 개념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나는 회피한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의식들만이 폐기된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구약의 선조들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는 은혜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이 이 말씀을 부언하고 있는 것은, 복음이 값없이 의를 주는 데 있어서 율법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율법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바울이 부인했던 것처럼, 이제는 믿음의 의가 율법의 증거에 의해서 확증된다는 것을 그가 주장한다. 그리고 만일 율법이 값없(p.116)는 의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력으로 의를 얻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22절. 하나님의 의니......

p.117.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믿음의 의가 그리스도의 의로 되는 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 때에, 동력인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그리스도는 우리의 칭의의 질료인이시며, 말씀은 믿음과 더불어 도구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들이 되게 되는 때, 우리 자신들이 의로와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위들 안에 있는 어떠한 흠점들이라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취되어진 것은, 우리의 행위들의 흠점들이 그의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가리워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을 완전한 것으로 보상해 주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3-26).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p.118.

말씀은 질료인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키셨으며, 우리의 소송사유를 떠맡으심으로 해서 우리를 포로로 삼고 있던 사망의 횡포로부터 우리를 떠맡으심으로 해서 우리를 포로로 삼고 있던 사망의 횡포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의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화목제물에 의해서 제거된다.(p.119)여기서 다시금 의를 하나의 질(質)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허구가 매우 잘 논박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값으로 산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며,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어떤 다른 곳으로부터 빌려 온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곧 이어서 이 구속의 가치와 목적, 즉 이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되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 또는 시은좌(施恩座)로 일컫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바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시켜 주실 때에 한해서만 우리가 의롭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마도 성경을 통틀어서 의의 효력을 이 만큼 잘 설명한 구절도 없는 듯하다. 왠하면 본 절은, 하나님의 긍휼이 동력인이요,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질료인이며, 말씀으로 잉태된 믿음이 형상인, 또는 도구인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에 의한 영광이 목적인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헬라어 동사인 (프로티데나이)는 어떤 때는 ‘미리 확정하다’는 뜻으로, 그리고 어떤 때는 ‘나타내 보이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전자의 의미를 취하는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중보자로 그리스도를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값없는 긍휼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우리의 저주를 제거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찬양하는 것이 된다. 본문의 말씀은 요한복음 3장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일치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상의 다른 뜻 ‘나타내 보이다“를 취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개념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중보자로 정해 놓으셨던 그리스도를 자기 자신의 정하신 때에 ’나타내 보이신‘것이 된다. 내가 앞서 말한 대로, (힐라스테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옛날의 시은좌에 대한 암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예표적으로 주어졌던 것이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피’만을 언급했다고 해서 구속의 다른 요소들을 바울이 전적으로 배제하려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p.121)구속의 전 요소들을 그 한 마디의 단어 안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피를 언급했으며, 그 피로 우리는 씻음을 받는다. 이와 같이 우리의 속죄 전체를 함축하는 한 마디의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원인을 나타내는 전치사 ‘because of’의 뜻은 ‘죄사함을 위하여’ 또는 ‘그가 죄들을 덮어 가리울 목적으로’에 해당된다. 이 정의 또는 설명의 말씀은 내가 이미 종종 암시해 왔던 것, 즉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처럼 의로운 까닭이 아니라,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 다는 것을 거듭 확증해 준다......(p.122)그러나 전에 지은 범죄들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속함 받은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일부 극단론자들이 이 문구의 말씀에 대한 의곡된 견해에서 끌어내 온 완전히 터무니 없는 개념이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전까지는 하나님을 달랠 수 있을 만한 아무런 대가가 없었다는 것과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예표들에 의해서는 수행되거나 성취되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때가 차기까지 진리가 연기되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매일 범하는 범죄들도 같은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화목제물은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26절. 곧 이때에.

바울이 여태껏 되어졌던 것을 그리스도께서 계시된 시기에다 적용시킨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전에는 불분명하게 그리고 모형으로 알려졌었던 것을 그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이 숨김없이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때요,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서 자기의 공의에 대한 약간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의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그의 의는 훨씬 더 밝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과 구약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만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7-28)

27절. 행위로냐......

p.124.

믿음과 행위간의 이 대조는 상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시는 행위라는 단어가 아무런 수식하는 단어 없이 일반적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의 의식적 준수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외형적인 행위를 특별하게 지목하여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가능한 대로 모든 행위의 공로들을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p.125.

바울은 그의 주요 명제가 이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진술하고,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왜냐하면 행위를 명백하게 배제하고 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보다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대적자들은 믿음을 행위의 공로 가운데 포함시키려고 갖은 애를 쓴다. 실제로, 그들은 사랑에다 칭의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그 칭의의 능력을 믿음에 돌리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 은 아무 행위의 공로도 칭의와 전혀 관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여 칭의가 값없이 된다는 것을 단언하다. 나는 이미 왜 바울이 행위들을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칭하고 있는 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들을 의식의 준행에 국한시키는 것은 아주 어리석다는 것도 증명하였다. 또한 율법의 행위들을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 되어진 의문의 행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잘못된 곡해인 것이다. 반대로, 그가 덧붙여 놓은 ‘율법’이라는 단어는 그가 그것들을 공로적이라고 칭한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언급된 내용이 율법에 약속된 상급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않고 또한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 결코 위의 견해와 반대되지 않는다. 이 두 견해를 조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고보가 사용한 논증의 성격을 고려해 보는 것이다. 야고보의 경우 문제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입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헛되이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justyfy'라는 단어가 야고보의 경우는 바울과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주 비논리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단어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자면 이 모호성이 고려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대로, 사람이 거짓되거나 죽은 (p.126)믿음에 의해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다는 것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를 참고하기 바란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29-31).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p.126.

율법이 믿음에 대립되어 있는 경우에, 육신의 사람은 곧 바로 의심하기를, 마치 그들이 서로 대립되기나 한 것처럼, 이 둘 사이에 어떤 양립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는 색안경을 끼고서 율법을 그릇되게 보는 사람들 가운데서와, 그리고 율법 가운데 있는 약속들을 무시한 채 율법에서 행위의 의만을 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심하게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율법의 폐기를 목표로 하여 가르침을 전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심하게 공격했다.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라는 항의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같은 의심은 의식법 뿐만 아니라 도덕법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복음이 모세의 의식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 까닭이다. 또한 더구나 복음이 행위의 모든 의를 말살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이 율법의 모든 증거들에 반대되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가 율법에 의와 구원의 길을 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율법으로 확증하신다. 그러므로 (p.128)나는 바울의 이 변호를 소위 도덕적 교훈들이 아닌, 의식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전 율법과 관계된 것으로 해석한다.

도덕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되게 확증되고 확립된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그의 죄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목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이는 율법은 성취되지 않는다. 율법이 옳은 것을 선포하나 그것은 헛되다. 율법은 무절제한 정욕을 증가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성취하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인간이 더 큰 정죄를 받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면, 먼저 그 안에서 율법의 정확한 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의는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된다. 둘쨰로 우리는 그 안에서 성화를 발견한다. 이 성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의식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때 이 의식들은 중단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로 말미암아 참되게 확증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보다 나은 목적과 관련하여서만 실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최상의 확증은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의 진리를 성취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가 율법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 확증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파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제 4 장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1-3).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p.131.

인용된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온 말씀이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는다”라는 단어는 특별하게 그 뜻을 한정하여 해석되어서는 안되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지했다고 하는 구원의 전 언약과 입양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장래의 씨에 대한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값없는 입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없이 약속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없이 또한 약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의 소망에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위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 바울이 그 문맥에서 모세의 진술을 억지로 갖다 붙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여진다. 그들은 이해하기를, 그 문맥(창16:6)에는 특별한 약속이 진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일에 아브라함이 올바르고 영예롭게 행하였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것은, 첫째로, ‘믿으매’라는 단어가 전문맥에 걸쳐 있다는 것과 그런 까닭에 한 문구에만 제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그릇된 주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간파하지 못한 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입양그의 부성애를 아브라함이 보다 착실하게 믿을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수양부성애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은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베풀어진 은혜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일 이로 인하여 그에게 의가 전가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의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가 신뢰한 데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가 받기를 감히 소망한데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모세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말하지 않고, 그가 하(p.132)나님의 법정 앞에서 가졌던 신분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에게 약속으로 제공되었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포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의가 그에게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는 약속과 믿음의 이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법률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은 다만 그 의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의를 얻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설명이 다 되어지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야고보서를 다룰 수 있게 되는 경우에는, 이 말씀에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는 야고보서와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코자 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 유의해 둘 것은, 의가 전가된 사람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의의 전가와 칭의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문제는 사람들이 그 자체에 있어서 어떤 존재들인가 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 주시느냐에 있다는 점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4절. 일하는 자에게는......

바울이 말하는 “일하는 자”란, 좋은 의미에서 선행에 열심하는 사람, 즉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히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를 가리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하는 “일을 아니하는 자‘란, 그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해서는 아무 것도 상급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신자들이 선을 행하는 (p.133)데 있어서 태만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바라는 타산적인 생각을 신자들이 갖지 못하게 금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본문의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을 규제할 것인가 하는 신앙 윤리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빚으로 갚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나는 바울의 논증 형식이 단일 표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체 문장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한 뷰우처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의역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그 무엇을 자기의 일의 공로에 의하여 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공로로 받는 것은 값없이 그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라,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삯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은, 우리에게서 그것이 어떤 공로를 들추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가 당연히 받은 삯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자신의 선한 뜻대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언제나 이 사실에서 우리에게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 즉 자기 무가치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해주시는 것 말고,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이와 동일한 진리가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다른 말로 진술되어 있다. 율법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까닭에 바울은 이로부터 결론하기를, 값없는 믿음의 의는 행위의 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행위에 근거하여 믿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주의깊게 비교 검토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되고 만다.

5절.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이 말씀은 크게 강조한 완곡한 표현이다. 이 말씀으로 바울은 믿음과 이 두가지의 본질과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분명하게 밝히기를, 믿음이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가져다 주는 것은, 그 믿음이 공로적인 성격을 가지고 (p.134)있는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의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진술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불의한 것을 또한 정죄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우리의 궁핍함을 채워 줄 수 있게 한다. 요약하면, 자기네들이 경건치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들만이 믿음의 의에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완곡한 표현의 말씀은 본문의 주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가 마땅히 진노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의 사랑을 가지고 은총을 베푸셔서, 즉 그의 긍휼하심은 우리의 불의를 도말하시어 우리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는 분으로 되어 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 제한하는 사람들이 단지 트집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서 율법의 행위로 지칭하였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런 형식적인 단어를 첨부함이 없이 행위라고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이 간략하고 수식이 없는 단어가 모든 행위에 구별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전체 논증에 일관해서 유효한 것임에 틀림없다. 칭의의 능력을 단지 의식들에서만 배제하는 것만큼 모순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차별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사람들의 죄를 전가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다는 부정적 어구가 덧붙여져 있다. 이 말씀들에서 우리가 배우는 바는, 바울의 경우 의란 죄사함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과, 결국은 이 죄 사함 역시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죄사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암시하는 대로, 이 의는 행위가 없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빚이 탕감되는 것은 채권자가 변제 받을 때가 아니고, 채권자가 자의로 그가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어서 빚을 말소해 주는 때이다. 그러므로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p.135)가르치는 자들을 물리치자. 바울은 의의 선물값없는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죄사함의 개념에서 그의 논증을 빌어 온 것이다.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울과 의견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주장하기를, 믿음의 의값없는 것이고, 행위와는 무관한 것임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의는 죄사함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 행위라도 죄 사함 받는 데 요구된다고 하면 그의 논증은 분명히 거짓된 것일 것이다.

반쪽 사죄에 대한 로마교회 학자들의 어리석은 주장은 다윗의 바로 그 말씀에 의해서 또한 반박된다. 그들은 터무니없게도 주장하기를, 우리의 허물이 사함을 받기는 해도 형벌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두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 다윗은 우리의 죄가 가리워져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옮기워져 있다는 것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이 추궁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추궁하지 않는 죄들에 대한 형벌을 그가 요구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죄들을 값없이 사함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깨끗게 된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영광스런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값없는 의가 중단됨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다윗이 오래 계속된 그의 양심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시달림을 받아 이 선언을 말씀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체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수 십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경배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에 크게 진보한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법정에로 소환되는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마침내 체험하였으며, 그래서 선언하기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추궁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그의 은총의 품에 안아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의단순히 시작하는 행위일뿐이고, 그 후로는 신자들이 처음에 아무런 그들 자신의 공로 없이 얻었던 그 의를 그들이 행위에 의해서 보지(保持)한다고 터무니없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 또한 반박되는 것이다.

행위나 다른 경험들이 의로 간주되어 종종 진술되어 있다고 해서, 바울의 논증이 결코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시편 106편 30절에 기록되기를, 주님의 제사장 비느하스가 간음자와 창기를 처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재(p.136)앙을 그치게 했기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인정되었다고 되어 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사람이 의로운 행위를 해냈다는 것을 듣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요구되는 것은,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18:50는 약속의 말씀대로,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순종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비느하스가 내려친 이 처벌이 그에게 의로 인정되는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어야 할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이미 덧입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까지를 좋게 봐주시는 까닭이다. 그들의 이 행위들이 갖고 있는 흠결과 허물들은 그리스도의 순수성에 의하여 가리워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심판을 받지 않게 되며, 어떠한 더러움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관용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서는 인간의 아무 행위라도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어째서 이 인용구들을 사용하여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으며 복되게 된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p.137)없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 사람은 믿음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 못지 않게 행위에 의해서도 의롭다함을 받게 되다고 선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시여뿐 아니라 원인들의 순서를 숙고해야 한다. 믿음의 의가 의가 그 모든 기능들을 성취하지 않는 한, 행위의 의나 행위에서 오는 축복에 대한 선언은 아무것도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의가 먼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과일이 나무에서 자라나 열매맺는 것처럼 행위의 의가 믿음의 의해서 자라나 열매맺는 것이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9-10).

바울이 ‘할례’와 ‘무할례’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당면한 유일의 문제는 율법의 의식들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 것이라고 지혜롭지 못하게 결론내리고 있다......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원리가 진술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이 모든 행위에 선행하지 않는 한, 이것은 충분치가 못하다. 이 행위들 중에 첫째가 할례였다. 이 할례로 말미암아 유대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우리가 언제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할례가 여기서는 율법의 ‘최초의’행위로 고려되어 있다는 점이다......(p.138)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다루고 있는 논쟁점은 단지 의식 하나만에 대한 것이 아니고, 율법의 모든 행위 즉, 보상을 받아야 하는 모든 행위가 이 부류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할례가 특별하게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율법의 의의 기초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11-12).

11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바울은 반대론을 예상하여 비록 할례가 의롭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다른 특출한 용도, 즉 믿음의 의를 인쳐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례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힌다. 한편 바울은 할례의 목적 바로 그 자체에서 할례가 의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할례는 무할례시에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인해 주는 성질이 있고, 그래서 그 의를 결코 손상시키거나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은 성례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괄목할 만한 구절이다. 바울이 증거하는대로, 성례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그리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다. 비록 성례들은 그 자체들만으로는 무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의 은혜의 도구로 작정하셨고, 그리고 그의 성령의 은밀한 은혜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을 증진하는데 그들이 방편으로 삼게 하셨다. 또한 비록 유기된 자들에게는 성례들이 생명이 없고 무익한 상징들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들의 힘과 성격을 잃지 않고 언제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불신앙으로 (p.139)인하여 성례의 효력이 우리에게서 박탈되어 있지만, 그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하거나 소멸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상징들인 성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시는 증거들이라고 하는 원리는 변함이 없이 존속된다.

할례의 표에 의하여 이중 은혜가 나타난 바 되었다는 점이 특별히 진술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받은 씨를 약속해 주셨었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 약속은 이것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유추는 신자들이 약속된 씨를 고대한 것과 충분하게 일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편에서는 생활의 순결과 거룩을 요구하셨다. 그리고 그 상징에 의해서 이러한 생활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었다. 즉, 육신으로 난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할례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전성품은 부패한 대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표에 의하여 영적으로 자기의 육체의 부패한 것을 할례하도록 아브라함에게 가르친 것이다. 모세는 이 점을 신명기 10장 16절에서도 언급하였었다. 이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직 나이가 어린 탓으로 할례하라는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던 어린 영아들의 할례를 하나님께서는 명하셨다.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으로 특별히 언급하였다. 이는 신명기 30장 6절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구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주께서 네 마음을 할례하실 것이라”고 했다. 모세 이후로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사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세례에 두 가지의 요소가 있듯이, 옛날의 할례에도 거듭남의 생활(newnes of life)과 죄사함(forgiveness of sins)의 두가지를 증거한 두 요소가 있었다. 비록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가 할례에 앞섰지만, 우리가 이삭과 그의 후손들의 경우에서 보는 대로, 성례에서는 반드시 의가 앞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원이 외적인 표에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에 한 번 그러한 실례를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12절.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본문의 동사는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외면적인 할례만을 받고 그것을 대단하게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주요한 요점,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 오직 그의 믿음이 그의 구원을 확보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울이 믿음성례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구별하려고 하는가를 엿볼 수가 있다. 바울이 이 둘을 구별짓는 목적은, 아무도 자신의 칭의를 얻는 데 할례만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오해하고서 할례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 만일 그들이 순수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p.141)본을 좇는 경우에는, 할례를 그는 분명히 제외시킨다. 만일 다른 어떤 도움 없이도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할례시”의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할례와 믿음, 이 둘을 분리시킴으로써 칭의의 두 원인들을 혼동하는 것을 우리는 피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을 구별하는 스콜란 학파의 교의는 위와 같은 논쟁에 의해 반박된다.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은 구약의 성례에는 칭의의 능력을 부인하고, 신약의 성례에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증명할 때에 그의 논증이 옳다고 한다면, 바로 그 논증은 우리에게도 또한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것과 똑같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

13절.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그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과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로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식법의 준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쉽게 논박된다......바울은 영적 거룩함의 생활을 의식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그것의 의를 의식에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14-15).

p.144.

14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신뢰하지 않을 것 같으면 믿음이 소멸되어 버린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이나, 또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념이 아니라, 복음에서 깨닫고 또 하나님의 면전에서 양심의 평화를 누리며 쉼을 얻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15절.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진노’란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그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본문에 사용된 표현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을 곧장 첨가하여 말하는 이유로 보아서, 율법이(p.145) 우리 모두에게 결과시켜 주는 것은 오직 정죄 뿐이라는 것을 바울이 의미한 것임에 분명하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어떻게 번역을 하든 간에 본문의 뜻은 마찬가지이다. 즉, 기록된 율법으로 가르침 받지 못하고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악하게 깨뜨리며 범하는 사람만큼 큰 범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6-17).

16절.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믿음으로 되나니.

(p.146)그러므로 우리가 양자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근거로 해서 양자되는 것이 확실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는 요지부동의 확실성을 갖춘 믿음을 믿음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주저와 의심을 불신앙으로 여긴다. 이러한 불신앙은 믿음과 약속을 폐기시킨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의 학자들은 이 의심을 도덕적추측이라고 부르며 그 의심이 믿음을 대신하고 있다.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사도가 여기서 먼저 밝혀 주고 있는 것은, 순수한 은혜만이 믿음 앞에 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의 객체는 순수한 은혜이다. 만일 은혜에 공로가 계산되게 된다면, 은혜로 얻은 것은, 무엇이나 공로없이 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해 볼 것 같으면, 만일 은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모든 것이라고 한다면, 행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그 약속이 은혜에 근거할 때에만 최종적으로 확실하게 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다 분명하게 모든 모호한 점을 없애 준다. 바울의 이 말씀은 인간들이 행위를 의지하는 한 처할 수 밖에 없는 불확신의 상태를 확증해 준다. 왜냐하면 행위를 의지하는 인간들은 스스로 자신들에게서 약속의 열매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는 중생의 은사를 의미하지 않고, 다만 공로없는 은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역자주:칼빈은 중생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은 결코 완전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것이 인간들의 양심을 무마시키기에는 전혀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그 약속을 재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는 율법의 멍에에 자신들을 얽어매고, 율법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는 광신적으로 율법에 열심하는 자들을 가리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유대 민족을 의미할 뿐이다. 그들에게 주의 율법이 주어졌었던 것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한 자들이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율법의 종들이 아니고, 율법으로 양육받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된(p.147)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의역하여 읽으면, 문장의 뜻이 더욱 분명하여 질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아니라, 비록 전에는 율법을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은......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은 이방인들이 이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기업을 양도해 준 바로 그 예언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씨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한 민족의 아비가 아니라 열국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은혜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장차 확대될 것이라는 것이 예표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약속되었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확대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고려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사가 과거 시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성경의 통상적인 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이방인들에게 은혜가 미친 증거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주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로 택정되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인용구인 모세의 말을 괄호로 묶으면, 이 문장은 끊기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읽을 수가 있다. 즉,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 그 관계의 형식을 설명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육체적인 혈통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 즉, “우리의 영적 조상”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은 우리와의 그의 육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기 때문이다.

17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그는 마치 생식력과 정력이 왕성하기나 한 것처럼 씨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식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생각의 차원을 높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어떻게 보면 출산할 (p.148)수 없고 죽은 자나 다름없지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합리할 것은 없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18).

18절. 하신 말씀대로

p.149.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많은 시험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서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었을 때 그는 그에게 주어졌었던 약속, “네 씨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리라”는 말씀에 그의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람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19-22).

19절.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p.150.

아브라함은, 이전에는 메말라 시들어버린 나무 같았었으나, 하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회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삭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생식력이 있는 나이에로 회복됨으로써, 그 후로는 다른 자녀들을 출산할 수가 있었다.

20절.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p.152.

이 구절은, 아브라함이 그의 시종여일하고 견고한 믿음에 의하여 그가 불신앙을 극복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투쟁을 통하여 결국 승리하게 될 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그 말씀에서 힘을 얻는 사람뿐일 것이다.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p.154.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에게 의를 가져다 주었는가 하는 것이 이제 보다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은혜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믿음과 말씀과의 이 관계는 주의 깊게 견지되어야 하며, 꼭 기억되어야 한다. 이는 믿음은 그것이 말씀에서 받은 것 이상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해 일반적이며 혼란된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채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확실하게 신뢰하지 않는 한, 곧 바로 의롭다 될 수는 없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3-25).

24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p.156.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음의 본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내세에서 우리의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만 단지 바울이 말했었다고 한다면, 이 믿음이 어떻게 의를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까를 파악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 자신의 부활로 생명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의 의의 전가가 어느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가를 확실하게 알게 된다.

25절.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이긴 승리자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영접받아 들어가셔서 그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우리를 화목시키지 않으셨다고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가 죄 때문에 받아 마땅한 저주를 당하신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긴 칭의의 능력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 우리를 화목케 해 준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우리의 칭의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가 완성된 것이 그의 새 생명에서 보다 분명하게 계시된 때문이다......그가 먼저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으심은, 그가 죄인의 몸으로 죄의 고통을 경험하기 위함이었으며, 그리고 후에 그가 생명의 왕국으로 높이 올리우신 것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 의와 생명을 값없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가된 칭의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5장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1-2).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p.159.

그러므로 ‘화평은 양심의 평정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이 화목되었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된다.

p.160.

2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가 누리는 바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요,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이 은혜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복음이 화목케 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그는 즉시로 뒤이어, 우리의 구원이 요지부동하고 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은혜가 계속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그는 우리의 견인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위에 기초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있는’이라고 동시에 그가 말함으로 해서, 복음이 얼마나 깊이 경건한 사람들의 심령속에 뿌리를 박아야 하는가를 지적해 주고 있다. 복음이 깊이 뿌리 박아야만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경건한 사람들이 강하여질 수가 있고, 그리고 혈육과 마귀의 모든 궤계들을 대항하여 견고하게 설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 ‘서 있는’이라는 이 말은 (p.161) 믿음이란 일시적인 한 날의 덧없는 설득이 아니라, 전생애를 통하여 지속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내세의 소망의 나타남과 우리가 그 소망안에서 감히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확실한 초석 위에 근거하는 데 있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신자들이 지금은 세상에서 나그네들이지만, 그들은 그들의 확신에 의하여 하늘에 오르며, 그리하여 고요하게 그들의 품 안에 그들의 장래의 기업을 간직하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궤변가들의 가장 골치 아픈 두 가지 교리를 분쉐한다.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식별함에 있어서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도덕적인 짐작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교리와, 둘째로는, 우리의 최종적인 견인에 관하여 우리 모두가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교리를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항구적이고 서슴없는 확신이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자랑할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빛을 비추었다. 이 복음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증거하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1:4, 요일3:2)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3-5).

3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p.162.

성도들이 그들의 당하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그들이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역경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주는 아픔으로 인하여 고통을 비탄에 잠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만일 그들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런 인내도 그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환난은 인내를.

p.163.

인내란 환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환난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면적인 순종-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것이다-과, 위로-이것은 바로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에는, 환난들은-완악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이 환난들은 다만 분노와 불만만을 산출해 낼 뿐이다-인내를 낳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4절. 인내는 연단......

이와 비슷한 점층법을 써서 야고보가 다른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는 그가 말하기를,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1:3)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다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조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연단’이라는 단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에 대해서 갖는 체험이다......야고보는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서, 환난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바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에 의하여 자기 종들을 시험하시고 시련을 겪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련들이 흔히 시험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내를 하게 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인내심을 바르게 향상시킬 수가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 수 없으리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이 체험(연단)에서 나온다고 덧붙이고 있다.

5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p.164.

우리는 환난에 의해서 자극을 받아 인내하게 되며,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격려하여 소망을 품게 한다. 이는 아무리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지쳐 탕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고 가장 풍성한 위로이며,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갈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실 때, 우리의 바로 그 재난들은 분명히 번영과 기쁨으로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부성애(바울은 이 점을 8장에서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를 인하여, 십자가의 모든 고난들을 뒤엎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 속에 주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좋은 선물들이 인간들의 귀와 눈과 마음에게는 감취어져 있고, 성령만이 그 선물들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사인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너무도 풍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렇듯 그 사랑이 우리 몸의 전체에 넘치도록 부은 바 된 까닭에, 그 사랑은 역경 중에서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며, 달콤한 조미료처럼 우리의 환난에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바울은 또한 말하기를, 어거스틴이 잘 지적한 대로,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성령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신’, 즉 부여된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거이니(6-9).

6절.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p.165.

어떤 주석가들은 ‘연약할 때’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나타나시기 시작하던 시기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아직 연약한 사람들’이란 율법을 수학하던 자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본문의 말씀은 모든 기독교 신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언급된 때는 각 (p.166)신자가 하나님께 화목되기 전의 시기이다. 우리 모두는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기 까지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연약한’ 자들이란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는 곧 이어서 바울이 그들을 ‘경건치 않은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연약하다는 말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 때, 즉 우리가 전혀 무가치하고 하나님에 의해 귀여움 받기에는 부적합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믿음은 경건의 시작이다.

7절.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자비를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바울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의 확신과 안전을 확립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p.167)그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증, 즉 선언하시는 것은, 그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사랑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바 없이,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대로(요3:16) 그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죄인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처럼)전적으로 부패하고 죄에 젖은 자들을 의미한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0-11).

p.168.

10절.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때문이었다는 점을 우리가 깨닫는 것 말고는 달리 하나님의 값있는 긍휼(값있는은 “값없는”이 아닐까, 번역오류같음-조창훈견해) 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 죽으심이 하나님과의 우리의 화목의 시작이 되어, 그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속죄로 말미암아 전에는 우리를 적대시하던 것이 정당했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12-14).

12절.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p.170.

여기서 바울이 밟고 있는 순서에 주의한다. 그는 말하기를, 죄가 앞섰고, 그리고 사망이 죄를 뒤따랐다고 한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우리의 파멸이 이렇게 왔으니, 우리가 멸망하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단지 아담이 말하자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주석가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단언하기를, 죄의 벌을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가 이미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잠시 뒤에 가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어째서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에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죄를 짓다”는 말은, 그 단어가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대로 부패하고 더럽혀져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모태로부터 지니고 나온 생래적인 부패는, 비록 그것이 즉각적으로 그 열매를 맺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이며, 그래서 그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원죄이다. 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그가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받았던 것처럼, 그는 주님으로부터 타락함으로 해서, 그 자신 속에서 우리의 성품을 부패시키고, 더럽히고, 파멸시켰다. 즉,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잃음으로 해서, 그가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유일한 씨는 그 자신을 닮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죄를 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생래적인 부패로 물들어 있고, 그리고 이런 까닭에, 사악하고 완악하기 때문이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온 인류에게 물려진 것은 모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의 말씀을 교묘하게 피하려한 펠라기우스파의 시도는 천박한 사기였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다만 하나의 모범은 될지언정 의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울은 여기서 본죄(actual sin)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책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면, 왜 바울이 아담을 그리스도와 비교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리의 생득적이고 유전적인 부패를 언급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13절.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를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들은 율법에 의하여 깨우침을 받지 않는 경우 선악간의 구별도 대개 제쳐 놓고서, 마치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조심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이 그들의 정욕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그러므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바울이 주장할 때, 그가 비교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율법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 행동하지 않을 대에는 그들이 나태에 빠지기 때문인 것이다......(p.172)사망의 원인이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모든 사람들의 멸망이 최종적으로는 율법에 의하여 계시되었지만, 아담의 타락 이후 즉시로 모든 사람이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14절.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본문은 일반적으로 어린애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어린애들은 아무런 본죄로 인한 죄책이 없이 원죄로 말미암아 죽는다. 그러나 율법 없이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나는 본문을 해석하고 싶다. 이 구절은 앞의 말씀들과 관련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앞의 말씀들을 보면, 율법이 없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죄를 전가시킨 일이 없는 것으로 진술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아니한 것은, 아담이 받았던 것과 같은 확실한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p.173)주께서는 아담에게 금하여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께서 주신 유일한 명령은 양심의 증거뿐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간의 이 차이점으로 인하여 그들이 정죄받지 않고 면죄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어했다. 한편 영아들도 만인 공통의 명부에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아담과 그리스도 간에 어떤 유사점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나, 어떤 경우는 완전히 정반대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기 때문에,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불리운다 해서 부당할 것은 없다. 그러나 마치 아담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모범에 의해서만, 우리를 앞선다는 듯이, 아담이 죄의 모형으로 불리우지 않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의의 모형으로 불리우지 않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 두사람은 오히려 대조되어 있다. 우리가 이 점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오해와 오리겐의 치명적인 오류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함에서다. 그런데 오리겐은 인류의 타락을 비기독겨 철학의 용어로 이론화시키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거의 완전히 파괴할 뻔하였다. 에라스무스도 용서받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가 그처럼 엄청난 오해를 변명하느라고 장황하게 방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아주 알맞게 추론할 수가 있다. 즉, 아담의 타락이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파괴시키는 힘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는 힘이 훨씬 더 강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더 큰 수를 많은 수와 대조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류의 큰 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아담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덜 효과적일 리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을 뿐이다. 즉 바울이 여기서 구원받는 자와 멸망받는 자의 수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담으로 말미암은 멸망시키는 세력과 그리스도로 말미(p.175)암은 구원하는 능력을 다만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바울은 이 말씀을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물려져 내려왔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마치 우리 자신에게는 책망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한,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아담의 허물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의 멸망을 아담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그의 죄가 우리의 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우리의 죄란 우리 안에 있는 생태적이고 생득적인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와...은혜로 말미암은 선물

그러므로 은혜하나님의 순정한 자비, 또는 그의 공로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그런데 중세 신학자들은 은혜를 단지 사람들의 심령속에 주입된 자질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

16절.

p.17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아담 간의 이 구별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한 것은 단순히 원죄, 또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로부터의 자유뿐이라고 가르친 사람들이 신성모독적인 견해를 주장한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주의할 것은, 많은 범죄들-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함을 받는 것으로 바울이 주장하는 바 그 많은 범죄들이란, 우리 각자가 세례받기 전에 범했던 허물들뿐만 아니라, 또한 성도들에게 매일 새로운 죄책을 지워주고, 그리고 만일 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항구적인 변치 않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하면, 그들이 마땅히 정죄받아야 했던 죄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은사’와 ‘심판’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심판이란 엄격한 공의를 뜻하고, 은사란 값없이 주는 용서를 뜻한다. 이는 정죄가 엄격한 공의에서 비롯되고, 사면은 용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17).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p.177.

여기서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 간에 있는 두 가지 차이점이다......첫번째 차이점은, 우리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정죄받는 것은 죄의 전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죄받는 것은 우리 또한 죄책이 있기 때문에 아담이 받는 형벌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이 본성은 아담 안에서 부패되었다- 이 부정하기 때문에 죄책이 있는 것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전혀 다른 방도에 의하여 우리를 회복시켜 구원을 얻게 해준다.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그의 모든 축복과 함께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축복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관대함을 베풀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 그러므로 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이것은 그릇된 해석이다-이 아니고, 값없이 주는 의의 전가이다. 사도는 ‘은혜’라는 말에 대한 그의 해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담이 그의 온 인류를 정죄에 연루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왜냐하면 저주-우리는 이 저주를 아담에게서 물려받는다-가 본질적으로(by nature) 우리에게 전달되어 있는 까닭에, 그 저주가 온 인류를 연루시킨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그러나 우(p.178)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죄의 처참한 유업을 참여하여 물려받는데 충분하다. 왜냐하면 죄가 인간의 살과 피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교제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특별한 방법으로 영아에게 전달된다. 영아들은 언약으로 입양의 권리를 갖는다. 이 언약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교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경건한 자들의 자녀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은혜의 약속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인류 공통의 운명을 결코 면하지 못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말미암아.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가 이렇게 유효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가 의롭다 하시는 것(칭의)이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상기시키시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남 몰래 혼자서만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의는 그 범위가 광범위하였는데, 이는 자신에게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신자들을 그가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에게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p.179) 의하여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방금 사용한 두 단어인, ‘심판’과 ‘은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또한 반복될 수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죄가 많은 사람들을 정죄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의롭다 하는데 유효하다”. 나의 판단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justification of life)는 말씀은 사면을 뜻한다. 이 사면은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할 수도 있고, 또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대하여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시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용납되는 것은 우리가 의로울 때에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의 기원을 의롭다 하심(칭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의 의인이 되리라(19).

19절.

본문의 이 말씀은 같은 말을 쓸테 없이 반복한 것이 아니고, 앞 구절에 대한 꼭 필요한 설명이다.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정죄를 받았다고 말했으나, 어떤 사람이든 무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정죄받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어했다. 그가 뒤이어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진술한 경우,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만족시켜 드림으로 해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셨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의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의 속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 속해 잇는 것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순종이라고 일컬음으로써 그것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 존전에 무엇을 가져오도록 우리에게 요구되는가를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부분적인 순종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절대적인 순종인 율법에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만일 의로운 사람이 타락할 것 같으면, 그의 이전의 의는 아무것도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목적으로 하나님께 억지로 갖다 내민 자기 본위의 계획들의 허위성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행하라고 하신 것을 오직(p.180) 우리가 준행할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행위의 의를 대담하게 주장하는 자들과는 교제하지 말라. 그런데 행위의 의는 율법을 온전히 완전하게 지킬때에만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란 아무래도 없음이 확실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행위-하나님께서는 이런 행위를 배설물만도 못하게 여기신다-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들은 정신 빠진 자들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20-21).

20절.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p.181.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범죄의 증가라는 말을 단순히 지식과 완악성의 증가로만 나는 해석하고 싶다.

제 6 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4).

3절. 예수와 합하여 세례.....

p.185.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이 교제가 세례의 초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세례는 씻는 것만이 아니고, 옛 사람을 억제하는 것이요, 또한 처형하여 죽이는 것인 바, 이런 열매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이 교제의 효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서술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5-6).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p.188.

옛 사람이 옛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구약 성경이 신약 성경에 관하여 옛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같다. 그가 중생하기 시작한 때에 옛 사람이 되기 시작한 때에 옛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옛 성품은 점차 죽어가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모태로부터 가지고 나오는 우리의 전성품을 가리켜 말하고 있으며, 또한 그 성품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참 생명에로 중생함과 정비례하여 그 성품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다고 한다. 이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임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극기(mortification;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의 (p.189)유일한 원천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다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서 바울은 십자가를 드러내어 말하고 있다. 바울이 죽었다는 말 대신에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고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해석은 아주 옳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에는 거의 적합하지가 않다. 죄의 몸-여기에 대해서는 그가 조금 뒤에 가서 언급한다-이란 육체와 뼈를 의미하지 않고 죄 덩어리 전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대로 내어 버려두면 죄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우리가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은 죄를 멸하게 된 목적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담의 자녀들로서 단지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완전히 죄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즉, 죄에게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죄짓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게 되는 경우, 이 비참한 속박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우리가 즉시로 죄짓는 것을 모두 중단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함에서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7-11).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p.193.

비록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이 다만 시작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죄의 생명은 바로 이 수단(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것인 극기)에 의하여 멸망되는 것이다......참으로, 당신 안에서 이미 시작된 당신의 육체의 소욕은 죽이는 극기가 매일 이루어지도록 당신은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3).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이제 바울은 그의 권고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 권고의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교제에 관하여 그가 말했던 교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비록 죄가 우리 안에 거하여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주장하는 권능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성화의 권능이 죄의 권능보다 우세해야 되기 때문이며,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인 것을 우리의 생활로 증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몸이라는 말은, 내가 이미 주장한 바 대로, 육체의 피부와 뼈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인간의 전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의미를 본문에서 아주 확실하게 추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몸의 부분들의 관해, 곧 언급하게 되는 다른 문구에서는 영혼까지 아울러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처럼 땅에 속한 인간을 업신여겨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혈통에 합당한 것을 아무 것도 우리가 열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6장 3절에서도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야수들처럼 육체가 된 것을 불평하시면서, 사람에게 땅에 속한 성품 외에는 아무 것도 허락하지를 않으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한 그리스도의 선언(요3:6)도 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다. 영혼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반론은, 우리의 현재의 타락한 상태에서는 우리의 영혼이 땅에만 집착해 있고, 그리고 우리의 육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영혼의 본래의 탁월함에 전락해 버렸다는 주장에 의해서 쉽게 응수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이 육체적인 것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이 하늘의 은혜를 상실당했고, 그리고 단지 일종의 믿을 수 없는 그림자나 형상이기 때문이다.

(p.195)바울이 이 몸을 죽을 몸이라고 경멸하여 또 언급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전본성이 죽음과 파멸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고, 우리를 충동하여 죄를 짓게 하며, 우리의 모든 악한 행동과 악의 근원이 되는 원시적 부패에 죄의 오명을 붙여 주고 있다. 바울은 죄와 우리들 사이에 정욕을 개재해 놓음으로 해서, 우리의 무절제한 욕망들이 죄의 칙령이요 명령인 한, 죄가 말하자면, 우리 위에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마치 사단의 창녀들이기라도 하듯이 온갖 종류의 가증한 주행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지체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것인지에 대해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리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4-18).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p.196.

나는 논쟁을 벌임이 없이 나의 견해를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감정 때문에 거룩함에 이르려는 시도도 해보지 못할까 보아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격려를 우리가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들의 모든 힘을 의에 순종하는 데 사용하도록 권면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육체의 찌꺼기를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불확실하게 행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p.197)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음으로 해서 의기 소침하고 낙담하지 않도록, 그들의 행위가 지금은 율법의 엄격한 규칙에 준하여 강요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결을 용서하기고, 친절과 사면을 베풀어 그들을 용납하고 계신다는 점을 생각게하여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위로의 기회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법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은 죽은 문자가 우리를 정죄한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구하고, 그리고 율법의 아무 부분이라도 범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선언하는 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구속의 두 요소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구속의 두 요소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 주는 수단인 죄의 용서와 그가 우리를 새롭게 빚어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방편인 성령의 성화로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는, 흔히 그러하듯이 이 반의 접속사는 원인을 나타내며, 그 뜻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해질 것이다. 사도는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가 바른 것을 행하려고 애쓰다가 지치지 않도록 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도 우리 자신 안에 많은 결함과 불완전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독침들이 아무리 많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를 정복할 수가 없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그것들을 능히 정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또한 우리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엄격한 요구로부터 자유롭다. 더욱이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가 율법의 멍에에 얽매어 있으며, 그것의 정죄 아래 붙들려 있다는 것을 사도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는 한, 그들은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죄를 지으리요.

p.198.

하지만, 이 폐기는 우리에게 삶의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율법에는 전혀 적용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을 확증하시고 재가하시며, 폐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론의 바른 해답은, 율법 중에서 유일하게 제거된 부분은 저주이다‘라고 하는 데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17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p.199.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방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그리고는 은혜가 풍성하지 못하게 될 때, 온 인류가 죄의 지배 아래 붙잡히게 되나, 은혜가 그 힘을 발휘하자마자 죄의 왕국이 끝장나 (p.200)버린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게 될 때는 우리는 죄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거듭남의 영이 이 ‘은혜’라는 말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너희가......마음으로 순종하여.

바울은 여기서 또한 성령의 감추인 능력을 율법의 외형적인 문자와 비교하여, 마치 그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그것의 위협과 공포로 강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으로 내적으로 우리의 심령을 빚어내신다”고 한 것과도 같다 하겠다. 이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다면, 그가 우리에게 죄지을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방을 막아 버린다. 그러나 그리스도꼐서는 들판에서 방목하는 망아지들처럼 아무런 제약도 없이 뛰어다니도록 그들의 추종자들을 내어주어 난폭한 방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지도하여 합당한 생활 양식에 이르게 하신다. 에라스무스는 라틴어역(Vulgate)을 따라서, 본문의 ‘본’을 ‘형식(form)’으로 번역했으나, 나는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본(type)’이라는 말을 그대로 보존해 두고 싶다. ‘모형’이라는 단어는 아마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새겨 주신 의의 명백한 형상을 바울이 언급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제정된 율법의 규칙에 일치하며, 이 규칙에 따라 우리의 모든 행동은 형성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행동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19).

19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p.202.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 의란 율법과 의로운 생활의 규칙으로 나는 믿는다. 그 율법의 의는 성화이며,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몸을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토록 하게 하기 위함이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0-23).

22절.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p.204.

죄는 금생에서, 악한 양심의 고통을 가져다 주고, 이 생명이 끝난 후에는 영원한 사망을 가져다 준다. 이에 반해서 의는 우리에게 금생에서는 거룩의 열매를 맺혀주며, 장래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소망케 해준다.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삯이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완전하다. 왜냐하면 사망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

본 구문을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니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의가 주어가 되고 하나님(p.205)의 은사는 술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의미는 대조법을 드러내주지 못한다. 죄는, 바울이 이미 가르쳐 준대로, 사망만을 낳는다. 그런데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사, 즉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 준대로, 사망만을 낳는다. 그런데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사, 즉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영생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즉, 사망의 원인이

죄인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바 의는 우리에게 영생을 회복시켜 준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순전하신 사랑에 전적으로 기인한다는 것을 아주 확실하게 추론할 수가 있다. 바울은 의의 삯은 영생이라고 진술하여 두 구문을 걸맞게 할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 은사 역시 아무 것도 수반하지 않는 단 하나의 은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들의 의로, 옷입은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께 화목되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여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위엄에 대한 어떠한 자만심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제7장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1-4).

1절.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p.207.

바울의 명제와 괄호 속의 말씀은 둘 다 모든 법에 대한 것으로 이해 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하나님의 율법은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제인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가 로마인들의 통치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법에 대한 지식을 로마인들의 통치와 지배를 받고 있었기, 바울이 법에 대한 지식을 로마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바울은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이나 다른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고, 부분적으로는 보통 사람들과 신원 미상의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 실은,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의 폐기에 대해 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들을 꼬집어 뜯듯이 다루고 있는 것으로 그들이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그가 통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원리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원리는 어려서부터 율법의 가르침으로 양육받았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2절. 남편있는 여인이......

바울은 은유를 들어,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율법이 더 이상 정당하게 그리고 그 자체의 권리로는 그것의 힘을 우리에게 행사하지 못하게 된 것을 증명하고 있다....... 비유의 순서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여자란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에는 결혼의 결합관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을 말했어야만 했다. 율법-그것은 우리에게 대해서 남편의 위치를 차지한다-은 우리에게 대해서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다. 만일 바울이 율법은 죽었(p.208)다고 말했더라면, 그는 그의 거친 말씨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는 그의 표현을 바꾸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했다......율법은 그것이 우리에게 대해서 죽게 된 때까지 우리의 남편이었던 바, 그의 멍에 아래 우리가 매어 있었다.

율법이 죽은 뒤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여 자기에게로 맞아들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여 우리를 그 자신에게 결합시켰다.

그러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우리가 연합되었으므로, 우리는 그에게만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가 부활하신 후 영원한 것처럼, 우리 또한 내세에서는 그와 결코 이혼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법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나 같은 의미로 여기서는 사용되어 있지 않다. 한 곳에서는 그것이 결혼생활의 상호 권리를 의미하고, 다른 곳에서는 아내가 매여 있는 남편의 권위를 의미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모세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모세의 사역에 고유한 율법의 그 부분만을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율법이 십계명에 관하여 어떤 점에서든 폐기되어 있는 것으로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영원히 서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석방(벗어남)은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 의로부터가 아니라, 율법의 엄격한 요구로부터와 율법의 요구에 뒤따르는 저주로부터임을 우리는 주의하여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폐기되는 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선한 생활의 규범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자유와 반대되는 성질의 것, 즉 절대 완전에 대한 요구이다. 우리가 이 완전을 (p.209)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사망의 죄책 아래 우리를 매이게 한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5-6).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p.211.

우리가 율법의 지배에 복종하였던 때의 우리의 상태를 서술함에 있어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얻는 바 유일한 혜택이란 그들의 귀가 율법의 외적인 소리를 듣는 것이며, 그들이 내면적으로 성령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더 좋은 처방책이 나오기까지는 대체로 죄가 많고 완악한 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성경에 흔히 쓰이는 표현인, ‘육신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 주의하라.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에게 베푸신 그 특별한 은혜가 없이 그저 일반적인 본성의 은사들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생명 상태가 전적으로 죄가 많다고 한다면, 우리 영혼의 어떤 부분도 본래적으로 순결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유 의지가 갖고 있는 유일한 능력은 화살처럼 사방으로 악한 감정들을 내쏘아 보낼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즉, 율법이 우리 안에서 악한 생각들을 야기시켜,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지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우리의 악한 생각들에 속박되지 않는 지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율법의 행위는, 우리의 내면의 교사이신 성령이 부재할 때에, 우리의 마음을 더욱 자극시켜 그러한 정욕들 가운데로 돌진하게 한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인간의 부패한 본성과 비교하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본성이 부패한 인간의 완악성과 정욕은 의에 의하여 제어되어 억제하면 할수록, 더욱 격렬하게 폭발한다. 그는 다시금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의 육신의 감정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바울은 이처럼 율법은 그것 자체로서는 파괴적이었다고 증명한다. 사망을 초래하는 속박을 그렇게도 열렬하게 갈망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바보들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6절. 영의 새로운 것으로.

p.212.

바울은 영과 의문을 대조시킨다. 우리의 의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형성되었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에서 밖으로 나타나 있는 외형적인 의문(문자)외에는 아무 것도 얻지를 못했다. 이 의문이 우리의 외적인 행위를 구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우리의 정욕의 불길을 제어하지 못한다. 바울이 우리가 새 사람 된 것(newness)을 성령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새 사람이 옛 사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의문이 묵은 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의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때에 그것이 죽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7-8).

7절.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p.213.

그러므로 죄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고 있다. 죄의 원인은 우리의 육신의 부패한 정욕이며,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선언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이 없으면 정(正)과 사(邪)이에 어떤 구별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없으면 자기 도취로 말미암아 완전히 분별력을 결여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기에, 이 말씀은, 죄에 대한 무지가-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앞서 말했다-자기 자신의 정욕을 깨닫지 못한 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 앞 문장에 대한 설명이다. 바울은 일부러 한 가지 종류의 죄만을 다루고 있다......탐심의 죄는 보다 은밀하고, 깊이 숨겨져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따라 판단하는 한, 그것에 결코 주의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가 탐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죄가 그의 마음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만큼 방종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의 의가 자신의 탐심으로 말미암아 방해 받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잠깐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마침내 죄인인 것을 깨달았을 그 때에 그는 탐심-아무 인간도 이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다-이 율법에 의하여 금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거스틴은 바울이 이 탐심이라는 말씀에 율법 전체를 포함시킨 것으로 말한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이 말은 사실이다......(p.214)로마의 법률들은 사건의 결과 대신, 사건의 동기가 되는 고의를 벌하였다. 철학자들은 아주 정교하게 악과 덕 모두를 마음 속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우리의 탐욕의 마음에까지 미치신다. 그런데 탐심은 의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악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탐심은 철학자들에게 죄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교황주의자들은 중생한 자의 경우에는 탐심이 죄가 아니라고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이 감추인 질병속에서 자기의 죄의 근원을 발견했노라고 말한다. 이 사실로부터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탐심으로 눌려있는 자들은 그들의 허물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결코 핑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편, 우리의 승낙을 확보한 부패한 정욕과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며 영향을 주는 탐심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그러므로 모든 악은 죄와 육신의 부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율법은 단지 악이 이용하는 기회로서, 악의 근인(the occasion of evil)이다. 바울은 율법이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여 더욱 광적인 것으로 폭발하도록 하는 자극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 말씀들은 율법이 전달해 주는 죄에 대한 지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그가, “감추어져 있을 동안에는 아무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나의 모든 탐심을 율법이 내 안에서 들추어 냈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하겠다. 그러나 육체는 율법에 의해서 보다 민감하게 충동을 받아 탐심을 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또한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의 경우도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죄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말해온 것이 문맥에 보다 더 잘 들어맞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즉시로 덧붙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p.215

바울은 위에서 그가 하는 말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율법이 “없으면 죄에 대한 지식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었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9-12).

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죄가 자기에 대하여 또는 자기 안에서 죽은 때가 있었음을 뜻하는 데 있다. 그가 언제든지 율법 없이 지냈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살았더니”라는 문구는 그러나, 특별한 언외의 뜻(connotation)을 가지고 있다. 그가 살아있다고 하는 이유, 즉 비록 그 자신의 의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만하고 있었지만, 그가 정말로 죽었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이유는 율법이 부재한 데 있었다. 그 문장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즉, “내가 한 때 율법 없이 지냈을 때에, 내가 살아 있었다”고 읽을 것 같으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이 강조 용법이라고 말한바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의롭다고 가장함으로 해서 그가 또한 살아있는 것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뜻은 이렇다. 내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버림으로 해서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알아 차리지 못했던 나의 죄가 잠잠하여 버림으로 해서 죄를 지었을 때, 내가 알아 차리지 못했던 나의 죄가 잠잠하여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었다. 다른 한편, 나는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생명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서, 나는 나 자신으로 만족하였었다. 죄가 죽는 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요, 또한 죄가 사는 것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또는 율법이 부재하여 바울이 언제 살아있는 것으로 주장했는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의 교훈으로 교(p.216)육 받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율법의 교훈은 의문의 신학(the theology of letter)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것을 배우는 자들을 겸손하게 해주지 않는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유대인들은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볼 수 없도록 수건으로 덮여 있었다(고후3:14). 그 자신의 경우도 역시, 그가 그리스도의 영을 결여한 반면 그의 눈이 수건으로 덮여 있었기에, 의의 외형적인 가면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율법을 부재한 것으로 언급한 것은, 율법이 그의 목전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진지한 의식을 그에게 율법이 통감케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위선자들의 눈들은, 우리로 하여금 탐심을 갖는 것을 금하는 계율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가를 그들이 알아 볼 수 없게 하는 수건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바울은 이제 율법을 참되게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율법이 이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죽은 자에게서 죄를 깨우쳐준 것은, 그 율법이 바울에게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 가득차 있는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보여 주었고, 또한 동시에 그 율법이 그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위선자들이 그들의 죄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우쭐대면서, 그들이 신뢰하는 마취 상태에 있는 자만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것을 말하고 있다. 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 안에 있는 생명의 도를 보여 주고 있으며, 우리가 준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그 계명이 주어졌다. 둘째, 그러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율법이 우리를 불러낸 그 인생의 길로 곤두박질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망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의 본질과 우리 자신의 사악함을 구별해 둘 필요가 잇다. 이로부터 결론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치명상을 가해주는 것은 하나의 불상사라는 점이다. 이는 마치 불치병이 치료할 목적의 처방에 의해 오히려 급성병으로 악화되어버린 것과도 같다. 불상사가 율법과 불가분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율법은 복음과 비교될 때, 다른 곳에서 사망에 도움을 (p.217)주는 것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율법이 그 자체의 본질상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패한 까닭에 율법의 저주를 초래한다고 하는 취지는 유효하게 들어맞는다.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바울은 또 다시 기회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율법이 저절로 사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망과 관련되는 것은 다른 요인들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리고 불의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가 알도록 하려는 데 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느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13).

13절.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기 전에는,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을 근거로 삼아(즉,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드러나게 되는 때, 그것은 참으로 죄라고 칭해지는 것이다......그 의미는, 죄의 잔학성이 율법에 의하여 탐지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죄가 엄청나게, 그리고 난폭하게 터져 나오지 않았었다고 한다면,(p.219) 그것은 죄로 인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죄는 이처럼 엄청나고 난폭하게 쇄도하는 한편, 생명을 바꾸어 사망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변명할 근거들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4-17).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바울은 이제 율법과 인간의 성품을 보다 면밀하게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악의 근원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바울은 중생한 사람의 실례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 중생한 사람 안에서 그의 영이 주의 율법에 기쁨으로 순종하려고 하는 만큼 육신의 자재들이 그 율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그러나 바울은-우리가 말한 대로-율법과 인간의 본성을 간단하게 비교하고 있다. 인간과 관련이 있는 문제들 중에 영과 육 간에 존재하는 경우보다 더 심한 불일치는 없기 때문에(왜냐하면 율법은 영적이요 인간은 육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 율법 간에 무슨 일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두움과 빛과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나, 율법을 신령하다(영적이다)고 부름으로 해서, 어떤 주석가들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바울은 율법이 우리 심령의 내면적인 감정들을 필요로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대조함으로써, 육적(육신에 속하여)이라는 단어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율법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육과 영에 대한 대조가 여기에 명시되어 있다. 육신이라는 용어가 인간들이 모태로부터 가지고 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은 문맥으로 미루어 보아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며, 어느 정도는 이미 또한 드러났다. 육신이라는 단어가 혈통을 가지고 태어나 선천적인 성품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적용된 명칭인 것은, 인간들이 타락하고, 아무런 평판도 없으며, (p.220)조잡하고 세상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율법의 완전한 교훈은 그러므로 여기서 인간의 타락한 성품과 대립이 된다. 그러므로 그 뜻은, 율법은 천국적이고 천사적인 의를 필요로 한다. 이 의에는 아무런 흠도 나타나지 않으며, 그 의는 더 이상의 청결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다만 그 의를 거스려 저항하는 것만을 행할 뿐이다. 오리겐의 해석은 옛날에 많은 지지를 얻었겠지만, 그것은 논박할 가치조차도 없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율법이 바울에 의해서 신령하다고 불리우는 것은 성경이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죄가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밝혀 주고 있다. 본질상 인간의 죄의 종인 것은, 몸종의 경우 그들이 소나 당나귀인 것 마냥 그들의 주인들이 그들을 사서 자기 마음대로 부려 먹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죄의 세력에 완전히 부림을 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온 마음과 온 심령과 모든 우리의 행위는 죄를 짓기가 쉽다. 나는 언제나 강박 현상(즉,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강요당하여 죄를 짓는 것)을 배제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대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 의지는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죄에 탐닉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는 죄짓는 것 외에 달리 행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속에서 사악함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악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교가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강요된 억제가 아니고 자발적인 죄에 대한 순종이다.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바울은 이제 이미 거듭난 사람에 대한 보다 특정한 실례를 언급한다......(p.221)그러나 신자의 의지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선을 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반하여, 완강하게 반항하며 저항하는 본성의 부패성이 그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에게서 우리의 본성율법의 의 사이에 얼마만한 정도의 불일치가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적합한 실예를 볼 수가 있다. 또한 중생한 자가 보여 주는 실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단순한 고찰보다도 다른 구절에 대해 보다 적합한 증거를 제공해준다......그러므로 이 논증의 전체를 보다 확실하고 충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에 의해 언급된 이 갈등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결케 된 연후에야 비로소 사람 속에 존재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사람은 그 자신의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정욕이 완전히 발동하고 만다. 비록 경건치 않은 자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그리고 그들이 악을 즐길 때에는 다소 쓴 맛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들이 악을 미워하거나 선을 좋아한 다는 것을 추단할 수가 없다. 이처럼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고통들을 당하게 허락하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면에서 그의 심판을 나타내시려는 것이지 의를 사랑하거나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들이 갖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경건치 못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양심의 판단을 받아 자기들의 죄악을 깨닫게 될 때 그 죄악들을 정죄하지 않을 만큼 그들의 마음이 가리워져 있거나 결코 완악해지는 법이 없다. 지식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들은 옳고 그릇된 것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또한, 그들은 그들의 죄의식(p.222) 때문에 혐오감에 사로잡히게 되어, 금생에서마저도 일종의 정죄를 선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기뻐하여 죄를 만족하게 여기고, 그래서 아무런 혐오감도 없이 죄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양심의 가책은 그들의 의지의 반감에서라기보다는 심판의 반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중생시키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육신의 잔재로 말미암아 땅에로 다시금 뒷걸음치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이같은 미칠듯한 상태에서 그들 자신의 본성을 대적하여 싸우며 또한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신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정죄하는 것은 그들이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강요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감정으로 그것들을 증오하고 죄를 범하는 그들의 행위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영육간의 전투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5:17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사람이 그의 영혼 전체의 동의와 감정의 일치를 얻어 죄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과, 그러나 그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순간 즉시로 분열이 생긴다고 말씀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생은 오직 금생에서만 시작된다. 중생한 연후에도 남아있는 육신의 잔재는 부패한 감정들을 언제나 수반하며, 이와같이 해서 성령을 대적하는 투쟁을 야기시킨다.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주제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계획을 미숙한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의 능력에 대한 그러한 서술을 발견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철학적인 원리에 있어서 훨씬 깊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이래로 사악한 것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의 마음 속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이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궤변 철학자들은 자유 의지를 정의하거나 또는 인간의 본성의 능력을 평가하려고 할 때, 그들은 이 본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이미 진술한 대로, 여기서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연약성의 성격과 정도를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동안 어거스틴도 이와 같은 오류에 빠져서 바울이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p.223)그러나 본문을 면밀하게 살피고 난 후에 그의 잘못된 해석을 취소했을 뿐만 아니라, 보니페이스에게 보내는 그의 첫 번째 책에서 많은 강력한 논증들을 들어서 본문은 중생한 자들에 대한 것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노니.

즉,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그가 범한 행위들을 그 자신의 것으로 그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행위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인정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에라스무스는 인정한다는 말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꽤 잘된 것이기는 하지만, 모호한 감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안다’라는 번역을 그대로 취했다. 우리는 이로부터 율법의 교훈이 바른 판단에 아주 잘 일치하여 맞기 때문에 신자들이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인간 이하의 짓으로 알고 결단코 그러한 우(憂)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가르침이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이 오해하여 바울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본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바 ‘율법을 범하는 것’은 경건한 자들의 모든 과오를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로 인하여서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선한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심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우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그가 행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가 율법의 모든 부분을 전부 성취하지 못하고, 그가 애쓰다가 다소 지쳐 있기 때문이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바울에게는 언제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다소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으면서도, 그가 원했던 것을 행하지 못하는 즉, 민첩하게 선을 추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다만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또한 그가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 실패한 것은 그의 육신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넘어졌기 때문이라고 불평한다......‘원한다’ 그리고 ‘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현의 말씀은 성령에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들 가운데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육신도 그 자체의 의지를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바 의지는 특정한 (p.224)감정을 가지고 추구한 것을 뜻한다. 그를 대적하여 겨루는 것을 그는 그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으로 일컫고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우리가 앞서 언급한 바, 바울이 여기서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성령의 은혜가 얼마간 신자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사실로 말미암아 건전한 마음과 율법의 의 사이에 있는 일치가 설명되는 것은, 육신이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이 말씀은, 사악한 행위를 육체의 탓으로 돌림으로 해서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위장할 수 있는 정당한 방어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경솔한 사람들처럼, 자신은 비난 받을 것이 없는 양,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사람의 탄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감정과 그의 육신간에 있는 불일치의 정도에 대한 선언이다.......본문 또한 바울이 여기서 이미 거듭난 경건한 사람들만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해 주고 있다......(p.225)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 자신이 죄에게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참으로 그 자신은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의를 간절한 마음으로 추구하고 열망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그 자신안에 새겨 두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기 때문에, 죄가 그의 영혼의 한 구석에만 남아 있는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8-20).

18절.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바울은, 본성에 관한 한 그 속에 아무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속이라는 말의 뜻은 ‘내게 관한 한’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의 논술의 서두에서 아무 선한 것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안에 거하되, 그러나 그의 육신에게는 결코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지 않도록, 수정을 가한다. 여기서 다시금 그는 그가 모든 인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신의 잔재성령의 은혜 때문에 자신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만일 자신의 어떤 부분이 부패로부터 면제되고 그래서 육신에 속하지 않는다고 아니할 것 같으면, 무슨 목적으로 이 수정을 첨부하였겠는가? 바울은 ‘육신’이라는 용어 아래, 성령의 성결케 하는 것을 제외하고, 인간 본성의 모든 자질과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영’은 일반적으로 육신과 대조를 이루는 까닭에, 바울이 말하는 바 ‘영’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성령이 악을 깨끗이 씻어주고 그래서 아주 잘 개조된 까닭에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서 빛나는 영혼의 그 부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과 ‘영’이라는 두 용어는 영혼에 해당된다. 후자는 중생된 부분과, 그리고 전자는 아직도 본성적인 감정을 보유하고 있는 부분과 관련되어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이 말씀은 그가 무력한 욕구만을 가지고 (p.226)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위의 효력이 그가 원하는 것(will)에 부합되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 곧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또한 이 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은, 육신이 신자들로 하여금 신속히 행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또한 과오를 범하도록 그들에게 방해가 되는 많은 장애물들을 그 육신이 놓아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잘 준비하여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의지’(원함)는, 믿음에의 준비로써, 성령은 경건한 자를 단련하여, 그들이 열심을 내고 준비하여 그들의 지체를 하나님께 순종케 하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의 능력이 그의 원함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것, 즉 그가 바랐던 선을 성취하는 일이 그에게 없다고 바울은 말한다.

19절.

본 절의 말씀은 앞의 말씀과 같은 취지로 되어 있다. 그는 그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그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은, 아무리 신자들이 바르게 감화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의 연약성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어떤 행위도 흠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경건한 자들의 몇몇 실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들의 생애의 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한 가장 선한 행위들이 언제나 죄의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는 한, 어떤 상급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결론지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범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1-23).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p.227.

바울은 여기서 사중의 법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런데 이 법만이 법으로 불리우는 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의 삶이 바르게 형성되는 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법에다 마음의 법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코자 하는 충성스런 마음의 준비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가 준봉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죄의 법’이 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이 죄의 법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 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육신 안에서 불법이 행사하는 세력을 뜻한다. 폭군의 법도, 아무리 그것이 간악할지라도, 여전히 법이라고 불리운다. 이 죄의 법에다 바울은 ‘지체 속에 있는 법’을 상응시키고 있다. 이 법은 바로 그의 지체 안에 있는 탐심이다. 그는 탐심과 불법 사이에 존재하는 일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즉, 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선한 것을 행하려고 힘쓰는 동안, 그들 자신 안에서 포악한 법을 발견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반대하는 악한 성향이 그들의 골수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22절.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분열의 성격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분열로부터 어거스틴‘기독교인의 투쟁’이라고 부르는 영육간의 투쟁이 생겨나는 것이다......영은 사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해주나, 육신은 그를 반대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인간은 여러 가지 욕망에 의하여 마음이 산란해져 있기 때문에, 이제 그는 이중의 피조물이다.......(p.228)바울이 그가 그의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 것은 그가 아직도 악한 정욕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충동을 받는다고 하는 사실이 육신적인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영적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속 사람’과 ‘지체’의 뜻을 주의깊게 유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해서 나쁜 길로 빠졌다. 그러므로 속 사람이란,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하여 거듭난 영혼의 영적인 부분을 뜻한다. ‘지체’란 다른 나머지 부분을 말한다. 영혼이 인간의 보다 우등한 부분이고 몸이 더 열등한 부분이듯이, 영은 부패하고 오염된 영혼으로써 몸을 대신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영은 ‘속 사람’이라고 불리우고, 육신은 ‘지체’라고 하는 것이다. 속 사람이 고린도 후서(4:16)에서는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 있으나, 본문의 경우는 내가 내린 해석이 적당하다. 영을 특별히 속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심령과 숨은 감정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반하여 육신의 정욕은 사람 밖에서 길 잃고 헤매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땅에 비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바울이 지체라는 말을 육신적인 것들을 경멸할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마음의 법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바르게 정돈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임에 분명하다.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지식이 없다고 한 것은, 그들의 영혼이 그 이성을 상실한 까닭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4-25).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말씀으로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육신으로 더불어 투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p.229)자신 속에서와 하나님 면전에서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애통하고 비탄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오직 단 한분의 구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럼, 그가 의심에 빠져 있기나 한 듯이 누가 그를 건져내 줄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가 말하는 ‘사망의 몸’이란, 죄 덩어리 또는 인간 전체를 형성하고 구성 요소들을 뜻하나, 예외적으로 그의 경우에서만은 죄의 잔재들이 남아 있어서 그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이다......바울이 가르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영안이 열려 있어서, 그들의 본성의 부패 및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사망을 하나님의 율법과 분별력을 가지고 분간하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라는 단어가 바깥 사람과 지체를 뜻하는 것은, 죄의 기원이 창조의 법칙을 인간이 떠나서 육신적이고 세속적으로 되어 버린 데 있다는 것을 바울이 유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 야수보다는 더 낫다. 그러나 그의 참된 우월성은 상실되었으며, 그리고 남아있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패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그의 영혼이 타락되 있는 한, 육신으로 변해버렸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기에 창 6:3에서,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여기서 그의 영적인 우월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래서 경멸할 목적으로 동물에 비교된 것이다.

바울의 이 본문 말씀은 육신의 모든 자랑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가장 완전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한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사망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자신들을 철저하게 살펴 보면, 그들 자신의 본성에는 곤고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나 바울은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서 완전주의자들이 무감각에 빠지지 않도록 고통의 절규를 깨우쳐주고,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들의 죄악에 대한 유일한 처방(p.230)책으로써 사망을 구하도록 그들에게 명하고 있다.

25절.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짧은 끝맺음의 말에서 바울은, 신자들은 그들이 육신에 거하는 동안에는 결코 의의 목표에 이를 수가 없고, 몸을 벗어버릴 때까지는 계속 그들의 영육간의 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p.231)그는 다시금 마음이라는 단어를, 철학자들에 의해 높임을 받게 된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조명을 받음으로 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결의하게 된 그 부분에 적용하고 있다. 바울은 지식-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건져주신 것에 대해 아는 지식이다-을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식에다 마음의 간절한 소원을 연결지어 놓았다. 이 예외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것과 더불어, 그는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많은 타락과 부패로 더럽혀진 채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본문의 구절은 몇몇 불온한 망령들이 현재 재생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순수주의파(Purists,Cathari)의 가장 유독한 교리를 정죄하는 데 사용되는 유명한 구절의 말씀이다.

제 8 장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1-4).

1절. 그러므로 이제......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p.232.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영을 좇아 행한다고 하는 말은, 모든 육신의 감정을 완전히 떨쳐버림으로써 그들의 생활 전체가 오직 천상적인 완전함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들이 육신을 억제하고 죽이는 데 전(p.233)심전력함으로써 참된 경건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신자들의 경우를 가리켜 육신을 좇아 행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심이 역사하는 곳에는 어디서나 육신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의 오염이 다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 성령은 우리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서 우리에게서 죄책의 얼룩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별하여 참된 순결에 이르게 한다. 바울은 덧붙여 말하기를, 성령이 생명을 준다고 하고 있다. 히브리 문법에 따르면, 소유격은 형용사로 취급하여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생명의 성령은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율법의 의문에 매이게 하는 자들은 그를 죽음에 복종케 하는 셈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율법의 의문에서 결과하는 육신의 왕노릇과 사망의 폭군노릇을 바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칭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중간에 위치한 것이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의를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줄 수 없으며, 대신 우리를 죄에 매이게 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오랏줄로 사망에 매이게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이렇다. 사람들이 율법의 의무아래 있는 한, 그들은 죄의 굴레에 매여 있게 됨으로 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육체의 무절제한 정욕을 바로잡음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법을 폐하며, 동시에 사망의 죄책에서 우리를 건져내 준다......그는 우리가 율법의 외적인 교훈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때에 동시적으로 또한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죄의 저주가 (p.234)우리에게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마치 바울이 중생의 은혜의의 전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어떤 주석가들처럼, ‘죄와 사망의 법’을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해석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지나치게 귀에 거스리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율법이 죄를 증가시킴으로써 사망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바울은 이러한 비위에 거스리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극히 삼갔던 것이다. 그러나 “죄의 법”이 육체의 정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서, 바울이 자기가 그것을 정복한 것으로 말을 한 것처럼 설명하는 자들의 견해에도 또한 찬성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해주는 공로없는 사면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질 것 같다. 나로서는, ‘법’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놓아 두고 싶으며, 에라스무스처럼, ‘권세’ 또는 ‘세력’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 바울은 결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3절. 율법이......할 수 없는 그것을.

4절 상반절의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라는 구문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값없는 칭의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화목케 하는 용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죄를 이기는 방법을 거듭나게 하는 영에 의하여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으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이 구절을 덧붙였겠는가? 그러나 바울이 신자들에게 값없는 사죄를 약속하고 나서,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 그래서 육신을 탐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지 않는 자들에게 이 교리를 그가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하다......(p.235)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속죄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확언한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의를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율법에 요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일 우리에게 율법을 성취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밖의 다른 대비책이 강구될 하등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신 것은 우리 인간들의 능력의 성격과 범위를 그가 인정하신 때문인 것으로 착각하고서, 율법의 교훈들에 의하여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바울은 율법을 그 연약성을 인하여 불경하게 자기가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하고, 또한 율법을 의식상의 규례에 국한시켜 아무도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밝히 말하기를, 이러한 연약성은 율법안에 있는 어떤 흠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신의 부패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이행할 수만 있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훈에 관한 한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는 율법이 의의 완전한 법칙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p.236)그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의 전 능력이 무산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의식법의 경우에만 의롭게하는 능력이 없다고 바울이 말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오류와 망상이 논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고, 율법의 교훈에는 아무런 흠결도 없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율법의 ‘연약성’은, 사도가 (아스데테이아스)라는 단어를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그 개념으로 이해하여, 단지 대수롭지 않은 연약성이 아니라 완전한 무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도는 율법이 의를 주는 데 있어서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비록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사망을 향하여 무모하게 치달리는 우리를 돌이켜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자기 아들을......보내어.

바울은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를 회복시켜 주는 방식에 대해 이제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바로 그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즉, 그는 우리의 죄상을 지워버림으로써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얽매이게 한 죄책을 폐지하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죄를 정함으로써 우리가 의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의 죄책이 제거된 까닭에 우리가 사면을 받게 되어,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하신 때문이다.

그러나 우선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어졌다고’ 말한 것은, 그 의가 우리에게는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위함인데, 이는 그 의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로를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기꺼이 승낙해 주는 때에 한해서만 그들이 의로우며,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신으로 성취하신 속죄에서 의를 빌려 오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육신은 전혀 죄로 더럽혀진 것이 없지만, 그 육신이 죄있는 모양을 취한 (p.237)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가 형벌을 당했고, 그리고 그것이 사망에 굴복되가니 한 것처럼 분명히 사망이 그리스도의 육신에 그것의 모든 권세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연약한 자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참뜻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병약한 육신을 기꺼이 입으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죄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보다 더욱 동정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죄있는 성품과 닮은 어떤 유사점이 그에게서 나타났다.

그리고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한글 개역 성경에는 ‘죄를 인하여’로 되어있음; 역자 주)......그러나 ‘죄’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속죄제물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으로 나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즉, 히브리어로는 (아삼)이라 불리우고, 헬라어로는 저주가 내려진 제물을 (카타르마)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다. 바울은 바로 그것과 같은 의미로 고린도후서 5:21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전치사 (폐리)는 여기서 원인 또는 이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바울이 말하기를, ‘그 제물로 인하여’, 또는 ‘그리스도에게 지워진 죄의 짐 때문에’ 죄가 그것의 힘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그것이 이제는 우리를 그것(죄)자체에다 얽매어 예속시킬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 것과도 같다. 소송 판결에서 패한 사람들처럼, 그의 육신에 “죄를 정했다”(정죄되었다)고 은유적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사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죄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대당했던 그 죄의 나라가 멸망 받았다고 하는 것과도 그 뜻이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자신이 취하셨다. 즉, 그는 우리의 저주를 자신에게 지우고, 우리에게 그의 축복을 주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육신에’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죄가 우리의 본성 자체(p.238)안에서 정복되고 폐지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때에 우리의 확신을 돋우어 주고 있다. 이로써 바울이 당장 선언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본성이 그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되는 것이다.

4절.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 율법을 그들이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주석가들은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릇된 해석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동안에는, 율법의 의가 자기들에게서 완성될 만큼 믿음의 진보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절의 말씀을 죄 용서에 적용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율법이 충족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이 이로 말미암아 육체에 나타났으며, 그래서 율법의 엄격한 요구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의를 그가 그의 영의 매는 줄로 자신에게 연합되게 한 사람들에게만 전가시켜 주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역자로 오해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중생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면죄 교리를 악용하여 육신의 정욕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 교리가 의로운 삶을 추구하려는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이 교리를 악의를 가지고 비방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5-8).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p.239.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것’과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 이 정의를 바울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정확하게 구별하여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뒤에 가서 알게 되는 대로, 비록 신자들이 여전히 그들의 육신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좋은 소망을 주어 격려하려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다......바울은 신자들을 격려하여 좋은 소망을 갖게 해주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를 생각하도록 되어 있는 경우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경우는 언제나,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의 표적이다. 이는 마치 성령이 소멸되고 육신의 나라가 우세한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앞서 내가 준 권면의 말을 간단히 반복하여 말하겠다. ‘육신에 있는 것’ 즉, ‘육신을 좇는 것’은 거듭남의 은사를 결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본래의 인간” 그래도 계속해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7절. 할 수도 없음이라.

p.241.

궤변론자들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서 격찬하는 자유 의지가 갖고 있는 능력이란 고작 그런 것이다. 그들 자신들이 공공연하게 반박하는 것, 즉 우리 인간으로서는 우리의 감정을 율법에 굴복시킬 수 없다고 하는 그 점을 바울이 여기서 명맥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랑하기를, 만일 인간의 마음이 성령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는다고 하면 그 마음이 아무 쪽으로나 향할 수가 있고, 만일 성령께서만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하면, 우리의 능력으로 선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 또는 거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또한 생각하기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준비해 놓은 선한 행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선언하기를, 우리의 마음은 지나치게 딱딱하고 완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멍에에 본래 굴복될 수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들 중에 한두 가지를 논하고 있는 (p.242)것이 아니라 부정한 표현을 사용하여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인의 마음은 자유 의지에 대한 비기독교철학을 멀리해야 하며, 우리 모두 자신이 본질상 죄의 종인 것을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함을 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타의 자유를 자랑하는 것은 극도로 우둔한 소치인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9-11).

9절.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바울이 그가 이 서신을 써 보내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일반적인 진리를 가정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강화를 특별히 그들에게 말해 줌으로써 보다 그들을 강력하게 감동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제거해 준 사람들의 수에 그들이 속했다는 것을 방금 주어진 정의에서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택자들에게서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어떤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그들에게 바울은 새 생명을 권장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바울은 적절하게 말씀을 덧붙여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좀더 면밀하게 성찰케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하나님의 (p.243)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중생하여 정결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다......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영적인 사람들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스리시는 자들이요, 자신들의 충동에 근거하여 이성에 순종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은 성령 충만이 아무에게도 있지 않다), 비록 그들이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육체의 찌꺼기들을 발견케 되지만, 그래도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그들이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영을 좇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의 중요한 기능들을 지배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람이 그의 주요한 본성에 비추어서 일컬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성령의 나라에서는 육신이 전폐된다. 성령께서 내주하시어 왕노릇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그의 영과 분리시키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죽은 형상이나 시체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가 말씀하신 바, 값없는 사죄가 거듭나게 하는 성령과 불가분하다는 권면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그의 영과 분리시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갈기갈기 찌는 것이 되고 만다.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바울은 이제 그가 성령에 관하여 앞서 언급한 것들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식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성별하여 자신을 위한 성전으로 삼으신 것처럼, 바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적인 존재들로 간주된 것은 온전하고 흠이 없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시작된 새 생명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이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영’이라는 단어가 영혼을 의미하지 않고, 거듭나게 하는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미 독자들에게 말씀드린 바 있다. 그런데 바울이 거듭나게 하는 이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며 (p.245)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소생시키어 우리의 죽을 육신을 멸하시고 마침내는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몸’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세속적인 불순물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완고하고 무감각한 덩어리를 의미한다. 그 몸은 조잡한 것만을 즐거워한다. 그렇지 않다면, 죄에 대한 책임을 몸에 돌리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영혼은 결코 생명일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자체로서는 저절로 생명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에서는 죄가 우리를 정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영이 승리하신다는 것이다. 첫 열매들만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해도 아무런 장애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의 한 줄기 섬광마저도 생명의 씨이기 때문이다.

11절.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p.246.

사도가 의미하는 바 ‘죽을 몸’이란 아직도 사망에 굴복한 채로 남아있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바울의 일반적인 관례는 이 명칭(죽을 몸)을 우리의 조악한 부분에 적용하는 데 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게 될 마지막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고, 성령의 계속적인 활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결론 지을 수가 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의 계속적인 활동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육신의 찌꺼기들을 제어하시며 우리 안에서 거룩한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2-14).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여기서 바울의 문장은 다른 부분, 즉, 우리가 성령께 빚진 자들이라는 대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는 아무런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바울의 관례가 원리에서 권면의 말씀을 항상 끌어내는 데 있듯이, 이 결론의 말씀도 강력하게 권고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렇게 그는 경고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5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본분인 하나님의 의에 전념하기 위해서 육욕을 포기하는 때에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논리인 바,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도 (p.247)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부질없이 말하는 어떤 욕설장이들의 통상적인 관례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과 태만으로 소멸해 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바울은 그들의 나태함을 엄정하게 바로잡기 위해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이 경고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게 해준다......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주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 또한 사실이요 확실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를 신봉하는 것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두가지 목적을 위하여 우리에게 보낸 바 되신 것은, 그릇된 불건전한 신앙에 의해 그를 갈기갈기 찢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이 이처럼 그의 견해를 조절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자신들이 허물 투성이임을 의식하고 있는 경건한 자들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도 죄에 굴복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육신을 죽이기를 힘쓸 것 같으면,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여전히 약속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의 멸절을 엄격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고, 다만 육신의 정욕을 정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명하고 있을 뿐이다.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은 바로 앞서 되어진 말씀에 대한 증명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자만이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고 있는 이 표시가 있어야만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명무실한 위선자들의 헛된 자랑이 꺽이게 되고, 신자들은 이렇게 해서 그들의 구원에 대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p.248)......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다양하다는 것을 알아 보는 것은 적절하다 하겠다. 모든 피조물이 보존되고 기동하는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가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만 특유하게 있는 성령의 역사들이 있다. 이 역사들은 그것들의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령은 ‘성화’를 의미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성화’를 의미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가 택한 자들외에는 아무에게도 이 성화의 은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5-16).

15절.

p.249.

하나는 ‘종의 영’이라고 바울이 칭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율법에서 얻을 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으로서, 그것은 복음에서 나온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전자는 과거에 주어진 것으로 공포심을 자아내고, 후자는 현재에 주어진 것으로 확신감을 갖게 해준다......‘다시’라는 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여기서 율법을 복음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가 오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준 측량할 수 없는 특전으로서, 우리는 이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양자의 영을 받지 못했다고 하거나, 또는 율법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종들이었고 아들이 아니었다고 추론하여서는 안된다. 바울은 율법 시대의 사람들을 복음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다기보다는, 율법의 역할을 복음이 주는 혜택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약 시대의 선조들을 다루던 것보다는 훨씬 더 관대하게 신자들을 다루고 계신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훈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만 우리가 구약의 선조들보다 나을 뿐인데, 이는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다윗의 신앙이 우리의 것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몽학 선생’하에 두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지금 알려진 그 자유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p.251.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차별없이 모든 언어로 하나님이 기도를 받으시게 될 정도로 하나님의 자비가 이제는 온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목적은 모든 민족들 간에 존재하는 감정의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사이에 아무 차별이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나안의 방언이 모든 민족에게 공통어가 될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좀 다르게 말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같다. 그는 언어의 외적인 형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 일치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순전한 예배를 드릴 때의 한결같은 동일한 열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짖느니라’는 단어는 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어 있다. 이는 곧 ‘우리는 의심쩍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두려움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하여 하늘에 닿게 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율법 아래에서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복음 아래에서처럼 자유롭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휘장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성소로부터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출입문이 활짝 열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큰 소리로 자랑할 수가 있다. 그런 까닭에 이같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2:23). 그 약속이 더욱 분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p.252.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게 증인이 되신다는 것만을 단순히 말하고 있지 않으며, 라틴어 Contestatio(컨테스타티오;증거)라는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 Contestatio (컨테스타투르;증거하다)라는 라틴어로 번역될 수 있었던 복합 동사를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우리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증거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안내자요 또한 교사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가 이같은 확신에 선행하여 있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이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16절의 이 말씀은 앞 문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실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이 확신을 우리 마음 속에 넣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마음이 확신으로 차있을 때에만이 우리의 입이 열리는 것으로 보아서, 만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부성애에 관하여 우리의 마음에 증거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의 혀는 벙어리가 되어 기도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그래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 속으로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할 수가 없다는 원리를 언제나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불러 기도드림으로 해서만이 우리의 신앙이 증명될 수 있다고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원리도 이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에게 성령의 이같은 증거를 회상하게 해주고, 은혜의 약속을 깨달은 자들이 힘써 기도할 때만에만이 모든 신자의 신앙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알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본 구절은 도덕적 추측에 관한 궤변론자들의 천박한 논증들에 대한 좋은 반박이기도 하다. 궤변론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추측이란 마음의 불확실성과 근심 또는 동요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본 구절에는 그들의 반론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영이 증거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보다 충분하게 논하고 있다. 또한 이 서신은 본 구절에 대한 보다 충분한 (p.253)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울 수가 없다고 하는 명제는 여전히 성립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의 확실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지식’이라는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7-18).

17절.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p.253.

바울이 이같이 말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원인을 우리의 공로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같은 방식의 표현법은 성경에 흔하다. 바울은 구원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성(p.253)취해 주기 위해서 밟은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행위에서 오는 공로를 반대하여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충분하게 논증하였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인내를 권유하고 있지만, 우리의 구원의 근원에 대해서 논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19-22).

19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바울은 그가 우리에게 권면하였던 인내의 본을 말못하는 피조물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본 구절에 대한 각종 해석들은 생략하기로 하고, 나로서는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즉, ‘현재의 고난을 알게 됨으로 해서 감정이 상하게 되면, 부활의 소망을 간절히 고대하지 (p.255)않을 피조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바울은 두 가지의 진리, 곧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하고 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로부터 영원한 영광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또한 알 수 있다. 사실 그 영광이 값진 것이기에 만물이 그것을 간절히 고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고대한다’라는 표현은, 다소 흔하지 않은 진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합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의미하고자 한 것은, 피조물들이 큰 근심에 억눌려 있고 또한 간절히 고대하는 나머지 안절부절 못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게 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영광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대 우리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는 요한이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요일3:2). 나는 바울이 말한 원문을 그대로 살려 두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때까지’라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내 생각에는, 사도의 의도를 충분하게 드러내지 못하면서도, 지나치게 의역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지막 날에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들의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고서 하늘의 영광을 입게 될 때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바람직하고 행복한가 하는 것이 그날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에게 그 소망이 있는 것으로 말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눈을 뜨고 보이지 않은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생명이 외관상으로 초라한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이다.

20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바울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목표를 선포하되 그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피조물은 부패할 수 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온전하게 회복될 때까지는 새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것들의 재생을 기다리는 한편 하늘 나라가 나타날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들이 ‘허무한데 굴복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흔들림이 없이 확실하게 남아 있지 못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버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히 허무한 것을 본래적으로 완전한 것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뜻이 아니요.

이성이 없는 피조물들에게는 아무 의식이 없는 까닭에 (p.256)‘뜻’이라는 단어는 본래적인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본질은 본래적인 그것은 성질을 따라서 그 자체를 보존하며 완전해지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의인화 용법을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부분들이 의식을 부여받은 존재인 양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만일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불확실한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보다 높은 차원에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우리의 우둔함을 크게 부끄러워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21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p.257.

우리는 이같은 사실로부터 우리가 받은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추론할 수가 있는데, 이는 천하에 모든 무죄한 피조물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중에 발버둥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인류가 받은 정죄는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바울의 의미하는 바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더불어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나름대로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인류를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시는 것처럼 현재의 타락된 세계를 그렇게 완전한 상태에로 회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짐승이나 식물들이나 금속들에 의해서 증명되게 될 완전한 상태에 대해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서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옳지도 않다. 왜냐하면 썩어짐의 주요한 요소는 부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리한 그러나 균형을 잃은 주석가들은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불멸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여부를 묻는다. 만일 이같은 억측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것 같으면, 결국 우리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니라(23-25).

23절.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어떤 사람들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단어를 진귀하고 두드러지게 뛰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나 나로서는 그같은 해석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호한 표현을 피하기 위하여, 그 단어를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을 사도들에게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서 또 몇 방울의 성령으로라도 뿌림을 받은 일이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즉 믿음에 크게 진보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 상당한 양의 성령을 부여받았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하기에는 요원한 사람들에게 적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같은 사람들은 처음 시작하는 것들 또는 처음 익은 열매들로서, 완전히 다 익어서 수확한 것들과는 대조가 된다. 만일에 있을 성령 충만이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불안하여 동요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바울은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까지도’라는 말을 덧붙여 ‘우리’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탄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칭하지 않고 ‘탄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참함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에는, 우리 또한 ‘탄식하기’ 때문이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p.260.

우리가 구속 받은 것에 대한 대가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불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를 사망이 그것의 굴레로 주장하고 있고, 우리 안에 사망의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다.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우리에게 그가 다만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소망은 장래에 관한 것이요 현재의 이익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손으로 잡아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6-27).

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p.262.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성령의 도우심들을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구속을 고통하고 탄식하여 갈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p.263.

하나님의 영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실제로 자신을 낮추어 간구자로서 기도하거나 탄식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에 합당한 기도를 하도록 감화하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시되 이같은 기도들이 간절한 까닭에 하늘에까지 상달되도록 해주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8-30).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p.265.

그렇지만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비록 택함을 받은 자들과 유기된 자들이 구별 없이 비슷한 악들을 범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들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경우는 고통을 통해서 깨우침을 주시고, 그리고서는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역경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그가 한 말은, ‘성도들에게 생기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기 때문에 세상이 해로 여기는 것이 결국은 그들에게는 유익이 된다’고 한 것과 같다. 어거스틴은 성도들의 죄마저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이루는데, 이바지한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이 말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과는 관련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래서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간주한 그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선택되었다고 한 것이다. 바울이 이같은 순서에 대해 유의하고 있는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라고 사실이 제일 원인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수양에 근거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으로,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p.266)받기 전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또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그들이 먼저 하나님에게 아신 바 되었다고 말씀되어 있다(갈4:9).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경우에는 환난이 구원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값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요한의 말도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이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부르심은 넓은 의미로 쓰여 있다. 그것은 그가 곧 이어서 말하게 될 선택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과정에 다만 반대되는 것뿐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경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 이는 그가 그들을 선택하여 그의 특별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뜻’이라는 단어는 인간들이 그들이 보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선택받게 된 원인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시고 선하신 뜻 외에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과도 같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1장과 디모데 후서 1장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가 또한 분명하게 대조되어 진술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곧 이어서 첨부하여 말하고자 한 주제, 즉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복케 하는 환난들이 하나님의 동일한 작정에 의해서 우리를 위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이 이같이 진술하는 목적은 마치 필연의 사슬에 의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지으려는 데 있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그러므로 신자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복케 하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울이 선택의 바로 그 순서에 의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필연성을 이전에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선택-우리는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정을 입어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을 부인하지 않고, (p.267)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우리는 이 형상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을 우리 몸에 지니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한, 우리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부담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에 언급해 놓은 하나님의 예지는, 어떤 미숙한 사람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미리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의 자녀들을 버림받는 자들과 구별해 오신 수양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신자들이 택함을 받아 성령의 거룩케 하심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방금 언급한 그 미숙한 사람들은 어리석게 결론 내리기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으로 그가 미리 아신 자들만을 선택하셨다고 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모두 그들 개인의 공로 때문에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회상하게 하여 그들에게는 선택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그가 앞에서 기술하였던 것들을 말을 바꾸어 반복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양자로 삼을 때, 그 자신외에는 아무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아시는 것이 없으시며, 그가 선택하고자 계획하신 자들을 단지 선발하셨기 때문이다.

‘미리 정하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헬라어 동사 (프로-리제인)에 의하여 본 구절의 전후 사정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이 의미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양자로 삼은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일 뿐이다. 그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본받아야 할 살아있고 두드러진 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에서였다. 본 구절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값없는 수양-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를 지도록 택정하셨다고 하는 작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본받지 않는 자들은 아무도 천국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맏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 중에서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p.268)있다고 하면, 그가 우리에게 본으로서 주어지신 것은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가 기꺼이 당하신 일은 어느 것이나 우리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단지 표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가 그의 아들에게 부여하신 권위와 지위에 대해 모든 수단을 다하여 증거하신 것을 보면, 그는 그가 자기의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으신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바울이 이제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보다 더 분명한 논증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을 때 우리의 구원이 참으로 가능케 된다고 하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 소명, 칭의,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그것들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도가 하는 말의 의미를 독자들이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리 정하다’라는 단어가 선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십자가를 의무적으로 지도록,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 또는 작정을 가리킨다고 하는 나의 앞서의 말을 되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결정해 놓으신 것을 감추지 않으시고, 그것을 나타내 보여주셨다고 하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침착성과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어진 상태를 그들이 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부르심’은 그것보다 더 열등한 것으로 되어 있는 비밀로 가리워진 선택과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상태에 대해서 아무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반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이 그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공공연하게 그의 감추인 계획을 증거해 주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같은 (p.269)증거는 외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포와 관련하여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어거하실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이끄시는 택함 받은 자들을 바울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롭다 하심’이란 신자가 부르심을 받는 시간부터 그가 죽는 순간까지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 단어를 공로없이 되는 의의 전가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 의미를 집어치울 필요는 없다......여기서 한가지 첨부해서 밝혀두어야 할 것은, 바울이 히브리 어법을 채택하여 그가 여기서 사용한 동사는 현재형 대신에 과거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의 계속된 행위임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다음과 같이 의역될 수가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에 따라 지금 십자가를 지게 하는 자들을 그가 부르시고, 동시에 의롭다하시어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낮아짐의 신분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영광을 볼품 없게 만드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실 때에는 그 영광은 언제나 완전함 가운데서 볼품 없게 만드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 천사들이 보실 때에는 그 영광은 언제나 완전함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점층법에 의하여 나타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신자들이 고통-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현재 낮아짐의 신분 가운데 있게 된 것임-을 당하고 있는 것은 오로(p.270)지 천국의 영광을 얻고 그리고 그들이 지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1-34).

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그는 이 말씀들을 통해서, 모든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무적의 용기는 하나님의 부성의 은총에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p.273)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시종일관하여 진술했던 대로, 여기서 유의할 점은, 바울에 의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란 하나님의 사형 선고를 면제받음으로 해서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단지 의미한다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이것을 입증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이것을 입증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바울은 본 구절에서 하나의 명제를 무효화시키고 있다. 즉, 죄를 면해 주는 것과 송사하는 것은 반대되는 명제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리한 송사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실 것은, 그가 우리에게 모든 죄의 책임을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확실히, 마귀는 모든 경건한 자들을 송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자체와 경건한 자들 자신의 양심도 그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에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그들을 의롭다 하시는 재판관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어떠한 대적자도 우리의 구원을 뒤흔들 수가 없으며, 더구나 파괴할 수는 전혀 없다.

바울은 또한 그들을 ‘택하신 자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자기 자신도 그들의 수에 들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가 그같은 지식을 갖게 된 것은, 어떤 궤변론자들이 거짓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특별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경건한 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지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경건한 자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지각력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택함 받은 자들에 대하여 사용된 진술은, 바울의 예를 따라, 모든 경건한 자들의 자신들에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그가 선택을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으로 간주하여 언급하지 않고 덮어 두어 버렸다고 하면, 이 선택 교리는 아무런 열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생기가 없는 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건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적용해야 할 어떤 것을 바울이 여기서 의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우리가 받은 (p.274)부르심을 검토하도록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임에 틀림없다.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마귀와 사망과 죄와 지옥의 문들에 대하여 능히 승리할 수 있는 이 위대한 확신이 모든 경건한 자들의 심령 속에 깊이 심어져야 하는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고,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불확실성을 운운하는 스콜라주의적인 교리처럼 유독하고 파괴적인 개념은 없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p.275)우리가 그의 이 대언을 우리의 육신적으로 판단해서 안되는 것은, 그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벌려 가련하게 성부 하나님께 애원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해 주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대언을 대신하는 것임-성부 앞에 계속적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그의 생기 있는 기도가 성부를 화목케 하고 우리의 소원을 성부께서 기꺼이 들어주시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옳은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5-37).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신적 자비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가장 절박한 환난 가운데서도 설 수가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임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능력이나.

p.279.

‘권세자들’과 ‘능력’또한 천사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신적 능력의 으뜸 되는 도구들이기에 그렇게 이름지어진 것이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비록 바울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환난의 기간이 아무리 길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사실상 단언하고 있다. 이 말씀을 첨부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악들을 인하여 느끼는 슬픔 뿐만 아니라, 절박한 위험들로 인하여 우리가 당황하게 될 수 있는 두려움과 걱정과 더불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은, 악의 세력들이 아무리 오래 버티고서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것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그것에 의해서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여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구절의 말씀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학자들의 주장과는 분명히 모순된다. 그들은 어리석게 주장하기를, 특별 계시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도의 최종의 견인을 확신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이 특별 계시아주 희귀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같은 교리는 전적으로 신앙을 파괴하며, 그(p.280)리고 만일 신앙이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까지 미치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확실히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제 9 장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1-5).

2절.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p.283.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하여 성취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유대인의 멸망을 보고서 바울이 몹시 심하게 느낀 고통을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록 방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이같이 멸망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하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방탕한 사람들의 타락을 보고서도 슬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지고 이같은 두 가지의 감정들을 능히 가질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 자들의 멸망을 보고서도 기꺼이 참을 수가 있지마는, 생각을 바꾸어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죄악 중에 사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작정을 거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괴로움에 대한 금욕적인 무관심과 고통에 대한 무감각을 그들에게 요구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p.284.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바울의 열렬한 가슴은 불타 올라 유대인들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여타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그의 기도에 덧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선택을 도외시하고서, 유대인의 구원에만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4절.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p.287.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출애굽기 4;22이하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라고 하셨고, 또한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31:9),“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셨다......‘영광’은 주님께서 각종의 수단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해서 다른 모든 민족들 위에 그 백성을 뛰어나게 해주신 그 탁월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많은 표적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법궤를 통해서 그가 임재하신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는 그 법궤로부터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으며, 그의 능력을 나타내어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법궤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웠다(삼상4:22).

바울이 여기서 ‘언약들’과 ‘약속들’을 구별하여 사용했으므로,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안다. ‘언약’이란 명백하고 엄숙한 말로 표현되고, 상호간의 의무를 포함하고 있는 바,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맺어진 언약이 있다. 그러나 약속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옛 백성과 언약을 한번 맺으셨으면, 그는 수시로 새로운 약속들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제공하는 (p.288)일을 쉬지 않으셨다. 이로 보건대, 약속들의 유일한 근거언약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시는 특별한 도움이 ‘선택’이라고 하는 유일한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율법’이란 그 언약을 단지 새롭게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점을 보다 충분하게 기억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기서 ‘율법을 세우신 것’이 율법으로 명한 것들에 특별히 국한되어야 할 것 같다......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예배’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위해 규정된 의식에 관한 율법을 의미한다.

5절.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p.289.

우리는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을 읽을 수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가지의 성질들을 구분하되 또한 바로 그 분 안에서 양성을 결합시켜 놓고 있다.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그가 참 인간임을 선언하고 있다. “육신으로 하면”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육신 이상의 어떤 것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서 ‘인성’과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지만,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그는 양성을 서로 결합해 놓고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바울이 진술한 이같은 찬양이 오직 한 분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구절(딤전1:17)에서 바울은 한 분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이같은 분명한 증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목적으로 이 문구를 나머지 문맥과 끊어서 생각하는 것은, 대낮에 암흑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대담하기 짝이 없는 소행과도 같은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아주 분명한 바,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들에게 나셨으나, 세세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6-9).

6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p.290.

그가 자기 백성의 멸망을 애통해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이 폐해졌다는 어리석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잃게 되는 때에는 반드시 언약이 폐지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선수를 써서, 유대인들의 영안이 아무리 어두워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으며, 그러기에 언약의 진리가 틀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의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아브라함의 기업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구별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로 보건데 어떤 사람들의 허물로 인하여 그 언약이 폐하여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이상에서 말한 것을, 오히려 말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일반적으로 선택하신 것(general election)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스스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님께서 단일 민족과 생명의 언약을 맺으시는 중에 보여주신 그의 겸양의 사랑은 분에 넘치는 긍휼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은혜가 두 번째 선택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두 번째 선택은 그 민족의 일부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자녀가 아니라”고 한 바울의 표현은 파로노마시아(말(p.292)만 조금 바꾸어서 하는 화법)라고 하는 화법이다. 그는 첫 구절에서 모든 후손들을 포함시키고 있으나, 둘째 구절에서는 참 아들들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참 아들들은 그들의 지위에서 타락하지 않은 자들이다.

7절.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 외적 부르심을 파기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 구절의 말씀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명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확정하고 완성하는데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이같은 명제들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선택이 아브라함의 혈육의 후손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언약의 조건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나서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 그는 가장 적합한 예를 들고 있다. 만약 그 언약에서 탈락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후손들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그 특권을 얻은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브라함이 생존해 있었고 언약도 새롭게 주어져 있을 동안에 아브라함의 처음 두 아들 중에 하나(에서)가 벌써 후손의 계통에서 이탈된 사실을 보면, 그의 먼 후손들의 경우에는 이같은 이탈 현상이 얼마나 더 심하게 일어났겠는가? 이 예언은 창17:20과 21:12에서 인용해 온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이스마엘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으나, 약속된 축복이 임할 자가 따로 있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대답해 주시고 있다. 이로 보건대 일정 수의 사람들이 특별한 특혜를 받아 서민들 중에서 선택되어 있다는 것과, 이 사람들에게서 일반 수양(general adoption)이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계획한 것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진술을 그 예언의 말씀에서 이제 연역해 내고 있다. 만일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씨로 여김을 받고, 이스마엘에게서 난 자는 씨로 여김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리고 이삭은 이스마엘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고 하면, 육신의 아들들이 다 씨로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이 어떤 아들들에게서만 특별한 방법으로 성취되며, 그 약속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고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틀림없다. 육신의 혈통 이상의 장점을 갖고 있지 못하는 자들을 바울은 ‘육신의 자녀’라고 일컫고 있다. 한편 주님에 의하여 특별히 인침을 받은 자들은 약속의 자녀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0-13).

10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약속의 기업에 관한 한 아브라함의 아들들(이삭과 이스마엘)에게서 이같은 차이(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를 찾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과 에서에게서는 보다 더욱 분명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이삭과 이스마엘)에는, 하나(이스마엘)가 여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들의 신분이 같지 아니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들은 사실 쌍둥이였다. 그렇지만 하나는 주님에 의해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택함을 받았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육신의 자녀들에게서 구별 없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그러므로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p.294)특별한 선택의 계획이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리브가에게도 또한 게시되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때 그녀는 쌍둥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11절.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바울은 이제 그의 논증을 한단계 진일보시키고 있는데, 이는 이같은 차이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밝히기 위함이다. 그는 이같은 차이가 생겨난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 같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 그가 앞서 언급하였었다. 즉, 비록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 언약에 참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서 다 유효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들을 누리는 그들이 약속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같은 차이가 생겨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앞에서는 침묵하여 지나쳐 왔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연막을 쳐 살짝 암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게 모든 원인이 하나님의 공로 없이 베푸는 선택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 선택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경건한 자들이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되며, 유기된 자들이 멸망 받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엄정 이외의 다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된다. 즉, 경건한 자들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버림받은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정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첫 번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언약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다른 민족들과 구별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예정하심으로 해서, 그 민족에 속한 사람들 간에도 구별이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진술은,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이 선택의 유일한 기초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그의 긍휼일 뿐이며, 이 선택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포함하되,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 셋째 진술은, ‘공로 없이 거저 선택함에 있어서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은 은혜를 동등하게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하등의 의무가 없으시다. 오히려 그는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간과하시고,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선택하신다.’ 바울은 이 모든 진술들을 한 구절에 간략하게 포함시키고 있으나, 뒤에 가(p.295)서는 나머지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고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식들 간에 차별을 두실 때에, 아직 있지도 않는 행위들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실 수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들의 행위의 공로를 따라서 그들을 구별해서는 안된다는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장차 행할 행위로 미루어서 자기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미리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보다 통찰력이 무딘 자들이요, 또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야 하는 신학의 기본 원리에도 어긋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 나타난 대로, 인간의 부패한 성질에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만한 아무 것도 찾으실 수가 없다는 원리에 맞지가 않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아무도 그 때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했다고 바울이 말하는 때에, 그들이 둘 다 아담의 자손들이요, 본질상 죄인들이며, 한 톨의 의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하는 바울의 가정을 우리가 또한 덧붙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좀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이 바울의 단조로운 진술에 만족하지 않고, 경솔하게 다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그들이 주장하는 논증들을 결코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신앙의 기초 원리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나는 밝히고자 했을 뿐이다.

더욱이 온 인류에게 퍼져 있는 죄의 오염은 그것이 악행으로 나타나기 전에 그 자체로서도 정죄당하기 충분하다. 이로 보건대 에서가 버림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서의 지위가 어떤 악행이나 허물 때문에 악화된 것처럼 의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미덕과 마찬가지로 죄들도 배제시켰던 것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이 선행이나 악행에 달려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낸 것이다. 유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저주인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이같은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갖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만을 의지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택과 유기(p.296)의 정당한 원인이 그 자신의 뜻에 있다는 교리를 확정해 놓기 위함이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독자들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만일 행위가 선택 이전에 존재했다고 하면, ‘보상이 행위와 관련되도록’이라고 바울이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행위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그 자신의 선하신 뜻에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 주제에 관하여 분쟁의 여지가 전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택하심을 따라’라는 구문과,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는 구문을 덧붙임으로 해서 모든 의심을 일소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제 그 문맥을 좀 더 면밀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는 버림을 받고 다른 하나는 선택을 받음으로써, 택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작정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간에 있는 차이의 원인을 그들의 행위의 탓으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또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고 덧붙여 말한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부르심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체 행위에 대하여 고려하는 것을 배제하고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있은 것이다. 우리의 선택의 불변성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전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공로는 전혀 소용이 없고, 다만 그것들은 사망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택함을 받을 만한 공로나 자격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유력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미리 아시는 까닭에 선택하기도 하시고 유기하기도 하신다고 하는 교리도 그릇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된다.

12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삭의 아들들이 아직 모태에 있을 때, 주께서 그들을 구별하신 사실에 유의하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야곱에게 응한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뜻은 작은 아들에게는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었고, 큰 아들에게는 그것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 약속의 말씀은 장차 상속권과 관련된 것이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자기의 어떤 더 큰 뜻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야곱이 육신적인 면에서 그의 장자권을 인하여 별다른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해 볼 때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오히려 그 장자권 (p.297) 때문에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기의 집과 고향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그네 길에서 돌아올 때, 두렵고 자기의 생명이 남아 있을 것인가를 확신하지 못한 까닭에, 자기 형의 발에 꿇어 엎드려 자기의 허물을 줌으로 해서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로 보건대 야곱이 그의 형을 지배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는 형에게 애원하여 자기의 생명을 부지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장자권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말라기 1장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유대인들의 배은망덕함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하기 전에, 그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의 사랑의 근원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내가 그를 그의 동생보다 더 낫게 한 특권이 무엇이 있었느냐? 아무 것도 전혀 없다. 그들의 권리는 동등하되, 다만, 동생이 자연법에 따라 형에게 복종했어야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야곱을 택했고 에서는 버렸다. 오직 나의 긍휼에 의해서만 이렇게 된 것이며, 야곱의 행위에 무슨 공로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은 것은, 야곱의 후손에게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의 족속들은 내가 버렸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더 악한 것은, 이같은 은총을 회상하여 나의 위엄을 경배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땅에 속한 축복들을 또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축복들은 그의 자비의 상징으로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나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4-18).

14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p.298.

사람들은 많은 사소한 난제들로 인하여 넘어진다. 특별히 성경이 예정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을 들을 때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미궁이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은 아주 끈질긴 까닭에, 어떤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 위험하면 할수록, 더욱 더 무모하게 그렇게 해보려고 덤빈다. 그래서 예정문제가 논의되게 되는 경우, 인간은 본연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까닭에, 즉시로 성급하게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책이 있는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까닭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으면, 예정에 관한 이 지식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임에 틀림없다......(p.299)이같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전체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처음 부분에서는 택함 받는 자를 다루고 있고, 둘째 부분에서는 유기된 자를 다루고 있다. 택함 받은 자의 경우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토록 했으나, 유기된 자의 경우에는 그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다른 사람은 왜 유기하시는가 하는 이유를 오직 그의 작정에서만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이 구절의 말씀이 분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또한,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은, 비록 이같은 예정 교리를 논하게 되면 필시 즉각적으로 사나운 반박과 지독한 욕설들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솔직하게 그리고 아무런 가식도 없이 그것을 소개하였다는 점이다. 실로,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의해서 그들 각자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순간, 화를 벌컥 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아 깨달은 것을 아주 명백하게 계속하여 선언한다. 이로 보건대, 교리상의 난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성령보다 더 분별력이 있는 체하는 자들의 위선은 참으로 꼴불견이다. 하나님께 아무런 허물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의 구원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고 다만 고백하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 경(p.300)건치 못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거나, 그들의 혀를 재갈먹여 제 멋대로 지껄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 그들의 겸손과 절제는 칭찬받을 만하다 하겠다. 그러나 성령과 바울을 힐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주제넘는 짓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참된 교리가 아무리 미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교리를 고백하기를 경건한 교사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경건치 못한 자들이 어떠한 비방을 퍼부을지라도 그같은 비방을 반박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바이다.

15절.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택함 받은 자들에 관한 한,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으실 리가 없는 것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 자기의 긍휼을 그들에게 입혀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여기시도 또한 불평할 이유들을 찾아내는데, 이는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푸시지 않는 그런 일을 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공로 없이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우대 받는 것이 불합리하게 보이기 때문에, 인간은 뻔뻔스럽게도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며, 하나님께서 마치 부당하게 어떤 사람들에게 지나친 은총을 베푼 것처럼 윽박지른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고 있는 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첫째로, 바울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그가 알고 있는 교리를 결코 모호하게 말하거나 감추지 않고, 그것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한다. 둘째로, 그는 아무런 번거로움이 없이 그같은 교리가 귀에 거스르지 않게 되는 이유들을 찾아내며, 공격적이고 성마른 반론들을 억누르는데 있어서 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으신 것은,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바울의 변증은 얼핏 보아 온화한 맛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권위만으로도 충분하게 여기시며, 그래서 다른 아무의 변호도 그분에게는 필요치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권리의 옹호자가 되시는 것으로 바울은 만족해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모세가 온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당시에, 주께로부터 받은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대답하시기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다(출33:19). (p.301)주께서 이같이 단언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는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요,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모든 것이 그의 자유로운 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로,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값없는 것이기에,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주실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을 행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나, 모든 사람에게 균일하게 하지 않으시는가에 대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이유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한번 긍휼을 베풀고자 작정한 자에게서 결코 나의 긍휼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내가 사랑을 베풀기로 결정한 자에게 계속적으로 사랑을 베풀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최고의 원인을 자기 자신의 자발적인 작정에 돌리고 있으며, 동시에 그가 어떤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자기의 긍휼을 베풀 것을 작정하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어휘를 정확하게 살펴 보면, 모든 외적인 원인들이 배제되어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행동의 자유를 요구할 때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관계 대명사를 보면, 긍휼이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베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외적인 원인들에 제한시키는 경우, 이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 된다.

구원의 유일한 참된 원인은 모세가 사용한 두 마디의 단어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난)이라는 단어는 ‘은총을 베풀다’, 또는 ‘값없이 풍성하게 사랑을 베풀다’를 뜻하며, (라함)이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를 뜻한다. 이처럼 바울은 그가 입증하고자 한 것, 즉 하나님의 긍휼은 값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얽매임이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베풀어진다고 하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바울은 우리가 받은 선택을 우리의 근면이나, 열심이나, 또는 노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명백한 결론을 이 말씀에서 추론하고 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경우, 그들이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그들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감동 받아 택할 마음을 갖게 될 만한 어떤 공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취해야 하는 단 하나의 견(p.302)해는, 우리가 택함 받은 수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뜻이나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바울은 ‘애쓰다’ 또는 ‘노력하다’라는 표현 대신에 ‘달음박질하다’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그같은 택함을 받으려고 원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생각하지 않은 자들을 거져 택하여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추리하기를, 우리에게는 택함 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나, 하나님의 긍휼의 도움이 없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기 보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배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택함을 얻기 위해 ‘원하거나’ ‘달음박질한다’고 말하는 것이 생트집에 불과한 것은,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자가 택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실로 하여 게으름을 피우거나 전혀 행하지 않는 자들은 정죄 받아 마땅하다. 비록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고취된 노력은 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 속에 활기를 넣어 주시는 경우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이 소멸되지 않게 할 목적으로 하고, 또한 우리가 받은 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바라는 것과, 모든 것이 그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한편, 두렵고 떨림으로 힘써 우리의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바울의 이같은 주장을 궤변과 아주 무가치한 반론을 전제하여 반박하려고 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의 선택이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하는 것에만 달려 있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궤변을 효과적으로 빈틈없이 반박하였다. 만일 인간의 뜻이 선택의 원인이라는 것을 부인함에 있어서, 그것이 부분적인 원인이요, 유일한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이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있지 않고, 원하는 것과 달음박질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호협력이 있는 경우에는 서로를 칭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자가당착적이다. (p.303)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으로 결정짓고, 전혀 인간의 근면에 의한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자.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들이 경건치 못한 자의 입장에서 말씀되어진 것으로 보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찬성 할 수 없는 견해이다. 하나님의 의가 선포되어 있는 성경의 구절을 하나님을 폭군이라고 비난할 목적으로 곡해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 또한 바울이 그의 대적들을 손쉽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경우에, 그가 성경을 크게 경멸하여 다루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비밀을 그들 자신의 그릇된 판단에 의하여 평가하는 자들이 포착한 탈출의 수단이다. 그들의 엷고 부드러운 귀에는 이 교리가 너무도 거칠었기 때문에 사도에게 어울리는 말로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굽히어 성령을 따라 순종함으로써 그들이 그들 자신의 지독한 거짓에 중독되지 아니했었더라고 하면 좋았을 뻔하였다.

17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바울은 이제 두 번째 부분인, 경건치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에는 다소 합리적이지 못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자를 유기하심에 있어서 그가 왜 전혀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와 공평함이 기이하다는 것을 더욱 더 힘써 명백하게 바울은 밝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기 9:16에서 인용하여 증명 구절로 삼았다......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바로를 멸망에 이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예정인데, 이 예정은 하나님의 공의롭고 은밀한 계획과 관련이 있다. 둘째는 이 예정의 목적인데, 이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점을 바울은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같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지게 하는 원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불의하시다고 비난하는 것(p.304)은 신성모독이다.

많은 주석자들이 본문 말씀에 있는 귀에 거스르는 요소를 극소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본문의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히브리어에서 ‘내가 일으켜 세웠다’라는 표현이 ‘내가 너를 택정하였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유의해 두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바로가 아무리 완악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바로의 포악함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그 포악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장중에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능력을 보다 분명하게 나타내실 의도에서 고의적으로 바로가 포악토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단언하고 계신다......많은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목적한 바를 제지하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을 촉진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바로를 이 땅에 내보내셨다는 것과 그의 성품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세웠다’라는 말씀은 이 해석과 잘 부합이 된다.

18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p.305.

바울이 목적하는 바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려는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멸망하도록 눈을 어둡게 하시기를 좋게 여기신 듯하다는 것이다......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에게’와 ‘하고자 하시는 자를’이라는 말씀들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이 이상을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강퍅케 한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적용되는 때에는, 허용(몇몇 연약한 주석가들이 그렇게 해석한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진노의 행위를 의미한다. 유기된 자를 어둡게 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외적 상황은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이다. 사단도 강제적인 힘을 가지고 내적으로 역사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그러므로 예지에 관하여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론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바울은 경건치 않는 자의 멸망을 주님께서 예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하여 작정되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솔로몬도 경건치 못한 자의 멸망이 미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특별히 멸망할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잠16:4).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19-21).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p.308.

선택 교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나, 경외심을 가지고 좋게 생각해야 하는 신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고집스런 인간의 호기심을 제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비밀을 말씀하시기를 삼가시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의 무한한 지혜가 우리의 적은 머리로는 이해될 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절제와 온건을 요구하신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공의로운 것으로 생각할 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감취어져 있어서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기의 피조물들을 다루는 이유가 없으시다고 하면, 그의 권리가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귀에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같은 독단적인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경우 그의 명예가 크게 손상되는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같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바울보다 더 나은 신학자가 되는 것인가? 바울은 하나님의 독단적인 권한을 신자들을 위한 겸손의 규칙으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우러러 보고 그것을 그들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평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에서였다.

바울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이같은 교만을 가장 적합한 은유를 들어 제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은유는 예레미야 18장 6절에서라기보다는 이사야 45장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해 온듯하다. 우리가 예레미야에서 배워야 할 한 한가지 진리는 이스라엘이 주의 장중에 있는 까닭에, 토기장이가 자기의 진흙으로 만든 그릇을 파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려 버리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있을진저”라고 하였다.

즉, 토기장이와 다투는 질그릇은 화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진흙이 토기(p.309)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느냐?’ 죽어서 썩어질 인생을 하나님과 비교해 보면, 질그릇보다 더 나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다루고 있는 주제에다 이 인용구를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 꼼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그의 은유가 더욱 의의있게 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우리가 단지 기억해야 할 것은, 만일 하나님께 인생의 생사를 주관할 권세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영예의 한 부분이 박탈당하는 것이 된다는 이 점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22-23).

22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p.310.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캐고 들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경배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23절.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p.311.

선택받은 자와 유기된 자가 차이가 나는 것은 똑같은 멸망의 구렁에서 선택 받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더욱이,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이 전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이 더욱 찬양을 받게 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가련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환유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하나님의 으뜸되는 찬미자비를 베푸시는 행위에 있다. 예컨대, 에베소서 1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이 된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나서, 우리의 기업에 대하여 성령으로 우리가 인침을 받은 것은 그의 영광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은혜’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하는 것은 선택 받은 자들이 도구들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 받은 자들을 자기의 이름을 그들 가운데서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그의 긍휼을 행하신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앞에서 유기된 자들을 가리켜 멸하기를 예비된 그릇들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셨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p.312) 예비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달려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유기된 자들이 자포자기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으로 바울은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4-29).

24절.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에 관하여 지금까지 바울이 전개해 온 논쟁에서 다음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해서 베풀어지고, 온 세계적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베풀어 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 그 은혜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육신을 따라 아브라함의 자녀된 모든 자들에게 예외 없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5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p.313.

이방인들에 대한 부르심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오래 전부터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은 이제 밝히고 있다. 그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나, 그 예언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구절에서 선지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부인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화가 나신 나머지, 그들을 더 이상 자기 백성이 아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는 후에 위로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삼으시고, 백성이 아닌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말씀되어진 것이 분명한 이 예언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p.314)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의 위치에서 추방되었을 때,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이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긍휼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차별없이 베풀어지고 있다. 이로 보건대 선지자들의 예언이 본 주제와 들어맞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본 예언에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같은 수준에 오르게 하신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교회를 모으시고, 그렇게 해서 백성 아니었던 자들이 자기 백성 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선언하고 계신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부르리라.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기의 아들들로 예정하신 자들은 그의 아들들이요, 또한 늘 그렇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만 선택이 소명에 의하여 입증된 자들만을 성경은 흔히 하나님의 자녀로 간주한다.

27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p.315.

선지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기술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묵살되어 버린 것으로 신자들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의 소망이 다소 남아있다고 선포하기는 하지만, 그는 그 은혜를 소수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다......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코자 하셨을 때, 그가 원하셨던 것은 그의 구원의 은총이 많은 수 중에서 소수에게만 베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수는, 포로기간 중 멸망되었던 많은 수의 사람들에 비교할 것 같으면, 멸망 중에서 건짐을 받은 남은 자들이라고 당연히 일컬어질 수가 있었다. 유대인들의 귀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교회의 참된 회복을 예표하였으며, (p.316)다만 시작을 의미하였다. 그 당시에 일어났던 것이 이제 그 구원이 발전되고 완성되는 때에 더욱 분명하게 성취될 것이다.

28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을 감축하시고 잘라내심으로 해서, 남은 자가 모두 소멸되어 버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즉, 대단하게 몰락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폐한 중에서 남아있을 소수가 주님의 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즉,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증거할 것이다.

29절.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p.317.

소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되살릴 수 있도록 씨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망하거나, 또는 그 이름이 영원히 잊혀짐으로써 없어져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약속을 늘 마음에 두시어, 그의 준엄하신 심판 중에서도 자기의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그에게 합당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

30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원망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유대 민족이 어찌하여 이같이 버림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이제 설명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 (바울이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준대로, 이 예정이 최고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보다 더 차원 높은 원인들을 입증해 보려고 하는 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이 모든 다른 원인보다 차원이 높은 것처럼, 경건치 못한 자들의 부패와 사악함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와 기회를 제공해준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p.318.

그런데, 이 구절에서, 사도가 목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를 높이어,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의 경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을 그가 황송하게도 용납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외에 아무 다른 원인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명백하게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의가 없으면 아무 구원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의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의가 값없는 화목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된다. 만일 이방인들이 그릇 행하여 곁길로 나아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그들을 용납해 주셔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한 까닭에 구할 수가 없었던 의를 그들에게 제공해 주시지 않았었더라고 하면 그들이 구하지 아니하였을 것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여기서 또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믿음을 미리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었다는 점이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사모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면, 아직도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31절.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본문의 ‘의의 법’(p.319)은 ‘율법의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32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우리는 또한 믿음과 행위에서 나는 공로가 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믿음과 공로는 전적으로 서로 상반된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신뢰는 우리가 의에 이르는데 있어서 으뜸가는 장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그 자체의 공로를 생각함이 없이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사실 의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의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직책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이 된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들이 의에 대한 열심히 있는 체하면서 행위를 신뢰할 때마다, 그들이 발광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전쟁을 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p.320)선지자가 그리스도를 ‘부딪힐 돌’이라고 일컬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편한 길을 제시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완악한 고집으로 말미암아 거침돌에 걸려 넘어진 자들이 의의 길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경우, 우리가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본래 거침돌이신 것이 아니라, 뒤이어 나오는 구절로 미루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인간의 사악함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33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그리스도께서 거침돌이라고 일컬어져 있다 해서 염려하거나, 확신 대신에 두려움에 사로잡힐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은, 그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파멸로, 경건한 자들에게는 생명과 부활로 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딪히는 것과 거치는 것에 관한 앞서의 예언의 말씀이 거역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성취되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는 다른 예언의 말씀이 있다. 즉, 그리스도는 견고하고 보배로운 돌이요, 가장 튼튼하게 (p.321)박힌 모퉁이 돌이어서, 그를 의지한 자는 누구나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바울이 ‘서두르거나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표현 대신에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한 것은 70인역 성경에서 취해 온 까닭이다.

제 10 장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4).

2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p.323.

어떤 사람이 책망을 들을 때, 자기에게 악의가 없었던 것으로 그가 말할 것 같으면, 대개 가장 적절한 변명으로 간주해 준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구실을 내세워 하나님의 진리를 찾아내는 데 전심전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의적인 악의가 없이, 다만 알지 못한 까닭에 선의로 저지른 과실은 어떤 것이나 용서 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아무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잔인무도하게 사도들을 학대하고, 그리고 복음을 파괴하고 없애버리려 했던 것을 용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가 자랑삼아 내세우는 것과 똑같은 구실-‘악의는 없었다’ 또는 ‘몰라서 그랬다’라고 말하는 것 따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의에 대하여 적당히 얼버무리려 하는 그같은 빈 말들은 다 집어치워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중심에서 찾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에게 가는 정도를 좇아가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탈선하여 전력질주하는 것보다는 정도로 느릿느릿 가는 것이 더 낫다. 만일 참으로 경건하고자 할 것 같으면, 락탄티우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진리-유일하고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를 기억하기 바란다.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의 어리석은 자만은 하나님의 의를 그들이 알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가 대조되어 있는 점에 또한 유의하라. 우선, 이 둘이 서로 상반되는 까닭에 함께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는 때에는 즉시로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또한 이 두가지 유형의 의를 대응시키기 위해(p.324)서, 바울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의‘하나님의 의’라 칭하는 한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거나 또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는 것으로 믿는 것을 인간의 의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얻는 첫 단계가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데에서 의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의가 없음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입게 되는 가에 대해서 진술한 바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바울은 선지자들을 우쭐대게 하는 자만을, 비록 그들이 열심을 가장하여 그것을 숨기고 있지만, 통렬하게 비난한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림으로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며 반항하고 있다고 말한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은 정도를 추구해 온 것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의 의에 전심전력해 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로서는 이같은 유대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논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여기서 이같은 논박을 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힘쓰는 자들이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자들인 것은, 율법이 우리를 다른 의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다. 사실, 율법의 모든 교훈과, 모든 명령, 모든 약속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모든 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우리가 지은 죄악들을 깨닫고서 굴복되어야 하고, 또한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의를 오직 그에게서만 구하게 되는 때에 가능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크게 악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악을 행함으로 해서 (p.325)그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오히려 거침돌이 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비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부끄럽게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이 분명한 것은, 그들이 율법의 핵심과 정신은 거부하고서 죽은 문자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있는 것으로 입증된 까닭에,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의를 대신해 왔다. 그 의는 우리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값없이 주어지는 까닭에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같이 믿음의 의(1장에서 우리가 살핀 대로)는 율법에 의하여 증거된다. 본문의 말씀에 의하면, 율법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꾸준하게 노력하여 율법이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율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녀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5-10).

바울은 선지자들의 글을 언급하지 않고, 모세의 증거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이같이 한 이유는, 율법이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한 까닭이다......(p.326)바울이 율법을 믿음과 일치하게 해놓고서도, 율법에서 나는 의를 믿음에서 나는 의와 대립시켜 놓은 이유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이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있다. 때때로 율법은 모세가 가르친 교훈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직분과 특별히 부분을 의미하는가 하면, 명령, 상급, 그리고 형벌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직분은 경건을 위한 참된 규칙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회개와 믿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약속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가 이 직분을 충성스럽게 행했다고 하는 사실은 많은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 방식을 그들에게 그가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이같은 생활 방식을 그들에게 그가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이같은 생활 방식을 율법의 명령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백성들에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주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상급과, 죄인들에게 임할 무서운 형벌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비된 상급과, 죄인들에게 임할 무서운 형벌을 선포하기 위하여 약속들과 위협적인 경고들을 첨가해야 했다. 이제 백성들이 행해야 할 의무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저주를 받을 만하였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도무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의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절망 가운데 빠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는 안식처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도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모세가 행하는 직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은 모세의 그들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이 약속들이 다소 흐릿하다. 여기에 반해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정하여진 명령들과 상급에 관한 것들은 자주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나는 참된 의의 성격을 가르치는 직분이 모세에게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성격과,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어떤 형벌이 주어지는 가를 보여준는 직분도 그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요한은 모세를 그리스도와 대조시켜 말하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p.327)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고 했다. 율법이라는 단어는 이같이 제한된 개념으로 사용되는 때에는 언제나, 모세가 그리스도와 은연중에 대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복음과 분리되는 때 그 자체 안에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 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율법에서 나는 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세의 전체 직분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 특별히 위임된 부분과만 관계가 있다.

5절. 모세가 기록하되......

본문의 말씀은 레위기 18장 5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바울 역시 이 같은 개념으로 그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용한 것이며,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금생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레위기의 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낸 것이다. “만일 율법의 모든 부분을 정확하게 성취하지 않는 한, 율법에 규정된 의에 아무도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같은 완전에 결코 미치지 못해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 의를 얻을 가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율법이 불가능한 조건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약속 자체에서 논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행위에서 나는 의를 세우기 위하여 율법의 약속들을 인용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우리가 그 약속들에서 구원을 결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만일 그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저주가 임할 것이다. 공로를 입증하기 위해서 헛된 약속들을 붙잡는 것을 좋게 여기는 교황주의자들의 우둔함은 더욱 더 가증스럽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헛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범죄 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p.328.

이 구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바울이 그 구절의 본래의 의미를 의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은 다른 의미로 바꾸어 사용한 듯이 보인다. 뒤에 가서 단어들의 해석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먼저 적용에 대해서 주목키로 하겠다. 본문의 말씀은 신명기 30:12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거기 보면, 앞서의 인용구에서처럼, 모세가 율법의 교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율법의 교훈을 복음의 약속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모세는 율법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복음을 포함하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교훈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은, 그것이 복음에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심어 넣기까지는, 저절로는 우리 심령 속에 단 한 마디도 거하지 않는다. 둘째로, 중생한 연후에도 율법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율법이 완전을 요구하고, 신자들 자신들마저도 이 완전에 이르려면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하고 허물된 것을 사해 주는 용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신명기 32장을 (또한 4장에서처럼)통하여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힘써 찬미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연단하시고 다스리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이같은 찬미는 단지 율법에만 적용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모세가 거기서 율법의 규칙과 일치하는 삶을 살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중생케 하시는 영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의와 관련지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을이라는 것에서 갑이라는 것을 추론하고 있는 것인데, (p.329)이는 율법을 지키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의 말씀이, 모세가 같은 장에서 조금 앞서 진술했던, “네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로되”(신30:6)라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장절의 말씀에서 선한 행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자들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모세가 그같이 선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면 그것의 근원이 되는 믿음에서 나는 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전혀 비논리적인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모세가 ‘하늘’과 ‘음부’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들이 이르기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처소들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이 단어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다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는 마치 어떤 영적 비밀이 그것들 아래 숨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말한 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해설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면 이제 바울이 한 말씀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즉, 생명이 우리를 위해 획득되어 있다는 것과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복음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가지 사실들에 의하여 확증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해서 사망을 삼키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해서 그가 그의 권능으로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p.330)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는 유익이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것을 우리가 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믿음에서 나는 의만 있으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아주 충분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 두가지 요소들-이것들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이 그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누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기업이 우릴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고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는 말씀은 “누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신의 죽음에 수반하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 같은 의심들이 믿음에서 나는 의로 말미암아 제거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그런데 첫 번째 의심은 그리스도를 하늘에 모셔 내리려는 것이 되고, 또 하나의 다른 의심은 그를 다시 사망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신자들-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승천하셨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리려고 하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옥의 공포에서 건져내 주시기 위하여 그것을 당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이 아직도 이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는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요, 실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8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p.331.

바울이 이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율법의 교훈은 결코 양심을 고요하게 해주거나 평온하게 해주지 못하며, 양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믿음의 말씀”은 환유법에 의하여 “약속의 말씀”, 즉 복음 자체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인데, 이는 그것이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때,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다만 사람들이 믿음을 소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구문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바울이 모세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와 모세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 역시 신적 은혜에 대한 약속에서만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p.332.

주의 말씀은 그것이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우리가 시인(고백)하는 것은 입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다.

‘믿음’앞에 ‘시인’이 나와 있는 것은 성경에 아주 흔히 있는 도치법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이 순서상 먼저 나와 있고, 입으로 말미암는 시인-이 시인은 믿음에서 생겨난다-이 뒤따라 나왔더라면 어순이 더 좋았을 뻔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권능이 충분한 주이심을 우리의 입으로 참되게 시인하는 것이며, 그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그분이시오,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그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명시하여 언급했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의 전체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속죄와 속상(贖償)이 비록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기는 했지만, 죄와 사망이 사단을 이기는 이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획득된 것이다. 또한 이 부활에서 의와 새 생명과 영생불멸의 소망이 나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장을 확증할 목적으로 우리 앞에 가끔 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그의 죽으심에서 딴 데로 돌리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그의 죽으심의 결과와 열매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나, 바울은 역사적 신앙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부활 자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의도를 포함시켜 높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p.333)그를 부활하게 하신 의도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여 생명 얻도록 하게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되찾으실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부활 사역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되어져 있다.

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이 구절은 이신칭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구절의 말씀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여 받아들임으로 해서 우리가 의를 얻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믿음의 좌소가 머리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믿음이 위치하고 있는 신체의 부분에 대하여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진지하고 신실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단순한 개념이 아니고, 확고한 확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뿐이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은 앞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을 자주 선언하였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지금은 우리의 구원의 일부가 입으로 하는 시인(고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하는 시인이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다만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신 믿음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해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사실, 그는 다만 참된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참된 믿음에서 고백이라고 하는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 그가 그렇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은 아무도 내용 없는 빈 껍데기 믿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심히 마음이 불붙음으로 해서 그 자체의 화염을 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말은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보는 대로, 바울은 분명하게 구분하여 칭의의 원인은 믿음이라는 것을 밝혔고,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는 데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또한 보여주었다. 아무도 입으로 (p.334)고백(시인)함이 없이 마음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결과로써 필연적으로 입으로 하는 고백이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고백해서 비롯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내밀로 만족하는 까닭에, 입으로 하는 고백은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소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가상적인 믿음을 크게 자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화염도 없고 열도 없는 데도, 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바보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른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1-13).

12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오직 확신만이 요구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부요하시도다.

p.335.

이 단어가 여기에서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자비하다’와 ‘은혜롭다’는 듯을 가지고 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요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4-17).

p.336.

더욱이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은 어디에서나,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작정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는 곳에는 하나님을 믿음이 있고 (즉,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은 말씀의 씨에 의하여 선행되었으며(즉, 믿음은 말씀의 씨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즉, 하나님은 말씀 전파에 의하여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열매를 맺는 경우 하나님의 자비가 분명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음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교-하나님은 이 선교에 의하여 이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구원을 마련해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복음 전파의 원인이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p.338.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 복음 전파를 받는 은혜를 입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요 ‘증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찾아 가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바울이 개인의 소명에 대해서는 여기서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를 상론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즉, 복음은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우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사람들의 손을 빌어 전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이 구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다 적용시켜야 한다.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고자 할 때, 이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자들의 발걸음을 크게 환호하여 맞이하신다. 그러므로 바로 이 진술에 의하여, 바울은 영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사도적 직분이 말씀과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16절.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다......

p.339.

이사야가 왜 이의를 말이 났을 때 받아들여 두었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즉, 이는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믿음이 뒤이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사야가 53장 1절의 하반부에서, “여호와의 손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덧붙여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밝혀 놓고 있다. 그가 한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빛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 비춰 주실 때만이 말씀에서 (p.340)유익을 얻는 다는 것이다. 이같이 내적 소명-이 내적 소명만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유효하고 특유하다-은 사람들이 육성으로 부르는 소명구별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구원에 대한 교훈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구별 없이 자신에게로 초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구별 없이 선택받는다고 주장하는 어떤 해석자들의 논증이 어리석다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약속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질 그것만으로 저절로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한 특별계시에 의할 것 같으면, 구원은 선택된 자에게 국한된다.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구절의 말씀은 말씀 전파의 효능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구절인데, 이는 믿음이 복음 전파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바울이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확실히 인간의 육성은 그것 자체의 힘으로는 영혼 깊숙이 파고 들수가 없다......신앙의 빛은 너무나도 고상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같은 인간의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인간의 연약성들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육성을 빌어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실 수 없다거나 우리 안에서 인간의 봉사로 말미암아 믿음을 창조하실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더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믿음에 유의한 기초는 하나님의 교훈뿐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믿음이 어떤 종류의 교훈에서든지 생겨난다고 (p.341)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생겨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이로 말미암아 신앙을 말씀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의 맹신의 망령이 파괴되게,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말씀이 지지를 받을 때까지는 말씀에 대한 신앙이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하는 가증스런 불경한 교리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여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18-21).

19절. 먼저 모세가 이르되......

p.344.

더욱이나, 생명의 시작과 기원은 신앙의 빛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신령한 존재는 새 창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로 바울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만드신 것으로 일컫고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통해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었다. ‘미련한’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인간의 모든 지혜가 단지 헛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20절.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이전에 나를 구하지 아니하고, 나의 이름을 무시하던 자들이 이제는 나를 찾았고”(이사야가 미래 시제 대신에 과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언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그들의 소망과 바람을 넘어서 나를 찾았느니라”.

어떤 유대인 선생들은 이 구절 전체를 그릇 해석하여,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변절을 회개하고 돌아서게 하실 것을 그가 하속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함은, 곧 이어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65:1하반절)는 말씀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에는 외인이었던 사람들이 새로이 양자가 되어 하나님의 권속이 되리라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p.345)예언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모든 신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일반적인 유형을 볼 수가 있다. 여호와를 앞질러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비록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고, 그를 경배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고, 그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긍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깊은 웅덩이에서 건짐을 받는다.

21절.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내 손을 벌렸노라”라는 표현은 아주 어세가 강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확보하심에 있어서, 육신의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려고 자기의 팔을 벌리는 것처럼, 우리를 향하여 자기의 손을 내밀어 벌리고 계신다. 그가 ‘종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보살핌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다가 기진맥진하게 된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레미야 7:13과 11:7에서도 같은 비유적인 표현을 (p.346)찾아 볼 수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일어나셨다고 말씀되어 있다.

제 11 장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1-6).

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p.348.

현안 문제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마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전에 맺은 언약이 폐기되었는지 그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불충실성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파괴된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수양은 값없이 되어지고,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의혹과 불신이 아무리 굉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흔들리거나 침해될 수 없다는 원리를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진리와 선택이 인간의 공로에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난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2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바울의 대답은 부정적이요, 한정적이다. 만일 그 백성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단연코 부인했었다고 하면, 그는 자가당착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삽하는 말을 끼어 넣어, 유대인들이 버림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그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약의 신뢰성과는 정반대로 행하여, 아브라함의 씨 전체를 결코 버리신 것이 아니다. (p.349)그러나 그의 수양의 효과가 혈육의 모든 자녀들에게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의 은밀한 선택이 수양에 앞서기 때문이다. 이같이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버림을 당했다고 해서 몇몇 씨가 구원을 못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조직체로서의 유대 백성이 버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에 속한 회원은 아무도 버림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례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통상적인 표적이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외적 소명 그 자체로서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한나님의 백성되는 영예가 제공되는 데도 그들이 그것을 거절하는 까닭에, 그 영예가 그들에게서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같이 특별한 백성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이 불변하시다는 증거를 그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이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불변성의 근원을 그의 은밀한 선택에서 찾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관심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가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자기의 결의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앞서 말한 바 있는, “미리 아신다”는 동사가 하나님께로 나와 오도록 되어 있는 각 개인의 성품을 그가 미리 보고 아시는 뜻에서 그저 한번 보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까닭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행위도 할 수 없는 자들을 자기의 자녀들로 택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아신 바된 것은(갈4:9),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은총을 미리 베푸셔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데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일반 소명이 결실을 맺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성은 결코 페하지 않으며 남은 자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은 자기 교회를 보존하신다는 점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차별 없이 자신에게로 초대하기로 하시지만, 그가 자기 자신의 백성인 줄로 아시고, 그의 아들(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이요, 또한 끝날까지 신실하게 그가 지켜주실 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아무도 내적으로 소명하여 인도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p.350.

그러므로,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여 교회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겠다. 만일 성령의 빛을 듬뿍 부여받은 탁월한 선지자 엘리야도 자기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수효를 헤아리고자 했을 때 이같이 오류를 범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 경우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 분별력은, 엘리야의 것과 비교하면, 무디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하여 경솔한 결정을 내리지 말고, 오히려 교회가 우리의 육안에는 전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하여 자라나고 있다는 이 진리를 우리의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선택받은 자의 수효를 계산하는 자들은 우둔하고 교만하게 행세하고 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4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p.351.

우리는 칠천이라고 하는 한정된 수를 무한정의 수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뜻하신 바는 큰 무리를 명기하려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통탄할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그처럼 크게 넘치는 까닭에, 우리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경건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을 경솔하게 마귀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또한 한편으로, 온 세계 도처에 아무리 불경건이 가득하고, 가공할 만한 혼돈이 사방에서 우리를 짓누른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하나님의 날인하에 안전하게 남아 있다는 이 진리가 우리 속 깊은 곳에 새겨져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감시로부터 자기들의 허물들을 감추려고 하듯이, 아무도 이같은 사실을 구실로 삼아 게으름을 핑계치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건전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들만이 구원 받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는 것을 다(p.352)시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자기들의 몸을, 비록 겉으로만 행한 것일지라도, 우상을 섬기어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만이 건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된다. 본 구절의 저자는 마음의 순결성을 보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부정이나 미신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게 하는 것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바울은 그의 진술을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비교시켜 부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술을 서로 상반되는 것들을 비교시켜 부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에서 나는 공로는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세우게 되면 다른 하나를 파기하게 된다. 그러기에, 선택을 논함에 있어서 행(p.353)위를 참작하게 될 때에는, 공로와는 무관하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바울은 선택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자비를 크게 높인다-를 필시 가리우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미리 보시는 자격을 우리의 선택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광신주의자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참작하는 것이 과거의 행위이든지 아니면 미래의 행위이든지 간에, 은혜가 있는 곳에는 행위가 발 붙일 곳이 전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말이 늘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 또는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않고, 한 계단 더 올라가서 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어떤 사람들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간과하셨는가를 묻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하신 뜻 외에 다른 이유로 인하여 이 같은 구별을 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고, 행위를 조금이라도 인정하게 되면 그만큼 은혜를 감소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행위에 대한 예지를 선택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또는 없는가를 미리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의 예지를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은 버리신다고 할 것 같으면, 행위에 대한 보상이 이미 정해진 것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유일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다만 우리의 선택에서 반쪽만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앞에서 아브라함의 칭의에 관하여 논증하기를, 보상이 지불되는 경우에는,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똑같은 근원에서 그의 논증을 끌어내어 진술하기를 하나님이 어떤 수의 사람들을 양자로 삼아 구원 얻게 하실 때 행위가 참작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당연히 지불되어야 하는 보상에 관한 문제이며, 따라서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아니게 되고 만다.

바울은 여기서 선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고 있는 논법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관한 전체 논증에 그것을 확대 적용시켜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때에는 언제든지, 행위에는 전혀 공로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은혜를 언급하는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파기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7-10).

7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p.354.

똑같이 죄인된 자들을 그렇게도 엄청나게 구별되게 한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오직 선택에 의해서만이 그 같은 구별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누가 여기서 알지 못할 것인가?......즉, 우리가 의를 얻게 된 유일한 이유는 ‘택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마치 그가 말하기를 , 의를 얻으려고 애써도 공로를 의지하는 자들은 그것을 얻지 못하나, 공로와는 무관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된 자들은 의를 얻게 (p.355)된다고 한 것과도 같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남은 자를 전체 이스라엘과, 아니 그 백성 전부와 간략하게 바울이 비교하고 있다. 결론은 구원의 원인이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파멸에서 건짐을 받는 것처럼, 택함을 입지 않는 자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무딘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유기된 자들에 관하여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이 당하는 파멸과 정죄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의 말씀들은 단순한 주문에서라기보다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따왔다. 우리가 만일 그것들을 그것들의 문맥에서 면밀하게 살펴볼 것 같으면, 바울이 의도한 것과는 모순되어 보인다. 각 구절이 의미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마음이 무디어지고 완악해진 것이 징계로 간주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 의하여 이미 행하여진 사악한 행위들을 이같이 징계하여 벌하신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입증하고 하는 것은, 본래 사악한 자들이 마음이 무디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버림을 받은 자들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난제를 간단히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때 우리의 본성이 완악해진 그것이 그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불경건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원한 유기에 대해서 말할 때에, 열매가 그 나무에서 또는 강이 그 수원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기에서 연유하는 결과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였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그들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아 심령이 무디어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파멸의 근원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저주를 받은 까닭에, 그들의 모든 언행심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당하게 되는 저주만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사실, 영원한 유기의 원인이 우리에게 감취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대할 때 우리는 놀랄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로 바울의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온 인류에게 가장 지선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을 그가 자유롭게 결정하지 않으신 것 마냥, 우리에게는 알리워져 있지 않고 숨겨져 있는 이 제(p.356)일의 원인을 다른 외관상의 직접적인 원인들 밑에 가리워 놓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더럽고 부패한 씨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받아 마땅한 보상을 하나님이 개인들에게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8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주셨다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가 사용한 어순을 반복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심으로써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결론만을 그에게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실 백성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예언의 말씀의 핵심을 찔러 진술하기를, 사람들이 이 같은 우둔함에 내어 버려졌을 때 모든 감각이 완전 마비됨으로써, 그들이 신랄하게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그는 선언하기를,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이 혼미해져 버린 까닭에, 몹시 놀란 상태에 있게 되어 전혀 의견을 세울 능력이 없다고 했다. ‘보지 못할 눈’이라는 표현은 그들의 감각이 무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미 오래 전에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바울은 ‘오늘날까지’라는 말을 첨부하고 있다.

9절. 또 다윗이 가로되......

p.357.

그러므로 이 저주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들에게 임함으로써, 그들의 음식은 변하여 독물이 될 것이기 때문에(복음이 그리스도의 원수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1-15).

1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p.358.

사도 바울이 한번은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때에는 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유의하여 관찰하지 않으면, 그의 이 논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게 당황하게 된다.

15절.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p.361.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망에서 생명을 어두움에서 빛을 신기하게 나오게 하셨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백성이 부활하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생명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더욱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다고 바울은 추론하고 있다......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부활(사는 것)은 우리가 사망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 한가지 얼마가 꺽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16-21).

16절. 처음 익음 곡식 가루가 거룩한 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p.362.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이같이 비교할 때에 바울이 민족과 민족을 대조하고 있고, 사람과 사람을 대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을 비교할 것 같으면, 그들이 다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동등하다는 것을 발견케 될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로부터 구별되었던 것은, 그들이 여호와께 특별히 속한 백성이 되기 위함이었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거룩한 언약에 의하여 성별되어 있었고 또한 특별한 영광을 덧입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방인들의 경우는 귀하게 여기지를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언약이 그 시기에는 거의 효력을 발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아브라함과 족장들을 우리로 하여금 되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축복이 실속 없는 것이거나 효력 없는 것이 결코 아니었음이 확실하였다. 그러므로 유전적인 거룩이 족장들에게서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바울은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만일 바울이 약속을 고려해 넣었었다기보다, 사람들만을 주제로하여 논하고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이같은 결론은 정당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의롭다고 해서, 그가 자기의 정직성을 자기 아들에게 직접 전달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도 거룩케 되리라는 조건으로 그를 성별하셨고, 따라서 아브라함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전체 후손에게까지 거룩성을 허락케 주셨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모든 유대인들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성별되었었다고 바울이 논증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견해를 확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두 가지의 은유를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제사법에서,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에서 취해 온 것들이다. 제물로 드려진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전체 떡덩이를 성별시켜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무의 즙액은 뿌리에서 가지에로 퍼져 나간다. 떡덩이가 처음 익은 곡식 가루에 대해서 또는 가지들이 뿌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관계성을 후손들이 그들의 부모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관계성을 후손들이 그들의 부모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에게서 성별되어 있다는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서 거룩이 유대 민족의 영적 고귀성을 단지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같은 영적 고귀성은 그들의 본성에 본래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언약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본성적으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유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서 우리의 최초의 본성으로 인하여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민의 고귀성을 초자연적 특권이라고 말해서 좋을 줄로 안다.

19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를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p.364.

바울은 이방인들에게서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내세울 수 있었던 모든 구실들을 예증하고 있다. 이 같은 구실들은 그들에게 교만을 넣어 주기보다는 겸손케 하는 것들이었다.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꺽이었고,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접붙임 받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들은 의당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내야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을 낮추고 순복하는 입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열매는 우리 안에서 겸손과 두려움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확신과 반대되는 공포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더욱 우리가 걱정하거나 안절부절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의 본질은 어떤 것일까? 여호와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것을 생각토록 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이중 상태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본성의 (p.365)비참한 상태를 늘 염두에 두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오직 두려움, 권태, 근심, 그리고 절망이 결과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침내 그에게 부르짖게 되도록 완전히 낮아지고 상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나 자아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지 못하거나 평안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권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위로를 누리지 못하게 되거나, 또는 이 근심과 절망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확실한 기쁨과 소망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이 두려움은 교만하여 경멸하는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수단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넘게 행세하고, 무뚝뚝한가 하면,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거만하고 무례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자긍으로 들떠있지 않도록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아낌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그는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다소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 권고의 말씀은 육신을 억제하는 것-이 육신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결코 믿음의 확실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내가 앞서 진술했던 것, 즉, 바울의 말은 개인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방인 전체를 뭉뚱그려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특별히 명심해 두어야 한다. 이방인들 가운데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말로만 그것을 고백하면서, 까닭없이 교만하여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이방인들이 꺾여질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뒤에 가서 다시 알게 될 것이지만, 이유 없이 그렇게 경고한 것이 아니다.

21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모든 오만을 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 우리가 유대인들의 버림당한 것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지 아니하여서는 안된다. 그들이 파멸되게 한 가지 요인은 그들이 얻은 고상한 품위를 경시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들이 멸시한 데 있었다. 그들은 비록 원가지들이었지만, 아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하여 무례하게 될 경우, 돌감람나무 가지들인 (p.366)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같은 점을 깊이 생각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아주 대담하고도 끈질지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게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바울이 일반적으로 이방인들 전체를 뭉뚱그려 말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꺽어 내는 것’은 개인들에게 적용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의 경우 그것이 변경될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그것이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선언하기를, 만일 그들이 유대인들을 모욕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버리셨던 옛 백성을 다시금 자신과 화목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들의 교만을 인하여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저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21-24).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p.367.

바울은 경건한 자들을 각기 따로 떼어서(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말하지 않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비교하고 있다......바울은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택함을 받은 개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에 대해서 뭉뚱그려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하는 때에는 즉시, 그에게 베풀어진 긍휼이 박탈되어 마땅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 중 아무에 대해서든지, 하나님의 긍휼 안에 그가 계속 거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이 그를 택하실 때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신앙의 견인-이 견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가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은 선택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p.368.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접붙임을 받아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 것으로 바울이 앞에서 인정했던 자들을 그가 어떤 의미에서 찍히는 바 되리라고 경고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가 있다. 우선 이같은 일이 택한 백성에게는 일어날 리가 없지만, 그들에게 이 같은 경고가 필요한 것은, 육신의 교만을 꺾기 위함에서이다. 사실상 육신의 교만은 그들의 구원에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죄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공포에 질려 육신의 교만이 꺾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비추임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제 멋대로 거부하는 육신의 요소를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너희가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이 말씀에 의하여 겸허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바 있듯이, 바울이 여기서 각 개인의 특별한 선택을 논하고 있지 않고,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대립시켜 놓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그릇되게 자랑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한편, 공통되는 온몸(교회)에게 말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이름뿐인 신자들과 그리스도인의 지체들이 많이 있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25-27).

26절.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p.371.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의 말씀을 유대 백성에게 다시금 종교가 회복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바울이 말하고 있었던 것처럼 해석한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일컫는 것으로 보고 싶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왔을 때, 유대인들 또한 동시에 그들의 변절을 돌이켜 믿고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온 이스라엘-이 온 이스라엘을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서 모아지는 것임에 틀림없다-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집에서 맏아들이기 때문에, 첫 자리를 차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같은 해석이 더욱 적합하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완성(완료)을 지적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결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며, 온 세상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갈 6:16에서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로 동등하게 구성되어 있던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일컫고 있다. 바울은 이같이 사방에서 끌어다 모은 백성을 신앙에서 변절했던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과 대립시켜 놓는 것이다......(p.372) 더욱이나, 이 예언의 말씀에서 구속이 하나님의 영적 백성들-그들 가운데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에게 약속되어 있으나, 유대인들이 맏아들이기 때문에,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이 특별히 그들에게서 성취되는 것이 필요하였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들이라고 일컫고 있는 사실은 그 민족의 탁월성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다른 민족들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더 좋아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속하실 분이 시온에 오실텐데, 이는 그가 옛 언약을 고려하신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자기의 죄과를 회개한 사람들은 야곱 중에서 구속함을 얻으리라고 했다. 이 말씀들을 볼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씨(남은 자)를 남겨 두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은 그의 특별히 택한 백성에게서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바울의 주장은, 언약을 파기한 변절한 백성을 화목케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특별한 직분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한가지 사실, 즉 (p.373)변절한 백성이 모두 다같이 멸망하지 않도록, 얼마간의 회심이 틀림없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27절.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사실 유대 백성의 회심에 관한 그의 진술들은 믿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은 너무나 고집이 세고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언약이 저희 죄를 거저 사해 주시는 데에 있었다는 것을 선언하여 이 난관을 제거하고 있다. 우리가 선지자의 말씀에서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변절한 백성을 다루심에 있어서, 그들의 다른 죄들뿐만 아니라, 반역죄까지를 사하시리라는 점이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28-32).

28절. 복음으로 하면......

유대인들이 악랄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멸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밝히고 있다.

그들의 으뜸가는 죄악은 불신앙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잠시동안 완악하게 되었었는데, 이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는 길이 열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영구히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 때문에 (p.374)당분간 하나님을 떠나 있게 된 것은, 이전에 그들에게 허용되었었던 구원이 같은 방법으로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유대인의 조상들과 맺으셨던 언약을 잊지 않고 계셨다.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원한 계획에 의하여 그의 사랑을 가지고 그 민족을 용납하셨었다는 것을 확증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는 헛될 리가 없다고 단언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것이 다음 구절의 말씀의 의미이다.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은사’와 ‘부르심’이란 ‘부르심의 은혜’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그의 언약 가운데로 받아들였던 그 부르심으로만 이해되어야 하며, 여타의 다른 부르심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이 어떤 개인의 개별적인 선택을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체 민족의 일반 수양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일반 수양은 외관상으로는 잠시 폐기되어 버렸던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뿌리째 찍혀 버렸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상실했었기 때문에, 남은 자의 대한 소망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주장하기르, 하나님께서 전에 자비를 베풀어 자기를 위하여 그들을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해 주셨던 하나님의 그 계획이 지금도 확고하니 불변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그가 결코 파기하실 수가 없다고 하면, 그는 유대 민족에게서 그의 자비를 전적으로 거두셨을 리 없다.

바울은 복음과 선택 사이에 어떤 불일치라도 있기나 한 것처럼, 복음을 선택과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유대인들을 택하신 바 그 옛 선택과 이 부르심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유대인들에 대한 선택은 오랜 세대 전에 계시되었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명칭의 기원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나머지 백성들을 (p.375)간과하시고 한 백성만을 자기를 위하여 택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상들을 인하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사랑 받을 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 그리고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라는 언약의 형식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부터 그들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어떻게 긍휼을 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언급된 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인하여 그들에게 진노하신 까닭에 그의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베푸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베풀어진 긍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이 되었다고 하는 30절의 말씀은 다소 귀에 거스리는 표현이지만,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님은, 바울이 그들의 완악함을 설명하고 있지 않고, 단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옮겨 주신 축복을 유대인들이 상실하게 되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경우, 유대인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것을 이방인들이 자기네들의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획득한 것으로 생각치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오직 긍휼에 의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신앙의 빛을 상실케 되었다는 것이다.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바울의 이 놀라운 결론은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절망적으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지금은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전에는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불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도 또한 그 긍휼이 역사할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죄책에 있어서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자신들에게 못지 않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을 둘 다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긍휼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경우 다 구원할 수가 있으며, 그들에게 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견해는 위에서 언급된 호세아의 예언의 말씀인,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호2:23)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p.376)사람들을 완악하게 하신 까닭에 그들의 불신앙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로 말미암아 만사를 처리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불신앙의 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신 목적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케 하여, 모든 공로가 배제되고, 오직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달려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를 요점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은 그 안에 어떤 공로될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가 베풀어 주심에 있어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주신다는 것이다. ‘긍휼’이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가 모든 사람을 값없이 거저 구원하시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죄인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자들은 완전히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바울의 말의 뜻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다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불평할 근거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긍휼이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베풀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믿음에 의하여 구했어야 하는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리돠 아멘(33-36).

33절.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p.377.

바울은 히브리어 문법에 흔한 반복법을 사용하여 똑같은 주제를 말만 바꾸어서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판단’에 대하여 말한 연후에, 하나님의 작정, 또는 그의 활동이나 통치의 뜻으로 ‘길’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여전히 감탄조로 말을 잇고 있다. 그의 감탄조의 표현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그가 찬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우리의 탐구하려는 호기심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 성경에 의하여 계시하여 주신 것 외에는 그에 관하여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헤어나기 어려운 미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되고 만다.

34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p.378.

그는 두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제재시키고 있다. 첫째로는, 모든 인간이 영안이 어두워져 있음으로 해서 그들 자신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을 전혀 알 길이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왜냐하면 미지의 사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고 그릇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술함으로써,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자비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장님이 어두운 가운데서 전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 문제를 탐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 한계를 우리의 생각이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유념해야 한다......비록 성경의 모든 교리는 그것이 웅대한 그것이 (p.379)웅대한 까닭에 인간의 지력을 초월하지만, 경건하고도 조심성 있게 성령을 안내자로 삼아 따르는 신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지를 분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의 경우는 달라서, 그것의 깊이와 높이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

35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왜냐하면 그는 아무에게도 빚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괄목할 만한 구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게 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무 자랑할 것 없는 자에게 그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신다는 점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 버릇이 있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p.380.

그는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서, 우리의 존재 목적이 그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한 보존해 주시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모순되는 것이겠는가!.....본문의 말씀의 요지는, 만일 만물의 시작(창조자)이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또한 끝(완성자)이 아니시라고 하면 자연의 전체 질서가 뒤집힐 것이라는 것이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주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영구불변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입증된 것으로 바울은 이제 자신있게 생각하고 있다. 본문의 문장은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될 것 같으면 진의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본문의 경우는 문맥을 살펴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 문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시는 것이 당연하며, 그리고 그의 영광,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류와 온 피조계가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려고 하는 견해는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이고, 참으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 말할 수가 있다.

제 12 장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

p.381.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다. 곧,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의를 찾아야 하며, 오직 당신의 자비로부터만 우리의 구원을 사모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축복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위해 쌓여지며 날마다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아주 질서정연한 이론을 통해서 우리의 도덕적 행동의 규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활로 거듭나며, 우리의 생명 그 자체는 거룩한 가르침과 교훈에 의해서 그 형태를 갖추며 규제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먼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의의 원천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지 않은 채, 우리의 생활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열성을 부리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모든 의의 원천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로부터 사람을 일으킨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것이 복음과 철학의 주요 차이점이다. 철학자들이 도덕 문제에 대해서 그처럼 휘황찬란하게 그리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재치를 부려가며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비취는 모든 장식이 기초가 없는 아름다운 초대형 건축물에 불과한 것은 그들이, 원칙을 생략한 채, 머리가 없는 몸과 같은 변명된 교의를 가지고 큰 소리를 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가르치는 방법이 이와 흡사한 데가 많다. 그들은 내키지 않는 투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보다는 이방 철학자들에게 더 가깝다는 것은 아주 뚜렷한 사실이다.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p.382.

다들 아는 대로 불순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대해서 선언하는 모든 내용을, 오직 육신에 빠지려는 목적으로, 게걸스럽게 붙잡고 늘어진다. 그런가 하면 위선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거룩한 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열성을 말살이라도 한다는 듯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당신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악의적으로 흐리게 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는 쪽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바울의 권면은 인간들이란, 그들이 먼저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의 덕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당신을 예배하지 않을 것이요, 충분한 열성을 다하면서 당신을 두려워하거나 순종하도록 깨우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들이 공포에 의해서 일종의 강요된 순종을 짜내는 것이면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를 비굴한 공포가 아니라 의에 대한 자발적이요, 기꺼운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동여매려는 뜻에서,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달콤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끌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근, 만약에 우리가 그처럼 인자하고 관대한 아버지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도, 우리 편에서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당신에게 헌신하려 들지 않는 다면, 배은망덕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의미가 더욱 더 강력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앞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를 풍성하게 느끼면서도 앞에 나온 가르침을 듣고 당신에 대한 사랑의 불이 지펴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목석보다 더 단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인간들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구원에만 달려 있는 것으로 말할 경우, 존귀한 생활에 대한 모든 권면이 무효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경건한 마음이 하나님을 순종할 마음을 갖는 것은 가르침이나 명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p.383)에 대한 심사숙고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여기서 이 사도의 온유한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신자들을 엄격한 명령이 아니라, 권면이 친밀한 간청으로 상대하는 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너희 몸을......산 제사로 드리라.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소유요, 둘째 우리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거룩해야 옳은 것은 무엇이든 먼저 성별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당신의 거룩하심에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을 따를 경우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전인생에 걸쳐서 성결에 대해 묵상해야 하며 우리가 불결에 빠질 경우 그것이 일종의 신성모독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일단 성화된 것을 속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

3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

p.386.

그는 어떠한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들에게 그가 받은 권위를 상기시켜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그의 의미는, “나는 내 스스로 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가 나에게 맡기신 명령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그가 앞에서처럼 자신의 사도직을 은혜와 관련시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칭송하려는 뜻에서이다.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자기가 자신의 만용에 이끌려 억지로 사도직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서 그리고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서론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확증함으로써 로마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당신을 멸시하지 않고자 한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덕도 끼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적 고통만 가져올 뿐인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명령하고 있다. 바울은 누구든 (p.387)자신의 능력과 소명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우리로 하여금 건전한 마음을 갖고 잘난 체하지 않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묵상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무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은사가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이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4-8).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p.388.

바울은 이제 그가 신앙의 분량에 따른 각 신자의 지혜의 한계에 대한 주장을 모든 신자들의 소명과 관련시켜 확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모든 자들 사회에 인간의 몸의 각 부분 사이에 있는 관련과 유기적 연합을 확립시켜 놓으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한 몸안에서 서로 연합하라는 조건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스스로 그러한 연합을 가질 수 없었기에 당신께서 손수 이 연합의 기반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에 있는 관계가 신자들의 교제에 있어서도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비유를 적용함으로써 각자가 자신의 성격, 능력 및 소명에 맞게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하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용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당면 문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한 몸의 각 부분에 서로 독특한 기능이 있으며 그 어떤 부분도 동시에 모든 기능을 가지거나 다른 부분들의 기능을 차지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부분이 다 다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분배해 주시고 있다. 이러한 독특성에 의해서 당신께서는 우리를 지탱하고자 하는 질서를 정하셨으며 그 결과 각자는 자신의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스스로를 조절하며 타인에게 속한 임무에 주제넘게 뛰어들지 않게 하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려고 추구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처지로써 만족하고 타인의 임무를 횡령하는 일이 없도록 자발적으로 자제해야 옳다.

6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모든 인간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을 만큼 충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자족하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빌릴 수 (p.389)없게 될 경우 교제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경건한 자들 사이의 교제란 각자가 자신의 분량으로 만족하며 자기가 받은 은사를 형제들에게 나눠주며 또 자신도 남의 은사의 도움을 받으려 할 때만 가능한 것으로 본다......모든 것이 모든 인간들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각자에게 한정된 몫이 돌아가도록 분배되고 있다. 각 개인은 아무도 자신의 기능을 저버리고 타인이 그것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의 교화를 위해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집착해야 옳다. 각 개인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공동의 유익을 위해 나눠 쓰되 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때 교회의 안전은 더없이 탁월한 이 질서와 조화에 의해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이 질서를 뒤바꾸는 것은 그것을 제정해 놓으신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은사의 차이점은 인간의 뜻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은혜를 분배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혹 예언이면......

혹자는 예언을 예고하는 주님께서 모든 수단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의 위엄과 탁월성을 드러내고자 하셨기에,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에 교회에 성행하던, 예고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믿음(p.390)의 분량대로라는 대목이 모든 구절과 관련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더 넓은 의미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유능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주석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계시에 대한 특수한 은사로 이해하는 자들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의 예언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것을 설명하는 특수한 은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모든 옛날 예언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와 당신의 복음안에서 결론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14:5).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전13:9)는 바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당신의 교회를 장식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신 저 경이적인 은혜만을 생각하고자 한 것인가 하는 점은 명확치 않다. 그보다 우리는 그가 단순히 교회안에 영속적으로 남아 있는 일상적인 은사를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다른 문맥에서(고전14:32) 그는 예언자들의 영이 예언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선언하면서 처음 연사에게, 만약에 동석하고 있는 누구에게 계시가 주어질 경우, 잠잠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같은 이유에서 여기서 교회에서 예언하는 자들에게, 어느때든 그들이 올바른 선에서 방황하거나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신앙의 원칙에 자신들의 예언을 일치시킬 것을 권면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신앙은 종교의 제 1원리들을 뜻하며 여기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발견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정죄받고 있다.

다른 구절에 있어서는 별 어려움이 없다. “사역자로 임명받은 자는”하고 그는 말한다.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그런 존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그는 올바르게 목회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성취하고 그의 명칭에 일치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가르침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는 교사들에게 건전한 교화를 주천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교의에 있어서 뛰어난 자는 교회가 참으로 올바르게 가르침 받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점을 깨닫고 교회가 자신의 교의를 더욱 더 배우는 것만 힘쓰도록 (p.391) 하라”는 것이다. 교사란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훈계하는 자다. 권면에 있어서 뛰어난 은사를 가진 사람은 효율적으로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임무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더 이상 그것들이 서로 차이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교의가 없이는 권면할 수 없지만 가르치는 자에게 동시에 권면의 은사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아무도 사역과 무관하게 예언하거나, 가르치거나, 권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여러 은사에서 엿보며 교회질서에 유익한 것으로 보는 독특성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8절.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바울은 여기서 주는 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소유를 주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재물분배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에 대한 기술적인 용어다. 그리고 그는 자비를 보여주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데 이것은 고대 교회 풍속에 따라서 병자 간호 책임을 맡은 과부들과 다른 봉사자들을 뜻한다......바울이 말하는 다스리는 자들이란 교회 통치를 위임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곧 다른 회원들을 주도하고 다스리며 규율을 잡던 장로들이다. 하지만 그가 이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내용은 모든 종류의 지도자에 대해서 확대적용될 수도 있다. 모두의 보존을 (p.392)책임맡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큰 관심이 요청되고 있으며 모두의 안전을 밤낮으로 경계할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큰 근면이 요청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바울이 전반적인 지도자를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당시에 경건한 위정자란 아무도 없었다) 윤리의 재판관들인 장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9-13).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p.393.

영혼에 있어서 ‘열성을 보이며’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나귀처럼, 마냥 게으르며, 그러므로 계속 채찍질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무감각을 교정하는 것은 성령의 열성뿐이다. 그러므로 선행에 있어서의 근면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지펴 놓는 열성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열성을 권면하고 있는가?’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이 열심히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임무가 신자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맥풀린 상태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지펴주시는 불길에 빠져 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p.395.

제 아무리 강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주 새로운 힘을 얻지 않고서는 이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쳐버리는 것을 막는 최선의 처방은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7-19).

18절.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p.400.

하지만 여기서 두가지를 경고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답시고 아무에게서도 미움을 사지 않는 방향에서 사람들의 호의를 사려해서는 안된다. 산뜻한 품행과 마음의 평정 때문에 만인의 칭송을 받지만 복음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게서일망정 미움을 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두 번째 경고는 착한 성품을 가진다면서 굴종의 단계에까지 빠진 나머지 평화를 보존한답시고 사람들이 죄악에까지 고분고분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항상 평화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인만큼 그는 두 가지 예외적인 문구, “할 수 있거든”과 “너희들의 역량에 따라서”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경건과 사랑이 요구하는 임무에 입각해서 이 예외를 결정함으로써 이 두 원인 가운데 한 가지나 두 가지 모두의 압력을 받기 전에는 평화를 해치는 일이 없어야겠다......그리스도의 군인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과 지속적인 평화를 가질 수 없다.

제 13 장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1-2).

1절. 각 사람은 ......굴복하여.

p.404.

오직 모든 지상적인 권세가 폐지될 때라야 세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높임을 받으며, 그들이 모든 인간적인 노예살이의 멍에를 벗어버릴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믿는 정신없는 사람들이 어느 때나 약간씩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는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곧 그들은 구속주가 오시기 전까지 크게 번창하던 왕국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당신께서 나타나신 뒤에 계속 노예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므로 천지간의 유일한 주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왕국을 낚아채려고 음모하는 자들을 합법적인 지도자와 지배자들로 인정하는 것이 얼핏 모순된 것으로 보였다.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p.405.

우리가 위정자들에게 굴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의 권능을 무시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전복하려고 발버둥치는 자요, 하나님 자신을 저항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세속 정부의 주인공되는 분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은 당신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위정자들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대목을 역병, 기근, 전쟁, 기타 죄악에 대한 처벌이 당신에게서 왔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이 세상의 공정하고 합법적인 통치를 위해서 그들을 임명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독재 정치와 불공평한 권위는 임명받은 정부가 아니지만 그래도 통치권은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 정부의 주인공되는 분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은 당신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위정자들의 권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대목을 역병, 기근, 전쟁, 기타 죄악에 대한 처벌이 당신에게서 왔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이 세상의 공정하고 합법적인 통치를 위해서 그들을 임명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독재 정치와 불공평한 권위는 임명받은 정부가 아니지만 그래도 통치권은 인류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고 다른 악에 대책을 추구하는 것이 합법적인 만큼 사도는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위정자들의 권리와 권위를 인류에게 유용한 것으로 대하고 존경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부과하는 처벌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부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께서 적법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고의적으로 정해 놓으신 수단이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어느 누구든 하나님을 저항하는 자치고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만큼 바울은 이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은 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 저주를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펴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바울의 의도는 권위에 저항하는 자들이 처벌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재앙의 모든 행위,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p.406)그것을 받아 내시든지로 이해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자들에게 기다리는 종말을 우리에게 전반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3-4).

3절.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지배자들의 유용성이란 주께서 이 수단을 통해서 선인들의 평화를 제공하고 악인들의 외고집을 제지하려고 의도하셨다는 점이다. 이 두 방법을 통해서 인류의 안전이 확보되고 있다. 악인들의 횡포가 저지되지 않고 무고한 자들이 그들의 고집으로부터 보호되지 않는다면 전반적인 파멸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인류를 파멸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대책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이것을 조심스럽게 보존해야 할 것이요, 우리가 인류의 공공연한 적이라는 핀잔을 듣는 일이 없어야겠다......하지만 그는 여기서 위정자의 참되고 자연스런 임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여기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지도자에게 돌려 마땅한 순종을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 악한 지도자가 주님께서 백성의 죄악을 처벌하는 채찍이라면 하나님의 이 탁월한 축복이 저주로 변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라는 점을 반성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선한 규례’를 존귀하게 여기도록 하자...... (p.407)하지만 지도자들이란 그들의 독재적인 통치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정한 통치에 대한 유사성을 유지하지 않으면서 선하고 탁월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에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면에서 인간 사회를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독재정치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4절.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란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손에 쥐어준 칼의 용도에서 이 점을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칼의 권리를 입증하는 훌륭한 대목이다. 주님께서 위정자를 무장하면서 그에게 칼을 사용하도록 위임하셨다면 그가 자들을 사망으로 (p.408) 처벌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재앙을 수행함으로써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죄있는 자들의 피를 흘리는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다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아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5-7).

5절.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을 묶어놓는 이 굴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이 설령 무장되어 있지 않고 그를 성가시게 하고 무시해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처벌의 위협이 우리 위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는 것 못지 않게 이런 일을 시도해서는 안된다. 개인에게는 주님께서 우리 위에 세워 놓은 자의 권위를 박탈할 권리가 없다. 이 전체 강론은 공적인 통치와 관련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양심을 상대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자들이 이 문맥에서 그들의 참람한 독재를 확립하려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8-10).

8절.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p.410.

나는 이 대목을 단순한 의미로 보는 편을 택하는 데 그 이유는 위정자들의 권력에 관한 교훈을 사랑에 대한 율법과 관련시킴으로써 아무도 그것을 빈약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게 하는데 바울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지도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청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사랑의 법에 따라야만 행동해야 옳은 것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착한 사람들이 번영하기를 바란다면(그렇지 않는 것은 몰인정한 것이 되겠지만), 여러분은 마땅히 법과 판단이 득세하도록 힘쓰는 가운데 백성들이 법의 보호자들에게 순종하도록 해야 할 터인데 그 이유는 이들이 우리들에게 평화를 누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무정부 상태를 도입하는 것이 사랑을 침해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은 무정부상태의 즉각적인 결과란 국가 전체의 혼란이기 때문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바울의 의도는 율법의 모든 명령을 사랑으로 요약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사랑을 유지할 때 계명을 제대로 순종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담이 있다면 어느 것이든 감당할 준비를 갖추는 셈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리가 위정자들에게 바쳐야 하는 순종을 두고 얘기할 대 말한 교훈을 확증하고 있다. 이 순종은 결코 사랑 가운데 가장 하찮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혹자는 여기에 피할 수 없는 난제가 하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할 경우 율법이 성취된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하나님 예배를 생략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바울이 율법 전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율법이,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임무에 있어서, 우리에게서 요구하고 있는 임무만을 언급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할 때 전체 율법이 성취된다는 말이 사실인 것은 인간들에 대한 참된 사랑이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오직 둘째 돌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문제가 그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온 세상에 대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이 구절에서 행위에 의한 칭의를 찾으려 하는 궤변자들의 반론은 들으나마나 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이 무슨 일을 하고 안하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무데서고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p.411)인간이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말 속에는 율법 준수가 참된 의라는 점에 대한 부정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그것을 수행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만큼,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거기서 제외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바이다.

9절. 간음하지 말라......

우리는 그가 말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충하지 안되는데 그것은 위정자들에 대한 순종이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형제애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결코 가장 하찮은 방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1-14).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p.412.

‘밤’이란 단어를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뜻하며, 이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밤에 그러듯이 방황하고 잠들어 있기 마련이다. 불신자들은 눈이 멀 뿐 아니라 우매한 두 질고 밑에서 이 잠이란, 그의 말대로, 사망에 의한 형상이다. ‘빛’이란 단어를 통해서 그는 의의 태양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솟아오르시면서 사용하는 신령한 진리의 계시를 (p.413)뜻하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란 우리가 무장을 갖추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실천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빛의 갑옷’이란 명예롭고, 온건하며, 정숙한 행위들을 뜻하는데 이것은 대개 낮에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바울의 행위보다 ‘갑옷’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싸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리고 나서 그는 설명 형식으로 깨어야 할 “적합한 시간”이 되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크로노스)가 아니라 (가이로스)는 올바른 순간, 또는 호기를 뜻한다......그러므로 이 대목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믿기 시작했을 때보다 이제 우리에게 더 가깝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신앙 이전의 시기를 두고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여기서 ‘낮’이란 다른 곳에서처럼 신앙의 빛을 의미하지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우리들이 지금 복음에서 (p.414)그것의 시초를 보는 천상적인 생활의 복된 광채를 뜻한다. 그가 간략하게 언급하는 내용을 요약하자면, 마치 우리가 동틈을 보고서 태양의 완연한 빛이 가깝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밤이 다 지난 것으로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는 불신자들처럼 칠흙같은 흑암으로 덮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소망이 복음에 의해서 우리 눈 앞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14절.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p.415.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모든 면에서 있어서 당신의 영의 능력에 의해서 방어되며 따라서 성결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는 또한 다른 문맥에서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갈3:27).

제 14 장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마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지는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1-4).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그는 여기서 교회를 가르치는 데 특별히 필요한 교훈으로 넘어가고 있다. 곧, 기독교 교의에 있어서 더 큰 진전을 본 자들은 스스로를 체험이 보다 적은 자들에게 적용하며 이 사람들의 연약성을 부축하는데 그들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추측컨대 당시 교회가 특별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섞여 있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다. 이들 가운데는 모세 율법의 의식 준수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으며 유아기 때에도 그것을 먹고 자랐기에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것을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습관들지 않은 멍에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p.417.

약한 자들을 골치 아픈 논쟁으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의도라는 점이 명백하다......유대인들 가운데 율법의 그림자에 집착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당분간 용서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을 너무 가혹하게 누를 경우 그들의 신앙이 뿌리째 뽑혀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직 충분히 확립되지 않은 마음을 괴롭히거나, 그들을 회의 속에 말려들게 하는 질문들을 논쟁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넓은 의미로 확대하는 가운데 연약한 양심에 덕이 되기는 고사하고 불안과 동요를 일으키는 얽히고 섥힌 난제를 모두 여기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수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어떤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우리의 가르침을 개인의 능력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5-6).

5절.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p.419.

바울은 지금까지 음식의 선택에 있어서 따르는 조바심에 대해서 언급했다. 여기서는 날을 구분하는 문제에 대한 도 다른 예를 덧붙이고 있다. 양자는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음식을 구별하면서 어떤 것을 불결한 것으로 선언하여 그것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그는 또한 절기와 엄숙한 날들을 정하면서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릴 적부터 율법의 가르침의 양육을 받아온 유대인들로서는 그들이 처음부터 받았으며 일생에 걸쳐서 습관이 든 절기에 대한 존경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처럼 장기간에 걸쳐서 삼가 온 음식에 감히 손을 대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연약성의 표시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명백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엇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양심에 위배되는 무엇을 행하는 것이 뻔뻔스러움과 모독의 표시였듯이, 그들이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삼가는 것도 신앙의 표시였다.

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p.420.

바울은 절기의 준수그리스도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그가 그러한 타락행위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으로 믿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ㄱ의 말씨에는 절기를 준수하는 자들이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 셈인 것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한 것만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준수해야할 절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품고 있는 견해와 그들이 묶여 있는 준수 그 자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견해는 미신적인 것이요 바울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것을 연약한 것으로 부름으로써 그것을 정죄한 바 있으며 다음에 더 공공연하게 그 점을 밝힐 것이다. 이러한 미신에 사로잡힌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어떤 날의 엄숙함을 해치지 않으려 할 경우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이 점을 인준하시는 것은 그가 무슨 일이든 의심스러운 양심으로 하는 것을 주저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대인이, 절기에 대한 미신적인 준수로부터 완전히 구출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절기의 준수를 추천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준수의 필연성은 율법에 의해서 그에게 부과되고 있으며 (p.421)그는 그것이 폐기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보다 더 완전한 계시를 기다리며 자신을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국한시킬 도리밖에 없으며 자유의 축복 역시 그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그것을 누릴 수 없다.

우리는 부정한 음식을 삼가는 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7-9).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p.423.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죽는데 있어서의 원칙을 배우게 되는데 당신께서 계속적인 슬픔과 지루함 속에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하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간의 되기 전에 떠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께서 우리의 인생의 절정기에 우리를 소환하실 경우 항상 출발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리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0-13).

11절.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p.425.

그러므로 바울이 이 예언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적용시킨 것은 옳았다.

이 문단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주목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는 하나님, 곧 당신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단번에 밝힌 바 있는 하나님이시다(사42:8). 그런데 당신께서 자신의 것으로만 주장하는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면 당신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 말이지 이 예언의 진실성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으로부터 당신에게 한 백성을 모으시고 그들을 회복시켜 당신의 위엄을 예배하고 당신의 복음을 순종하게 하셨을 때 공공연하게 계시되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무릎을 꿇릴 이름을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말로서 언급하는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빌2:9,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셔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은 아버지께서 천상천하의 모든 심판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8).

14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p.426.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음식도 올바르게 순결한 양심에게는 불결하지 않으며 음식을 깨끗하게 사용하는데 있어서의 유일한 장애물은 무지와 오류에서 일어날 뿐이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혹 자기 음식이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이 (p.427) 있다면 그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 못하는 법이다......바울이 말하는 예외를 통해서 우리는 그 어떤 음식도 타락한 양심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을 정도로 순결하지 않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거룩하게 하는 것은 신앙과 경건성 뿐이다. 불신자들의 손에 닿는 것이 모두 더러워지는 것은 그들이 내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딛1:15).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9-23).

22절. 네게 있는 믿음을.

p.431.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는 한, 각자가 어리석고 미신적인 의식을 지키면서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없는 것으로 추론하는 주석가들에 의해서 이 문맥이 곡해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문맥 자체가 보여주고 있듯이 바울에게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의식은 하나님 예배를 위해서 정해진 것이요 우리의 고백의 일부이다. 신앙을 고백과 분리시키는 자들은 태양에서 그 열을 강도질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사용하는 우리의 자유에 대해서만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23절.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p.433.

여기서의 ‘신앙’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한결같은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을 뜻한다. 곧 확실성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서 나온 확실성을 뜻한다.

제 15 장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1-3).

3절.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p.436.

온갖 중상모략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그리스도를 짓밟으며, 주님의 복음을 못되게 변형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칼과 불로 박해하는 자들의 사회에서 더없이 큰 영예를 찾는 것을 가장 간절한 기도의 제목으로 삼는 자들은 없어야겠다. 그리스도를 멸시할 뿐 아니라 그에게 욕을 돌리는 자들에게서 그런 영예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안전한 것이 못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4-6).

4절.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p.437.

이 문맥은 구약이 폐기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는 광신자들을 반박하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반론을 제공해 주고 있다......우리가 우리의 역경을 인내하는 마음으로 견딜 자세를 갖추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경을 위로로 달랠 때부터이다. 신자들의 인내란 철학자들이 권면하는 대담무쌍이 아니라 당신의 선하심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맛을 통해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콤하게 될 때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온유다. 이 인내가 우리 안에서 부단한 소망을 키워주고 지탱해 준다.

5절.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하나님만이 인내와 위로의 주인공이신 것은 당신께서 이 양자를 당신의 영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불어 넣어 주시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당신께서는 이 목적을 성취하는 도구로서 당신의 말씀을 사용하신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7-12).

7절. 너희도 서로 받으라.

p.43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묶어주신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지 않을 경우에만 우리의 소명을 확증하게 되는 것이다.

8절.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p.440.

여기서 옛 언약은, 비록 그것이 지상적인 모형과 관련을 맺고 있었지만, 사실 영적인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약속의 성취는 영원한 구원과 관련지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만큼 구원은 오직 그의 후손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막는 뜻에서 바울은 일부러 이 약속을 조상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다.

11절.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p.441.

이 점은 시편기자가 덧붙이는 이유에서 더욱 더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그는 본 문맥에서 하나님의 진실성과 자비를 두고 감사를 돌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시117:1).

12절.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것은 모든 예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언이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여기서 사태가 거의 절망적일 때 다윗가문의 메말라 죽은 둥치에서 한 순이 솟아날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과거의 영광으로 회복시킬 한 가지가 이 멸시받는 뿌리에서부터 무성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밝히 말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의 작은 남은 자를 위로하고 이 문단에 나오는 묘사를 통해서 생각할 때 이 순이, 이 세상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라는 점이 명백하다......그러나 그들은 말씀 전파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소망이 가질 수 없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3-16).

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p.442.

그는 앞에서처럼 이 문단을 주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주님이 그들에게 주시기를 원한다는 기도로 끝맺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께서는 결코 당신의 명령을 우리의 힘이나, 자유의지의 능력에 따라서 맞추시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스스로 순종할 자세를 갖추도록 우리의 임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보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당신의 은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성령의 능력으로”라는 구절은 이 모든 것이 신의 자비의 선물이라는 점을 얘기해 주고 있다.

14절. 나도 확신하노라.

p.443.

바울은 하나의 반론을 예상하고 있다. 아니 그는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너무 강압적인 권면으로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질 경우, 그들을 달래는 뜻에서 일종의 양보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감히 그들에게 교사와 권면자의 신분을 취한 것을 용서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그가 그들의 지혜, 친절, 떠는 견인불굴의 인내를 조금이라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임무가 그에게 이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어떤 사람이 남의 일에 개입하거나 자기와 관련이 없는 일을 다룰 경우 드러나기 마련인 주제넘음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제거하고 있다......바울은 자신의 명령을 들어서 이 교만과 씨름하려 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그것을 누르면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직분 때문에 그들에게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 말해주고 있다.

15절. 내가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p.444.

하지만 그가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은 자신의 직무의 탁월성을 추어 올리려는 뜻에서이다. 그는 자기에게 높은 영예를 안겨준 하나님의 은혜를 지적하지만 자신이 자신의 사도직분에 힘입어 수행한 일이 멸시받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있다.

16절. 복음을 성별하게 하사(주-칼빈의 번역에 복음을 성별하게 하사로 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 주석에서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에라스무스가 처음에 ‘복음을 받들게 하사’로 번역한 것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한다. 바울은 여기서 제사장에 의해서 수행되던 거룩한 의식을 두고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자신이 획득하는 백성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스스로를 복음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제사장, 또는 집행자로 만드는 셈이다. 그가 복음의 거룩한 의식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서이다. 기독교 목사제사장 직분은, 말하자면 인간들에게 복음을 순종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지, 로마 가톨릭에서 지금까지 오만하게 자랑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바침으로써 인간들을 하나님과 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지, 로마 가톨릭에서 지금까지 오만하게 자랑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바침으로써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의 목사들을 마치 이 제사장이라는 명칭이 그들에게 영구히 주어진 것이라도 되듯이, 제사장들로 언급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역의 위엄과 효능을 칭송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 비유를 사용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전파자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신앙으로 깨끗하게 된 영혼들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에라스무스는 뒤에 그의 번역을 “복음을 제물로 드리게 하사”로 바꿨다. 이것이 부정확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흐리게 하는 것은 복음이란 사역자가 인간들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에 비교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제물이 하나님께 ‘받으심직’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p.445)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 사역을 칭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성별되도록 자신을 내바치는 자들에게까지 큰 위로를 주고 있다. 옛날 제물이 외형적인 성화와 씻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바쳐졌듯이 이 제물들은 성결의 외형적인 성화와 씻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바쳐졌듯이 이 제물들은 성결의 영에 의해서 주님께 성별되며 이 성결의 영의 능력의 내면적인 작용을 통해서 그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법이다. 영혼의 순결은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의 음성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며 생명이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청결의 기능이 성령에게 속하는 것이 적합하며 그것이 옳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로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17-21).

20절. 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p.447.

바울로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종과 기독교회의 한 목사로서 입증할 뿐 아니라, 그가 로마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면 한 사도의 신분과 직무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여기서 사도직분의 올바르고 특수한 점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의 임무는 “너희는 가서......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하는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것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곳에 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이 점을 주목하는 가운데 특별히 사도직분에 속하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는 (p.448)일이 없어야겠다. 교회를 세운 사도의 자리를 채우려고 후계자를 임명하는 것을 잘못으로 보는 일이 없어야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을 교회의 창설자로 볼 수도 있으며 그들을 계승하는 목사들에게는 그들이 세워 놓은 건축을 모두 남의 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기초석이요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법이다(고전3:11, 엡2:20).

21절. 기록된바......

그는 그가 자신의 사도직의 표적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을 확증하는 뜻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나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다른 무엇보다도 이 나라가 온 세상이 확대될 것이라는 점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당신의 이름을 전에 들어 본 일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사52:15). 이 사명이 사도들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 타당한 것은 특별히 그들에게 이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이 예언이 그에게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문단을 목사직에 적용하려 하는 시도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은 합당하게 정해진 교회에서 항상 지속적으로 전파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은 목사들이 자기가 떠난 다음에 온갖 장소에서 동일한 가르침을 날마다 선포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선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려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22-24).

22절. 그러므로 또한 내가......여러번 막혔더니.

p.449.

이 문단에서부터 바울이 스페인으로 갔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거가 박약한 말이다. 그는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망이 때때로 좌절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25-29).

27절.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p.450.

바울은 또한 이 채무의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서부터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다......(p.451)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사역자들에게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역자들을 배출한 전체 유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선언함으로써 복음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28절.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나는 이것이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했던 것을 봉인을 통해서 확보하던 고대의 습관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쾌히 승낙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성과 정직성을 추천하고 있다.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돈을 인봉한 채로 가지고 간다는 것은 그것을 정직하게 보관한다는 얘기가 된다. ‘열매’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 다음에 그들에게 모아진 이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농부가 전답의 소출을 통해서 먹고 사는 것이나 같은 원리다.

29절. 내가 너희에게 갈때에......

이 대목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첫째 의미는, 복음의 축복이란 선한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 것인 만큼, 복음이 로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을 의연금으로 국한하는 자들의 견해에 찬동할 수 없다. 그 둘째 설명은, 바울이 자신의 도착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뜻에서 그것이 열매를 맺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소망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인데 그 까닭은 자신의 도착이 “그리스도의 축복의 (p.452)충만함”, 곧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으로 복음을 크게 증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성과와 성장에 대한 의미이다......전자의 설명이 보다 더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으며 내게도 둘 가운데 이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그가 이런 바람에 대해서 계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영적 부요함에 있어서 풍성한 점을 보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맛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30-33).

30절. 형제들아 내가......너희를 권하노니.

p.453.

성령의 사랑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함께 결합하면서 사용하는 사랑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육신이나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합의 기반이 되는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기도의 조력을 받는다는 것이 어찌나 큰 하나님의 축복이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받은 바울마저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같이 비천하고 쓸모 없는 인간들이 그것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일 것이다. 이와 같은 문단을 죽은 성도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를 지지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너무 몰염치하다.

나와 힘을 같이하여......

사실 말이지 우리의 힘이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p.454)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제 16 장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16).

1절. 내가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p.456.

그는 먼저 본 서신을 들고 가는 자인 뵈뵈를 추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녀가 그녀의 직무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아주 영예롭고 거룩한 사역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가 암시하고 있듯이 그들이 그녀를 환영하고 그녀에게 모든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이유는 그녀가 항상 자신을 모든 경건한 (p.457)자들에게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녀가 겐그레아 교회의 한 종인만큼 그녀를 주안에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녀에게 아무 존귀나, 친절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그가 다루고 있는 사역의 성격은 디모데 전서 5장 10절에서도 묘사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의 공금으로 생게를 유지했으며 이 임무를 띤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이 임무를 위해서는, 자신들이 가사와 자녀들에게 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을 전적으로 신앙적인 봉사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한 과부들이 선발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직무에 받아들여졌으며 여기에 얽매이고 빚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의 봉사를 남에게 빌려주는 사람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므로 사도는 일단 이 임무를 맡아놓고 후에 이것을 버리는 자들을 가리켜 신의를 파기하는 자로 비난하고 있다(딤전5:11). 그들은 독신생활을 해야 했던 만큼 만약에 그들이 60세 미만일 경우에는 선택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평생 독신이란 위험하고 또 사실 그 연령이 못된 경우에는 해롭다는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한참 타락하던 때에는 교회에 아주 큰 혜택을 줄 수 있는, 이 더없이 거룩한 직분이 빈둥대는 수녀단으로 타락되고 말았다. 물론 이 수녀단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타락한 것이요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본래의 의도에서 얼마나 거리가 멀게 되었든지 ‘성숙’의 성소와 사창굴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게 되고 말았다.

16절.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p.460.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듯이 키스는 유대인 사회에서 빈번하게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우정의 표시였다......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어떤 종류의 의식도 구체적으로 명령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세상의 속된 우정과 구별되는 형제적 사랑을 소중히 여길 것을 권면하고 있을 뿐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7-20).

17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p.461.

그는 이제 모든 교회를 자극하는데 있어서 때때로 필요한 권면을 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사단의 종들이 항상 그리스도의 나라를 소란하게 하려고 온갖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소란을 피우는 데 있어서 다음 두가지 중 하나를 택한다. 곧 분쟁의 씨앗을 뿌려 사람들의 마음을 진리의 통일성으로부터 끌어가버리거나, 아니면 잘못을 일으킴으로써 그들을 복음의 사랑으로부터 소외시켜 놓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의 통일성에서 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적인 고안의 교리에 의해서 파괴되는 경우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서 증오나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경우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이 둘중에 하나에 대한 책임이 있는 모든 자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이 신자들을 속이거나, 모르는 새에 잡아채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그들을 피해야 하는 것은, 그의 말대로, 그들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든지 신자들에게서 이런 경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소홀이나 무관심 때문에 불한당들이, 우리가 그들을 저지하기도 전에, 교회에 크나큰 해를 끼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세심한 경계를 펴지 않을 경우 그들은 종종 경이적인 간계를 부리면서 그들의 길을 밀고 나가면서 피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또한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에 대해서 배운 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에 있어서 일치하는 자들을 가르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그러나 평화와 통일성이라는 구실 밑에(p.462)서 거짓뿐이요, 불경건한 교회의 음모를 옹호하는 것은 몰염치한 사기이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에서 이 문단을 들어 우리에게 악의를 조장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공격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것을 흐리게 해 온 마귀의 속임수들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지 바울은 그가 모든 종류의 견해 차이를 예외 없이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통 신앙에 있어서의 일치를 파괴하는 견해 차이만을 정죄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18절.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그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조금도 생각치 않고 오직 자신들의 배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종들로부터 언제고 구별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그들의 길을 거짓으로 위장하고 다른 배역을 가장하고서 자신들의 사악을 감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바울은 감언이설로 호의를 사려는 그들의 잔꾀를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복음 전파자들의 특징은 다정함과 반가운 태도이지만 여기에는 사람들을 헛된 칭찬으로 발라 맞추거나 그들의 잘못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가 곁들여져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 협잡군들은 그들이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고 그들을 너그럽게 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추종자들을 놓지 않으려 한다.

20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상하게 하시리라.

p.463.

이 표현은 기도라기보다는 그들을 북돋아 주는 하나의 약속이다. 그는 그들이 아무 두려움없이 사단을 상대로 싸울 것을 권면하면서 그들에게 신속한 승리를 약속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사단을 패배시키셨지만 사단은 언제고 그 전투를 재개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전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이것이 명백하지 않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단의 최종적인 패배를 약속하고 있다. 그는 사단이 공공연하게 짓밟힐 최후의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단이 그 때 자신의 고삐를 박살내고 풀어 제친 가운데 오만하게 모든 것을 혼란하게 할 것인 만큼, 주께서 그를 굴복시켜서 그를 발 밑에서 짓밟히게 만드실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는, 곧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확보해 놓은 모든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는 기도가 따르고 있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느니라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 없음)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1-27).

21절.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p.465.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로지 현재만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으로 복음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러실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사실 당신의 입양이 사망 이후까지 확대되는 것은 당신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기업으로 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나머지 발언의 의도는 복음의 능력과 위엄을 칭송하는 데 있다. 그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파”로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복음의 전체 개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가르침을 “그 비밀의 계시”로 부르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그것을 더욱 경청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최상의 경의를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새겨야 옳을 줄 안다. 바울은 그것이 창세로부터 수 세기에 걸쳐서 감취어져 있었다는 점을 덧붙임으로써 이것이 얼마나 숭고한 비밀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추구하는 들뜨고 교만한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학문보다 훨씬 더 높은 하늘의 지혜의 형언할 수 없는 보화가 거기서 펼쳐진다. 천사들마저도 이것들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면 인간은 제아무리 거기에 경탄을 보낸다 하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이 지혜가 비천하고, 일상적이요, 단순한 양식 속에 감취어져 있다 해서 그만큼 존경을 못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육신의 교만을 꺾는 것을 기뻐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수 세기에 걸쳐서 숨겨서 있던 이 비밀이 어떻게 그처럼 갑작스럽게 드러 날 수 있었는가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었기에 바울은 이것이 어떤 경솔한 인간적인 행동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그는 또한 인간의 오만한 마음이 흔히 내세우기 좋아하는 캐는 듯한 질문을 봉쇄하고 있다. 사람들은 의외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사건은 모조리 아무 뜻없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여기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의심에 빠져 들고 만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예상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복음의 신기함 때문에 그것을 내리 깎을 목적으로 탁상공론에 말려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오늘날 우리가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선지자들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p.466)모든 선지자들은 복음에 대해서 어찌나 명백한 증거를 지니고 있던지 그것이 다른 곳으로부터 더 좋은 확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마음을 알맞게 준비하심으로써 그들이 익숙치 않은 것의 신기함 때문에 당황하는 일이 없게 하셨다.

혹 바울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하신 신비를 두고 모든 세대에 걸쳐서 감취어져 왔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난제에 대해서 베드로는 쉬운 해결책을 주고 있다. 그는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제공된 구원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탐구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해서 봉사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시에 침묵하신 것은 당신께서 당신의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바라셨던 일들에 대한 계시를 보류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복음을 가리켜 이 문맥에서와 엡3:9, 그리고 골1:26에서 숨겨진 비밀로 부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마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가장 가능한 견해는 이것을 이방인들의 부름에 적용하는 자들의 것이다. 바울은 명백히 이 점을 골로새서에서 빗대어 말하고 있다(골1:27). 나는 이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는 있을망정 그것이 유일한 이유라는 점은 확신할 수 없다. 내게는 바울이 구약과 신약 사이의 다른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설명한 모든 내용을 과거에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복음의 빛의 밝은 명료성과 비교할 때, 너무도 희미하게 가르쳤던 만큼, 오늘날 게시되고 있는 것들이 지금까지 숨겨져 왔던 것으로 이갸기된다 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를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를 것으로 이야기된다 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를 것(말4;2)이라는 말라기의 예언은 공연한 것이 아니요, 이사야도 공연히 메시아의 사명을 극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그는 다시 그가 제 1장 처음에서 언급한 복음 전파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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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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